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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4

[도서] 땅의 역사 4

박종인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드디어 #땅의역사 4권을 읽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박종인 기자님의 글은 책이든, 연재기사든 무엇이든 좋으니 제발 널리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 대게 빛나는 역사, 역경을 이겨내거나 힘든 시기를 목숨 받쳐서 지켜낸 영웅들의 이야기가 태반이다. 물론 이런 빛나는 역사는 우리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애국심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더 나아가서 누군가는 빛나는 역사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내가 생각치 못한 많은 부분을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빛나는 역사만 배우는 어떤 사람들은 자긍심과 애국심으로만 중무장한채 ‘내 나라가 이런 나라야’, ‘내 조상이 이런 사람이야’ 라며 으스대기도 한다. 대게 이런 경우는 빛나는 역사만을 배운채, 징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징비하지못한 제일 큰 이유는, 빛나는 역사를 불러오기 전 어두웠던 내 나라의 문제를 몰랐기 때문이고, 영웅들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힘든시기를 불러 일으킨 내 조상들의 이기심과 권력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두웠던 역사를 모르고, 혹은 무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징비하지 못하였고, 개선하지 못하였으며, 오로지 자긍심과 애국심으로만 똘똘뭉쳐, 과거 우리의 조상들은 아픈역사를 되풀이했다.

 

 

일본의 야욕을 수차례 인지했음에도 무시하여 임진/정유재란이라는 7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반도, 임진왜란 이후 불과 백년도 안되서 잘못된 선택으로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며 또 다시 초토화된 한반도, 수차례 근대화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차버리고 우물안에 갇친 채 부정부패한 노론의 정치로 무력하게 일본의 식민지배를 불러드린 조선말기. 이 모든 일은 우리가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던, 또 다른 우리의 조상들이 징비하지 못하여 아픈 역사를 되풀이한 결과이다.

 

‘역사는 나비가 만든다.’ 북경에서 펄럭인 나비 날개가 일본을 움직였다는 뜻이다. 말차에 대한 집착은 다완에 대한 집착을 불렀고 다완에 대한 욕심은 전쟁을 통해 다기 원천 기술자들을 조선에서 폭력적으로 데려가도록 만들었다. 조슈번으로 끌려간 도공 이직광은 훗날 조선으로 돌아와 동생 이경을 데리고 조슈로 돌아갔다.(서로 다른 시기에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에서 제회했다는 논의도 있다: 노성환, 「일본 하기의 조선도공에 관한 일고찰」, 『일어일분학』 47권, 대한일어일문학회, 2010) p 047

 

 

조선 중기, 우리의 역사를 바꾼 ‘나비’는 다름아닌 대륙(송나라)에서 제조한 말차였다. 

 

 

송나라로 유학을 갔던 일본 승려 에이사이는 그 곳에서 말차를 맛보고, 말차에 매료되어 일본으로 가져간다.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다. 명나라는 말차를 금지하고 엽차를 장려했다. 그렇게 대륙의 말차문화는 사라졌으나, 일본에선 승려 에이사이를 시작으로 말차문화가 융성했다. 말차문화가 융성하자, 덩달아 차를 담을 찻잔, 즉 아름다운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아름다운 찻잔을 찾던 일본은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조선에선 막사발로 취급받던 도기가, 일본에선 매력적인 찻잔으로 변모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선은, 아니 한반도는 오랜기간 도자기를 구워왔다. 조선은 백자로 유명했고, 그 이전 시대 고려는 청자로 유명했다. 조금 더 들어가면 고대 일본의 스에키 토기는 한반도 가야계 도래인에 의해 전래된 새로운 도자 기술로 만들어졌다. 그만큼 한반도의 도자기술은 월등했고, 일본은 그런 한반도의 도자기술이 탐날 수 밖에 없었다.

 

 

1592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우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선정벌을 외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선 다성으로 추앙받는 센노리큐에게 다도를 배웠고, 다도를 즐겼다. 각설하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들은 조선의 도공들을 싸그리 잡아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포로송환을 시작했을 때, 대다수의 도공들은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왜일까?

 

 

1697년 어느 봄날, 그 광주에서 도공 39명이 한꺼번에 굶어 죽은 것이다. 도공은 그 직업이 천한 공업인지라 신분은 천민이거나,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천민 취급을 받는 ‘신량역천’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그릇을 굽는 업무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p 107

 

 

1542년에 편찬된 『대전후속록』은 사기장은 대대로 업을 세습한다고 규정했다. 숙종 때는 아예 관요 주변에 마을을 만들어 전속 장인들로 관요를 운영했다. 도공들에겐 직업 선택은 고사하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심지어 이들이 만드는 도자기는 오로지 국가를 위한 것이며, 개인 판매용 그릇을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한 도자기 제조만으로는 살길이 막막하므로, 몰래 개인 판매용 그릇을 굽기도 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범죄였지만, 도공들의 생존이 걸린일이었기에 암암리에 묵인, 진행되곤 했다. 직업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던 도공들이 관요에서 도주할 경우 곤장 100대에 징역 3년을 받았다. 실제로 곤장 70대만 맞아도 장독으로 죽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조선의 도공들은 죽어서야 관요를 떠날 수 있었다. 조선에서 도공은 천하디 천한 소모품이었고 천민이었다.

 

 

그런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서 받은 대우는 어땠을까? 일본은 도공들에게 사무라이 신분을 주었으며, 장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며 도자기를 굽게 하였다. 그렇게 일본에서 도자기를 굽게된 조선 도공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대우를 받았고, 자기 이름을 남길 수 있었으며, 본인들이 만든 도자기가 하나의 작품을 인정되는 것을 보았다. 조선에선 아무개에 불가한 도공들이 일본에서는 도자기 장인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죽은 뒤 도자기 신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아니, 추앙받고 있다.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게 일본에서 도자기를 굽던 조선의 도공들은, 후손 대대로 지금까지도 도자기를 굽고 있으며,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전 세계로 수출되면서 중세 일본을 부유하게 해주었다.

 

 

일본 근대화 작업인 메이지유신을 이끈 주역은 대부분 이들 조슈, 사가, 사쓰마 세 번에서 나왔다. 조선에서 폭력적으로 수입한 ‘내열기술’은 용광로 건설에 기초가 됐고, 자기를 만들어 판 돈은 그 시설을 만드는 자금이 됐다. 1996년 사가번 도자기 마을 아리타에서는 이런 내용이 담긴 역사서를 펴냈다. ‘이 대포도 군함도 우리 아리타 자기가 가져다 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꽃의 마을 아리타의 역사 이야기』. 1996) p 048

 

 

그들은 자신들을 인정해준 일본에서 끊임없이 도자기를 만들었고, 그 도자기는 중세일본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일본은 도자기를 굽던 ‘내열기술’을 발전시켜 용광로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일본은 조선 도공이 만든 도자기를 밑천삼아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개혁의 밑천을 마련하고, 훗날의 동아시아 재패를 위한 군수물자의 밑천도 마련한다.

 

 

조선백자는 고려청자와 함께 대한민국이 세계만방에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아귀가 맞이 않는 기록들이 몇 있다. 우선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대한제국 황실 ‘백자꽃무늬병’은 영국제다. 대한제국 황실 문양이 금색으로 박혀 있는 ‘백자오얏꽃무늬탕기’ 제조사는 일본 ‘노리타케’이고 제조연도는 1907년이다. p 104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은 도공들을 천대했다. 영조는 영조는 기교와 사치 폐단을 막기 위해 사치스런 도자기 생산을 금지했고, 정조는 도공들에게 사적인 용도로 그릇을 제조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렇게 조선의 도공들은 굶어 죽어갔다.

 

 

조선에 남은 조선의 도공들은 그저 아무개였고, 천민이었고, 소모품이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장인으로써, 기술자로써, 전문가로써 인정받았다. 이것이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조선으로 돌아오려하지 않은 이유다. 이것이 같은 조선의 도공과,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보유했던 조선과 일본의 결말이 달라진 이유다.

 

서기 1771년 6월 2일, 양력 7월 13일 여름 아침이었다. 태양 볕 아래 경희궁 중간 문인 건명문 앞에는 남정네들이 우글거렸다. 사내들은 모조리 발가벗고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아침부터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거의 죽게 된 자들이 100명 가까이 되었다. 자빠져 있는 사내들은 ‘책쾌’와 ‘상역’이다. 책쾌는 서적 외판 상인이고 상역은 통역관이다. p 077

 

 

우리가 쓰는 한국어는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이라는 문자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세상에서 제일 단순하지만, 제일 효율적이고, 문자 탄생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무이한 문자 ‘훈민정음’ 말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백성들은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책을 읽고 쓸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조선이란 나라에서는 서점이 없었다. 서점이란 책을 사고 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인데, 성리학적 이념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성리학에서 반하는 상업행위를 천대했다. 고로 성리학의 이치를 담고 있는 책을, 성리학에서 반하는 행위로 사고팔면 안되었다. 그래서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세종이 기껏 문자를 만들었으나, 백성들은 이 문자를 지식과 정보의 취득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식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책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니, 책을 판매하는 책쾌들이 나타났다. 백성들이 책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책쾌를 통하여 책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조 때에 이르러, 이런 책쾌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죽여버린다. 

 

 

영조가 책쾌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죽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청나라에서 발행된 『강감회찬』에 전주 이씨 왕실이 고려 역적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하필 이 거짓정보를 담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는 것이다. 그냥 거짓정보도 아닌 조선 왕실을 능욕하는 거짓정보가 담긴 책을 말이다. 그래서 책을 유통하는 자, 책을 읽은자 모두를 잡아다가 죽였다. 책도 싸그리 불태웠다. 영조는 책쾌 금지령을 내렸다. 책쾌를 통해 책을 구할 수 있었던 백성들은, 더이상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아주 완벽하게 문자와 책은 권력가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1481년 두보의 시를 번역한 『두시언해』가 출간됐다. 과거 시험에 필수적인 ‘표준 번역’교과서였다. 『맹자언해』를 비롯한 『사서언해』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경서들은 앞서 사진에서 보이듯,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 아니었다. 한문은 그대로 둔 채 한국어 어순으로 정렬한 책이었다. 다시 말해서 한자를 모르는 백성은 읽을 수 없는, 표준 해석을 위해 사대부 지식인이 찾아 읽는 전용 교과서였던 것이다.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순수 언문으로 돼 있는 반면, 이들 고급 지식은 백성들이 접근할 방법이 없는 닫힌 책들이었다. p 080

 

 

그렇다면 영조 이전엔 백성들이 책을 많이 접하고, 고급지식을 접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것도 아니었다. 훈민정음이라는 언어가 나왔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유교적인’  생활을 위한 단순한 지식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고려는 좀 달랐을까? 아쉽게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고려 역시, 문자는 권력층의 전유물이었다. 

 

 

서양에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로 인해 수천, 수만권의 성서가 발행되었고,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종전엔 값비쌌던 책이 인쇄술과 종이의 발전으로 책값이 저렴해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아주 쉽게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서양 사람들은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고, 점점 발전해나갔고, 그렇게 산업혁명, 시민혁명이 우리보다 몇백년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서양이 빠르게 근대사회로 나아간 이면에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자’와 ‘책’이 있었다.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고려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문자를 만든 조선, 그들이 만든 인쇄술과 문자발명은 오로지 빛나는 역사일뿐일까?

 

정묘호란 종전 때 후금은 조선 왕자 한 명을 볼모로 요구했다. 인조는 원창부령 이구에게 급히 왕제 원창군이라는 군호를 내리고 은수저, 은병, 은잔을 바리바리 싸주며 대신 볼모로 가라고 명했다. ‘부령’은 종5품으로 명목만 있는 종실이다. p 164

 

 

인조는 즉시 먼 왕실 친척인 능봉수 이칭에게 능봉군 군호를 내려 자기 동생으로 삼았다. 먼 친척에서 순식간에 왕제가 된 이칭은 다음 날 역시 고속 승진한 심집과 함께 산성을 내려갔다. 후금 진영에서 적장 마부대가 말했다.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다.” 정묘년 왕제 원창군이 가짜였음을 후금은 알고 있었다. p 166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능양군, 인조.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했으나, 그를 몰아낸 인조는 광해군과 달리 가야했다. 인조가 선택한건 사대, 즉 친명. 당시 명나라는 지는 해였고, 청나라는 뜨는 해였지만 인조에게 그런건 없었다. 자기가 몰아낸 광해와는 반대의 길을 걸어야했고, 무엇보다 인조과 함께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은 친명을 외치는 사대주의를 중요시하는 서인이었다.

 

 

청나라가 조선을 처들어왔다. 정묘호란이다. 이때 인조는 청나라와 형제국의 협약을 맺었다. 뿐만 아니라 왕자를 청으로 보냈어야했는데, 가짜 왕자를 만들어 청으로 보냈다. 그렇게 가짜 왕자를 두번이나 만들어 청나라로 보냈고, 청과 맺은 협약을 두루 깨버리며 청나라의 뒷통수를 쌔게 내려친다. 청나라는 다시한번 조선으로 처들어왔다.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다.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귀결되는 과정이다.

 

 

최명길은 1681년 숙종 때 뒤늦게 문충공 시호를 받았다. 100년 뒤 정조가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강화를 감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1653년 효종 4년에 완성된 『인조실록』에는 그가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며 동시에 ‘소인’이라고 기록돼있다.(『인조실록』) 한 사람을 두고 극명하게 갈린 평가다. 또 많은 사람은 그를 간신으로 기억하고 척화파 김상헌을 절개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조선 사람들이 잠자리를 편히 자고 자손을 보존할 수 있음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그에게 힘입은 자들이 그 사람을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박세당, 『서계집』) 누가 그를 간신으로 낙인찍었고, 왜 우리는 그를 간신으로 기억하는가. p 285

 

 

인조와 서인정권은 명나라를 숭상했다. 그런 명과 싸우는 청을 오랑캐라고 얕보았다. 그러다 청나라에게 두번이나 침략당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는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해하자는 주화파가 있었다. 주화파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실을 직시했다. 그렇기에 화해와 항복을 주장했다. 척화파는 죽는 한이 있어도 오랑캐와 화해는 있을수 없다며, 명나라의 원수인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외쳤다. 조선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던 말던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백성들의 목숨은 하등 의미가 없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대적하였고, 결국은 주화파의 뜻대로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한다. 가정이지만, 인조의 항복이 더 늦어졌다면 조선은 그 이름조차 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서 우리는 척화파를 절개의 상징으로 배웠다. 주화파는 간신배와 다름없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이후로도 조선의 권력을 잡은건 척화파의 후손들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척화파의 구심점은 다름아닌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이었다. 언제나 대명의리를 외치며, 내 편에겐 한없이 온화했으나, 남의 편에겐 ‘사문난적’이라고 매도했던 송시열이다. 

 

 

왠만한 조선 후기 사대부 묘소 앞 비석에는 ‘숭정기원후 ㅇㅇ년’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다. ‘숭정’은 1644년 망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연호다. 명 멸망과 함께 ‘숭정’ 또한 사라졌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기원후’라는 꼬리를 달고 부활했다. 망한 나라 연호를 계속 쓰겠다는 것이다. 또 비석에 적힌 글은 ‘조선’이 아니라 ‘유명조선’으로 시작한다. ‘유명조선’은 ‘황제국 명나라 제후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이를 주장한 사람은 노론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언제나 크고 짝은 글에 숭정 연호를 기록해 존주지의(천자국을 존숭한다는 뜻)을 나타냈는데, 사람들은 청나라 연호를 쓰는 사람을 더럽게 여겼다.(『숙종실록』)’ p 171~172

 

 

1644년 명이 멸망했다. 5년 뒤 인조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이 되었다. 북벌을 계획했던 효종이다. 북벌이 비현실적임이 드러나면서 새 논리가 탄생했다. 명나라는 사라지지 않았고 조선이 그 중화를 계승했다는 ‘조선 중화’ 이념이다. 명이 부활했으니 오랑캐와 싸울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조선은 명나라 연호 숭정을 쓰고, 비석에는 ‘명나라 제후국 조선(유명조선)’을 굳이 명시하게 되었다. p 176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국력을 실감했다. 오랑캐인 청나라를 이기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방식을 바꿨다. 바로 ‘정신승리’.

 

조선은 명나라를 계승한 제후국이니, 명나라와 다름없다. 고로 명나라가 다시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으니 청나라와 싸울 이유가 없다는 이론이다. 그렇게 조선의 왕과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신승리를 하며,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내기 시작했다.

 

 

그해(1704년) 11월 숙종은 후원 깊숙한 곳에 제단을 만들고 이름을 대보단이라고 정했다. 이름대 3월 9일 숙종은 대보단에서 임진왜란을 구원한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p 206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기 위한 제단은 창덕궁 후원 깊은 곳에 있다. 청나라에 들키면 안되기에, 그들끼리 모여서 몰래 제사를 지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은, 숙종이 이 제단을 만든 이유다. 숙종보다 먼저 송시열이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기 위한 제단을 만들었다. 현재 괴산에 있는 만동묘다. 이 사실을 안 숙종은 깜짝 놀랐다. 황제의 제사는 명의 제후국 왕인 조선의 왕만 지내야하는데, 일개 신하가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창덕궁에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단을 만든것이다. 다만 청나라에 걸리면 안되므로, 들키지 않게 아주 깊은 곳에 만들었을 뿐이다.

 

 

조선은 대외적으로 청나라에 조공을 하고, 청나라에서 왕 책봉을 받으면서,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명나라를 숭상하고,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모순적인 행동을,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지속해왔다.

 

정조는 “명나라 은총으로 명장이 된 이순신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정조실록』) 대보단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충신과 관리들을 모두 잡아다 처치하라고 명했다.(『정조실록』) 그리고 1796년 3월 3일 대보단 정례 춘계 제사 때 정약용과 주고 받은 시가 맨 앞에 나온 ‘우리 동방만 희생과 술의 제향을 드리는구나’였다. 세상은 그러하였다. 조선 정치 엘리트 집단을 집단 감염시켰던 시대는 정조를 넘어 실용주의자 정약용 그리고 그 이후까지 오래도록 퇴치되지 않았다. p 210

 

 

우리가 개혁군주라 칭하는 정조 역시 ‘대명숭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은, 명나라의 은총으로 명장이 된것이라 하였다. 실용적 학자였던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 역시 명나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게 바로 조선후기의 그림자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슴아프도록 쓰라린 경험이 ‘반복’되는 건, 처음 겪은 후에 징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을. 징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고, 잘못을 모르니 개선하지 못하고 방비하지 못해서, 쓰라린 경험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반복’되는 대다수의 원인은 징비하지 못한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이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위해선,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직시해야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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