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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의 수줍음

[도서] 꼭대기의 수줍음

유계영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기본적으로 책을 읽을 때 출판사를 유심이 보는 편이다. 우연히 읽었는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다른 책들도 한권, 두권 읽어보다가 어느새 내 책장의 한켠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반대로 정말 마음에 안드는 책이라면(특히 역사왜곡이 들어간) 그 출판사의 다른 책들에 눈길한번 주지않는다. 베스트셀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의미에서 민음사는 전자에 속한다. 민음사 책을 몇권 읽어보진 않았으나, 이런 책을 출판했다면 믿고볼수 있는 출판사라 생각했다. 다만, 민음사는 내가 즐겨있는 장르와는 조금 다른 문학쪽 출판사다보니, 민음사 책을 읽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을뿐^_T 그래도 민음사에서 나오는 에세이(또는 수필) 류는 내가 즐겨 읽는 장르 중 하나다보니, 이렇게 또 한번 민음사의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이 에세이의 저자는 시인 유계영 이라고 한다. 현대 시인이라고는 나태주 시인님밖에 모르는 나로써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뭐 어떠한가. 나는 시를 읽으려고 이 책을 읽은게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녹아든 에세이를 읽으려했던 거니까.

 

 

여러사람들 틈에 있을 수록 나는 납작해진다. 변기의 용도는 유일할 것 같지만 의외로 쓰임이 다양하지.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으로 혼자가 된 사람들이 변기 뚜껑 위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한다던데. 나는 가끔씩 변기에 앉아 우는 사람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시간이다. p 017

 

 

맞다. 우리집 화장실에 있는 변기는 그저 변기일 뿐이지만, 사회에 나가서, 회사 화장실에 있는 변기는 그저 변기가 아니게된다. 저자가 말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시간’이 바로 변기위에서 시작되니 말이다. 사회초년생들이 한번씩은 거쳐갔던 변기위의 그 시간이, 아주 당연하듯 나에게도 있었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서럽던지. 회사 화장실에 들어가서, 변기위에 앉아서 울었던 적이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어른처럼 보이던 회사 언니들이 서럽게 우는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저자가 그랬다. 되도록 소리내어 울음으로써, 누군가가 이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을 연민의 눈초리로 봐주었으면 한다고. 나역시도 그랬고, 회사언니들도 그랬듯이 그때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하는지, 내 우는 소리를 듣는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했던 그 마음. 물론 지금이야 눈물이 메말라서, 누가 뭐라그러면 기계적으로 웃으며 ‘네네~’ 하고 뒤돌아버리거나, 그건 내가 한게 아니라고 되받아치는게 아주 당연한 일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들은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생각하다가, 그래서 나는누굴까 생각하다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알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나 싶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한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라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나인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나는 내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아무것도 참을수가 없을까. 나를 가리려고 직접 골라 쓴 가면을 물끄러미 본다. 자기 자신의드라마를 위해 조금도 화를 참지 않는 낭만주의자가 겸연쩍은 얼굴로 거울을 보고 있다. p 018

 

 

책을 읽다보면, 그런생각을 자주 한다. ‘저자는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무슨 의도일까?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길 원하는걸까?’ 이런 류의 생각말이다. 어렸을땐 안그랬던 것 같은데, 역사책을 자주 읽게되면서(특히 역사왜곡하는 사람들의 책 포함해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점점 관심을 갖게되었달까? 문제는 굳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 없는 가벼운 글들이나, 힐링을 위해 읽는 에세이나 수필집을 읽을때도,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아! 이런 의도인걸까?’하는 나만의 답을 내리고는 하는데, 이 에세이는 도무지 모르겠다. 근데 막 의도는 모르겠는데, 묘하게 글의 흐름이 친숙하다. 뭐랄까. 생각에 꼬리를 물고 물어 흘러가는, 이른바 의식의 흐름..? 내가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하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 저자는 그 의식의 흐름을 말이 아닌 글로 옮긴 느낌이랄까. 아, 어쩐지 뭔가 친숙했어. 이런 글.....!!

 

 

처음에는 달리는 말을 보고 싶었던 거다. 거르나 이 땅에서 질주하는 자유를 누리는 말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경주마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지옥에서 쉴새없이 달려야 하는 말 또한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경주에서 꽃마차 끄는 말이 쓰러졌던 사실이 떠올랐다. 학대로 쓰러진 검은 말이 재작년에 죽었다. 죽은 말과 두 마리의 말들이 더 구조되었다. 구조 이후 다른 삶을 살게 된 말들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 또한 말들에게 고통이라면, 꽃마차가 사라진 거리라도 직접 보고 싶었다. 아무리 포개도 자양이 되지 않는 슬픔을 좀 덜기 위해서. p 034

 

 

뭐라고해야하나,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저자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무언가 눈에 딱 틀어왔을때, 그 무언가에 대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어질것 같은, 꼭 나와 같은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과거에 해미읍성에 놀러갔다가, 한켠에 주차(?)되어 있던 꽃마차가 있었다. 꽃마차. 꽃으로 장식된, 말이 이끄는 수레다. 한마디로 그 꽃마차 앞에는 끈으로 고정되어있던 살아있는 말 한마리가 있었다. 그 말의 눈을 들여다보았는데, 어찌나 슬퍼보이던지. 심지어 간신히 서 있는 듯한 모습의 말이 그렇게 불쌍해보일 수가 없었다. 더 슬픈건, 그 때 그곳은 비가 오고 있었다.

 

 

꽃마차와 말. 누군가의 눈에는 해미읍성을 방문한 관광객을 위해 비치된 일종의 관광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이 비를 맞고 있던 말던, 건강하던 말던 아랑곳하지않고, 오로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역할만을 시켰을 것이다. 간혹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나 처럼 말이 가엾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우리는 그 말을 구할 수 없고 구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말은 누군가의 사유재산일 것이고, 누군가의 사유재산에  관여한다는 것은 내가 그 사유재산을 다시 웃돈주고 사오거나, 아니면 그저 옆에서 말만하는 오지랖일테니.

 

 

결국 나는 해미읍성 한켠에, 꽃마차와 함께 묶여있던 그말을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딱 거기까지었다. 그 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인간의 욕심에 희생되는 가엾은 동물들이라는 생각만, 말만 한 또 다른 이기적인 인간이었을뿐이다. 

 

 

단지 앞에 회오리감자 푸드트럭이 와서 사 먹으러 갔다. 트럭 앞에 서 있던 여자가 강아지 호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이럴 때 좀 화가난다. 사람은 사람만 보려고 한다. 이 세상에 사람만 정당하게 존재하는 줄 안다. 눈 앞에 확보된 세계가 세계의 전부인 줄 안다. 동물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달라! p 050

 

 

에세이를 읽는 내내 저자는 동물에 우호적인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물론 저자의 말처럼 동물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하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해미읍성 한켠에 묶여서 오도가도 못하는 그 말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런데, 위의 저자의 에피소드를 무작정 편들수만은 없다.

 

 

푸드트럭앞에서 저자의 강아지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를 비판하는듯 써내린 저 글, 저 글은 오롯이 애견인의 입장만 생각하고 쓴게 아닐까? 누구나가 애견인들처럼 강아지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어렸을때 커다란 진돗개에 물린 경험이 있기에, 내 앞에 어린 강아지가 있다면, 일단 멀찌감찌 떨어진다. 저자의 강아지를 보고 놀란 그 여자는, 나처럼 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아닐지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어땠을까.

 

 

당장 내가 사는 단지를 보면, 세상에세상에 개반 사람반이다. 산책을 하러 나가면 정말 여기는 큰개, 저기는 작은 강아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다. 물론 그 개들을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이, 개티켓을 잘 지켜준다면 나도 할말은 없다. 그런데 왜때문에, 목줄(또는 몸줄)이 없이 개 혼자 저 앞에 걸어가고 개주인은 뒷짐지고 슬렁슬렁 걸어가는걸까. 자기 개가 화단에 큰일을 치루면, 그걸 처리하지않고 그냥 무시하고 가는걸까. 심지에 엘레베이터 안에서 개를 바닥에 두고, 사람을 보고 짓든 말든 신경쓰지않는 견주들을 보면 나는 이런사람들을 보면서 ‘개가 개를 키운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일반화를 하진 않는다. 개통령처럼 개와 사람이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가는지, 개에 진심인 사람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개통령의  바이블을 따라, 사람과 공존할 수 있게 개를 키우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물론 개의 입장에서 보면 수많은 통제로 인해 힘들겠으나, 사람과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으니.

 

 

하지만, 저자의 저 글은 묘하게... 저자의 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물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는 일반화를 하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강아지를 무서워해도, 내 뒤에 누군가의 강아지가 있다면 놀라지말고 꾹 참으라고 하는 듯한 뉘앙스. 내가 좀 과하게 생각한걸지도 모르지만, 그냥 좀 그렇게 느껴진다. 내가 개를 안키워서 그런가....^_T..

 

 

 

 

이 에세이는 나에게는 묘하게 친숙하면서, 묘하게 달랐다.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어떤 생각은 저자와 비슷했지만, 또 어떤 생각은 저자와 대척점에 있기도 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분명 저자는 시인이랬는데, 나와 닮으면서도 닮지않은 이 사람의 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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