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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3

[도서] 땅의 역사 3

박종인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기다리고 기다리던 #땅의역사 3권이 나왔다. 기자님께서 매주 기사로 연재를 하고 계셔서, 언제고 다음 시리즈가 나올거라 생각은 했지만(.....는 사실 내 간절한 바람이었지만ㅋㅋ), 진짜로 3권이 눈앞에 뙇!!!!!! 크흡, 드디어 왔어요 왔어, 땅의 역사 새 시리즈가 나왔어요 ㅠㅠㅠㅠㅠㅠ!! 


 

이렇게 또 내 책장엔 박종인 기자님의 책 한권이 늘어나고여..히히ㅣ히히..

 

이 책은 #박종인 작가님이 말했듯이 수험서로는 불량하고, 교양서로는 불온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국사책에 실린 자긍심 가득찬 이야기나, 흔히들 읽는 역사 교양서에 있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이 책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긍심 가득찬 이야기 이면에 있는 어두운 이야기,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었으나 찬란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르치지 않는 이야기, 정말 백성을 위한 일을 하였으나 권력에서 배재되었다는 이유로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마디로 당대의 권력자들, 세력가들 손에 의해 지워진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다. 

 

 

사람은 내 자신의 어두운면이든, 역사속의 어두운면이든 그 무엇이든지간에 어두운 면을 마주봐야만 무엇이 문제이고 잘못인지를 바로 잡고 바른 길로 나아갈수 있다. 그래서 꼭 알아야만하고,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

 

 

향기 풍기는 군자, 세상에 없다 

백성이 밥 한 그릇 먹으면 벼슬아치들 침 흘리며 달려든다

매화에 황금열매가 달리면 갑질로 거둬들이고 걸핏하면 매질이다

이 모두 매화탓이니 어찌 베어버리지 않겠는가

-땅의 역사3 p 021 - 패관잡기 「작매부」, 

 

시골 사람(야인:野人) 하나가 이렇게 묻는 것이다. “어느 날 우리 고을 사람이 떠들석하게 ‘유자가 왔다, 유자가 왔다’ 하기에 보니 선생이었다. 유자가 무엇인가.” 그가 답한다. “음양의 변화와 오행의 분포, 초목의 크고 시듦, 귀신의 정과 유며으이 이치까지 통달해 아는 사람이다.” 야인이 대답했다. “자신이 어질다 자처하고 남을 대하면 남이 허여하지 않고, 자신이 지혜롭다 자처하면 남이 도와주지 않는다. 위태하구나.” 야인은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정도전,『삼봉집』 권4) 백성은 밝고 지혜로웠다. 정도전은 백성을 위한 새 세상을 꾸미게 되었다. p 047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집필했다. 조선의 통치시스템과 철학이 다 들어있다. 민본이다. ‘임금이 높다면 높고 귀하다면 귀하다. 그러나 만민은 지극히 많다.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마크게 염려할 일이 생기게 되리라.’(정도전, 『삼봉집』) p 049

 

태조 이성계의 무덤, 건원릉. 그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성계의 공신들과 역신이 실려있다. 헌데 공신과 역신의 명단 모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삼봉 정도전이다. 

 

 

공민왕의 남자였던 정도전. 썩어빠진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도전. 그가 원했던 개혁은 책상머리에서 말로만 하는 개혁이 아니었다. 나주 유배시절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진짜 백성을 위한 개혁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그였다. 개혁을 위해서는 기득권의 권력을 빼앗아야 했고, 부패된 행정제도를 바로잡아야했고, 빼앗긴 백성들의 땅을 돌려주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정도전은 이성계라는 인물과 손을 잡았고, 하나씩 하나씩 개혁을 위해 앞장섰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디자인했고, 설계했다. 이성계가 조선의 초대 왕이 되었으나, 왕은 절대권력의 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백성’을 위하는 나라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이성계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해했고, 공감했기에 정도전의 개혁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정도전은 명실공히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아비와 달랐다. 정도전의 개혁에 공감은 하였으나, 그에게 왕은 절대권력의 자리였다. 이방원은 칼을 들었고, 그 칼에 정도전의 피가 뿌려졌다. 해서 정도전은 역신이 되었다.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이었으나, 조선왕조가 끝나가는 오백여년간 그 이름자 하나 섣불리 꺼내어서는 안될 역신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건 이후의 이야기다. 이방원은 본인이 처단한 정도전의 개혁을, 직접 이어갔다. 다만 그 중심이 ‘왕’에게 있을뿐. 

 

 

2021년을 살아가는 나에게 정도전이 맞았는지, 이방원이 맞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때에는 왕조시대가 당연한 흐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부터 조선이 끝날때까지, ‘왕’으로써 권력을 휘두른 조선의 왕들을 보았을 때, 정말 왕에게 권력을 다 주는게 맞았을까 싶을때가 있다. 그렇다고 또 정도전의 주장처럼 재상중심 정치를 한다고 했을때, 과연 조선 오백여년간 올바른 재상들이 나올수 있었을까?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당장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역대 총리(재상)들의 행실을 보자. 올바르게 정치를 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나? 어떤 이들은 앞장서서 국민 학살을 주도했고, 또 어떤 이들은 말로써, 몸짓으로써 국민들을 죽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탕평책과 문치로 나라는 화려하게 포장되고 있었다. 그런데 백성은 신음했다. 가난으로 신음했다. 가난은 학정과 수탈에서 나왔다. 1787년 경상우도로 암행을 다녀온 어사 이서구가 이렇게 보고했다. ‘환곡은 생판으로 빼앗는 것과 같아서 환곡이 없다면 참으로 낙토가 될것이라는 말이 있을정도다. 참 불쌍하다.’ 그래서 환곡을 바치고 나면 백성은 자루를 거꾸로 털어 끼니를 충당하고, 세금은 지방관 개인 돈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더라는 것이다.(1878년 5월 4일 『정조실록』) 이서구는 환곡과 군정, 노비에 얽힌 문제들 조목조목 보고하고 바로잡을 방도를 내놓았다. p 068

 

우리는 정조시대를 조선 후기 르네상스라 일컬으며, 그를 칭송한다. 나 역시도 그런 편이다. 하지만 그런 정조를 칭송하기전에, 알아야될 사실들이 분명히 있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바로 시작되서, 백성들이 못된 탐관오리들에게 수탈을 당했다? 아니, 그렇지않다. 못된 탐관오리들에게 수탈을 당한건 정조 사후부터 시작된게 아니라, 이미 훨씬 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다. 그래서 암행어사인 이서구가 백성들의 수탈현장을, 사실 그대로 보고서로 작성하여 정조에게 올렸던 거다. 그러면 이 때 백성들을 향한 수탈이 멈춰졌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탐관오리들의 모진 수탈에 백성들은 서양에서 들어온, 평등사상을 추구하는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조는 천주교를 용납하지않았고, 실제로 정조 때부터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정조에게 천주교는 그저 성리학 체제를 뒤흔드는 불온한 종교였다. 그렇게 천주교 교리가 담긴 서적들을 싸잡아 불태웠고, 심지어는 저잣거리에서 백성들에게 싼 값에 책을 팔았던 책쾌들마저 싸그리 잡아들였다. 문자는 권력이었고, 권력은 양반과 왕실의 전유물이니, 한낱 백성들 따위가 문자를 알아서는 안되었다.

 

 

정조는 인재등용을 위해 부패한 과거제가 아닌, 초계문신제를 이용하여 많은 인재들을 발탁했다.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 등 대게 실용주의 노선을 탔던 사람들이 초계문신제로 등용된 인물들이다. 이 당시 정조에게 등용된 사람 중에는 안동김씨 김조순도 있었다. 정조는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한마디로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다. 정조 사후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실용주의 노선을 탔던 사람들을 정계에서 쫓아내고, 유배보냈다. 정조가 인재라고 등용했던 김조순, 정조가 선택한 남자 김조순. 그렇게 안동 김씨의 시대가 열리며, 세도정치의 포문이 열렸다.

 

국가를 자기 재산 내지는 금고로 생각했던 세도가들은 금고를 털어내듯 가렴주구와 학정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 나라는 빈털터리였다. 예정대로 민란이 폭발했다. p 088

 

 

전북 정읍에는 피향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에는 흩어져 있던 각종 선정비들이 모여 있다. 앞에서 볼 때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위풍당당한 관찰사 이서구의 선정비다. 왼쪽 끝은 현감 조규순의 선정비다. p 070

 

세도정치의 시작은, 조선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말과 같다.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들은 시체에도 세금을 매겼고, 왈왈거리는 개에게도 세금을 매겼다. 온갖 세금에 백성들은 죽거나, 민란을 일으키거나 둘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백성들의 고통은 신경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백성들을 수탈한 탐관오리들이, 본인들의 선정비를 건립하게 했다. 정읍에 세워진 조규순의 선정비도 그런 맥락이다. 조규순은 동학농민혁명의 단초가 되었던, 탐관오리 조병갑의 부친이다.

 

 

그렇다면 조선이 망해간 이유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 때문인걸까? 아니, 그것도 아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주자학이라는 학문에 매몰되어, 사농공상 계급에 따라 중함을 나누었다. 공자왈 맹자왈- 죽은 자의 글을 외는 사람들이 제일 귀했고, 그다음이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었다. 공과 상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천대했다. 그렇게 과학을 천대했고, 상업을 천대하며 조선은 스스로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던 거다.

 

1745년 5월 12일 영의정 김재로가 영조에게 물었다. “지난번 연경에서 들여온 책들과 측후기와 규일영(태양 관찰용 망원경)과 지도를 아직 폐하께서 관상감에 내리지 않았나이다.” 영조가 답했다. “태양빛을 직접 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규일영은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이 되니 이미 명하여 깨뜨려버렸다. 책과 지도도 모두 물에 풀어 씻어버렸다.” 이에 여러 신하가 모두 ‘찬탄하였다.’.  (『영조실록』) p 135

 

영조가 외국에서 들어온 책과 망원경을 없애버린지 약 백년 뒤 일본에서는 굴절망원경을 개발했고, 심지어 태양을 관찰애 태양흑점지도를 작성했다. 동시대에 조선의 고종은 일식이 일어나자, 태양이 사라졌다며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이미 세계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고, 한반도 반대편에선 지하철이 다니고 있었는데 말이다. 

 

 

고대에 한반도에서 문화를 전해받던 옆나라 일본은 전국시대 즈음부터(임진왜란 전후) 이미 우리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전국시대의 패장인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 학문과 각종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을 단행했으나 역시나 네덜란드와는 교류를 지속하였고, 그와 별개로 일본이라는 나라는 과거부터 상업을 천대하지 않았고, 과학 역시 천대하지않았다. 

 

 

임진왜란 발발전, 명종 때 대마도인이 조선에 조총을 건네주었으나, 조선은 1도 신경쓰지 않았다. 시계를 조금 더 앞으로 돌리면, 일본은 서양의 조총을 처음 접하고, 조총을 국산화하기위해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일본은 조총 국산화에 성공했고, 그 조총을 대마도인이 조선에 가지고 온 것이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무시했다. 1592년 그렇게 일본 조총부대가 한반도에 쳐들어왔다. 

 

 

조선이 망하기 시작한 시간은 세도정치 보다 더 앞, 상업과 과학을 천시한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상황(아편전쟁)을 바라보는 조선과 일본 지도부의 시각은 달랐다. 일본 막부 고문인 경제학자 사토 노부히로는 “천지개벽 이래 미증유의 사건”이라며 “그 옛날 십만 몽골 강병을 물리쳤듯, 포대를 쌓고 실탄을 터트려야 한다”고 막부에 주장했다. 5년 뒤인 1845년 3월 28일 청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이정응은 조선 조정에 이렇게 보고했다. “無事矣무사의.” ‘아무 일 없다’는 뜻이다.(『승정원일기』) p 151

 

조선은 개혁군주라 불리는 정조 때 부터 천주교 박해를 지속하였고, 이는 서양의 보복으로 돌아왔다. 병인박해로 프랑스군이 처들어오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 이후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조선과 교역을 위해 강화도로 왔는데, 제너럴셔먼호와 조선백성들이 충돌하였고, 조선백성들은 제너럴셔먼호에 불을 지른다. 이로 인해 미국군이 처들어오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이 두 전쟁에 대해 조선은 이겼다고 말하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과연 이긴 전쟁이 맞을까? 최신갑옷과 최신무기로 중무장한 외국군과 여러겹 천으로 덧댄 옷을 입은 조선군. 조선군은 무차별적으로 죽어나갔고,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다. 그 외국군들이 뱃머리를 돌려 자국으로 돌아간건, 조선이 끝까지 개항을 하지 않고 버텼기 때문에 학을 떼며 돌아간 것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겼다며 정신승리를 할뿐이었다. 외국군들의 총에 죽어나간 자국 군인과 백성들에겐 눈을 돌린채.

 

 

신미양요가 있은 불과 4년뒤 강화도에 일본의 운요호가 들어왔다. 그렇게 조선은 일본에 강제 개항이 되었고, 결국엔 일본에 의해 나라가 사라졌다.

 

1905년 을사조약 직전, 미국이 독립을 지켜주리라 확신하는 고종 최측근 이용익에게 메켄지는 이렇게 충고한 적이 있다. “당신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데 남이 보호해줄 까닭이 있는가.” 국가가 해주지 않는 그 독립과 자강을 이제보니 의병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p 181

 

이회영 가문은 서울 명동과 경기도 양주에 있는 땅을 팔았다. 이상룡 가문은 99칸 임청각을 문중에 팔았다. 김대락 가문은 내앞마을 삼천 석 땅을 팔았다. 내앞마을 친척이자 훗날 ‘만주 호랑이’라 불린 무골 김동삼 또한 초가삼간을 내놓고 만주로 갔다. p 227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지고, 왕공족이다 조선귀족이다 하며, 권력자들이 바뀌어버린 나라의 사람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어떤 양반들은 조선귀족자리를 버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 조선에서 제일 낮은 곳에 있던, 나라의 보호조차 받지 못했던 민초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공족, 조선귀족을 자처한 사람들은 일본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움직인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심지어 그들은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이름만 바꿔서, 계속 같은 짓거리를 반복했다.

 

해방이 되었다.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락의 종증손 김시중이 말한다. “면천한 노비들이 농사지은 좁쌀도 먹고 소주 양조장에서 술 만들고 남은 수수껍질 얻어서 사카린 섞어서 퍼마시고 온 가족이 아침부터 취해 자빠지기도 했다. 중학교 월말시험 볼 때는 월사금 안 낸 아이는 교실 밖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많이 울컥해서, 왜 울 할배가 만주에가서….”

 

지역과 신분과 노선으로 갈등을 빚는 운동가들을 보면서 이회영은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했다. 이회영은 1932년 밀정으로 변절한 조카 이규서의 밀고로 체포돼 고문사했다. 김대락은 1914년 만주에서 죽었다. 이상룡 또한 1932년 길림에서 죽었다. 김동삼은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돼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었다. 김대락의 누이이자 이상룡의 처재이자 자결순국한 이중업의 아내 김락은 3.1운동 때 고문을 받고 실명으로 고통받다 1929년 죽었다. p 230

 

일본이 패망하고, 한반도에 미군정이 들어오고, 일제강점기에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은, 미군정을 배후로 다시 권력을 움켜졌다. 일제강점기 때는 밀정을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였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을 앞세우며, 노선갈등을 빌미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였다. 

 

한용운이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고금동서를 물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나라든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수백년 부패한 정치와 현대 문명에 뒤떨어져 나라가 망한것이다.” 일본의 압제에 의해 나라가 사라졌지만, 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p 276

 

조선이라는 나라를 강제로 점령했던 일본은 분명히 나쁜 놈들이고, 그들이 지금까지 하는 짓꺼리도 분명 나쁜 짓이고 욕을 해도 시원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본의 패악이 조선의 위정자들의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이 제대로 된 정치를 했다면, 나라의 부국과 강병을 위해 정치를 했다면, 조선이 그렇게 처절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백성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계를 돌려 2021년.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조선을 망국 기차에 태웠던 그들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지금도 세상에는 힘으로 호령하고

말로 치국을 하는 자들이 널려 있지 않은가.

참으로 난세가 아닌가.

-땅의 역사 3, p 079

 

 

어딘가에서 듣기를 사람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미래로 나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적어도 난 역사를 통해 배우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특히 국가를 위해 일하고,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공직에 있는 말단 공무원부터, 고위급 관료들, 그들 중 역사를 통해 배우고, 더 나은 미래, 바른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매일매일 챙겨보는 방송이 뉴스인데, 심지어 그 뉴스도 여러 시각으로 보기 위해, 여러 방송사의 뉴스를 고루고루 돌려가며 보고 있는데. 어쩜 하나같이 듣기만해도 기분 좋아지는, 행복한 그런 일은 없는건지. 난세에 영웅난다는데, 지금이 난세 아닌가? 영웅은 대체 언제나오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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