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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

[도서]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

리모 김현길 글그림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우와, 이 얼마만의 여행에세이인가. 심지어 예전에 읽었던 『혼자, 천천히, 북유럽』(아래 리뷰!!)의 저자가 펴낸 두번째 에세이다. 시중에는 여행에세이도 워낙 많기에, 이 책을 그저 코웃음 치고 스쳐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진짜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 저자의 여행에세이는, 다른 여행에세이에서는 볼 수 없는, 단연 돋보이는 매력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하야 여행드로잉.

 


 

보통 여행에세이라면 저자들이 찍은 여행사진이 반 이상을 할애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그 흔한 사진 한장 없다. 대신, 사진보다 더 많은 여운을 담고 있는 수 많은 그림들이 담겨있다. 그렇다. 저자의 여행방법은 바로 그림이다. 언제 어디서든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는 것. 이게 바로 저자의 여행방법이고, 여행지를 마음속에 담는 방법이다.

 

 

앞서 읽었던 북유럽 여행에세이도 좋았지만, 이번 여행에세이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는 꼭 한번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솔직히 북유럽은 아직 안가본 사람이 더 많다. 심지어 요즘 같은 시국에 해외여행은 언간생심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다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씩은 가보았을 제주도다. 수학여행이든, 신혼여행이든, 우정여행이든, 가족여행이든, 그 어떤 이유로든 말이다. 심지어 2년째 이어지는 코로나 시국임에도,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이 허락되는 곳은 유일하게 제주도, 한 곳이다.

 

 

그런 제주도를 저자는 화폭에 담았다. 저자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방문했던 그 곳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사진으로보는것보다 더 선명하게. 그날의 기분까지도.

 

 

 


 

사실 북촌리는 제주 4.3사건의 상흔이 깊은 마을 중 하나다. 1948년 12월 16일 군경에 의해 24명의 주민이 희생된 것을 시작으로 이곳에서만 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마을 인구가 약 1,500명이었다고 하니, 마을 사람 셋 중 하나는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은 강요된 침묵 속에 가족을 잃은 슬픔마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다. p 047

 

 

제주 북촌은 나에게 제주 4.3의 잔혹성을 느끼게 했던 곳이다. 너븐숭이에서 시작해서 서우봉까지 이어지는 제주 4.3 학살의 흔적. 특히 너븐숭이에는 제주 4.3 당시에 덧없이 스러져간 어린 생명들의 애기무덤이 남아있다. 학살한 그들은 제주도민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고한다. 나는 그저 학살대가 ‘도민들을 잔혹하게 죽였구나’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했더랬다. 헌데, 북촌 너븐숭이에서 본 애기무덤을 보는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그저 ‘잔혹하게 학살했다’라고 쉽게 말하기엔, 너븐숭이에 있는 애기무덤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너븐숭이를 지나, 해안선을 따라가면 저자가 그린 북촌포구를 만난다. 북촌포구 왼쪽에는 서우봉이 있다. 제주 4.3당시 북촌 너븐숭이 일대와 바로 이곳 북촌포구 및 서우봉 모두 학살의 현장이었다. 특히 서우봉은 제주 4.3이 일어나기 훨씬 전,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해안동굴진지를 수십곳이나 파놓은 곳이기도 하다. 물론 동굴진지를 직접 만든사람들은 단연코 강제징용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파란물결 넘실대는 북촌포구, 하지만 해방 이전의 아픔과 해방 이후의 아픔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녕리는 섣불리 해안도로를 개발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마을안의 올레길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미로처럼 구불구불 뻗어 있는 골목길을 걷는 즐거움이 남달랐다. (……) 마을ㅇ의 길은 해안선을 따라 이어져 곧 김녕성세기해변에 닿았다. 터키석을 갈아 넣은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바다와 눈부신 하얀모래, 그리고 이것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짙은 갯바위의 조화가 가슴을 뛰게 했다. p 052 ~ 054

 

 

제주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지만, 그 중에도 한 곳을 꼽으라면 난 단연코 김녕 성세기 해변을 꼽을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에 처음 갔을 때, 우연하게 들렸던 성세기 해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우리가족은 그곳에서 수 많은 사진을 찍었다. 당시에는 한평(?)짜리 카페인 쪼끌락에서 김녕라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그로부터 몇년 뒤 신랑과 둘이서 다시찾은 김녕 성세기 해변은 부모님 모시고 갔을 때와는 조금 달라진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 큰 변화는 카페 쪼끌락이다. 대규모 카페가 되어있었다. 사장님이 돈을 많이 벌었나봐...!

 

 

 

제주도 바닷가 마을에서 여자는 곧 해녀였다. 가난에 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린 몸을 이끌고 거친바다로 나가야 했다. 가까이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멀리는 대마도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원정 물질을 나갔다. 1920년에 해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해녀 어업 조합’이 탄생되었지만, 일본인이었던 제주도사(현 제주도지사)가 조합장을 겸임하게 되며 오히려 수탈 기관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p 082

 

 

 

제주는 단연코 여자, 그러니까 해녀들이 많든 섬이다. 

 

 

생계를 책임지던 제주 남자들은 조선시대에 귤 진상과 전복 진상에 시달리다 섬을 떠나갔다. 남자는 떠나갔지만, 가족은 제주 섬안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제주 남자가 떠나가니, 남은 가족을 먹여살리는 사람은 제주 여자들이 되었다. 제주 여자들은 바다속에 들어가 물질을 하며 가족을 먹여살렸고, 제주를 먹여살렸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들어서도 여전했다. 제주는 해녀들이 먹여살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어떤 시대인가. 사람까지도 수탈되던 시대이다. 일본인들은 제주 해녀들도 핍박했고, 제주 해녀들이 물질해온 해산물도 수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당할 제주해녀들이 아니었다. 거친 물살과 함께 살아온 그들이다. 그들은 들고 일어났다. 1932년 최초로 제주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제주  하도리는 해녀들의 항일운동 역사가 숨쉬는 장소인 것이다.

 

 


 

 

아름다운 이곳도 현대사의 아픔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제주 4.3 당시 성산읍에는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의 특별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성산읍을 비롯하여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 억울하게 잡힌 주민들을 터진목 인근에서 총살했다. 비뚤어진 맹목적 이념은 이처럼 거대한 비극을 만들어냈다. p 104

 

성산일출봉, 터진목, 광치기해변으로 이어지는 해안길. 해안 드라이브코스로도 각광받는 곳이며, 관광지로도 핫한 장소다. 저 세곳을 다 가지는 못했더라도, 하다못해 성산일출봉만은 찍고 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유명한 장소이다. 하지만 이 장소들 모두 제주 4.3의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저자가 말했듯이 이 장소는 모두 학살의 장소였다. 

 

 

성산에서 터진목으로 가는 해안도로 옆, 인적이 드물고 수풀이 우거진 그 곳에는 ‘제주 4.3 양민 집단 학살터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그리고... 위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성산일출봉 헤안절벽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만든 해안진지가 지금도 남아있다. 성산일출봉 주차장 인근은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동백을 흔히 ‘토종 동백’이라 부르고 있지만, 정작 이 관목의 학명은 Camellia Japonica다. 한국에서 자생하는 식물에 일본의 국가명이 포기된 까닭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관목의 학명이 Camellia Japonica가 된 이유는 17세기에 일본을 방문했던 독일 태생의 식물학자 엥겔베르트 캠퍼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 서양인 최초로 일본에서 보았던 동백나무에 대한 묘사를 했다. 이것이 1753년에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칼폰 린네가 동백나무의 학명을 명명하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p 136

 

겨울에 제주를 갔다면 꼭 봐야할 것이 있으니, 바로 동백군락지다. 지금까지 화분으로나 봐온 동백과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 나 역시 위미리 동백군락지를 가서, 동백나무에 에워쌓여있자니 꼭 동화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동백의 영어명이 카멜리아라는건 알았는데, 그 뒤에 자포니카가 붙는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동백은 제주에 널리 분포되어있지만, 바다 건너 일본에도 동백이 있는데, 푸른눈의 서양 식물학자들이 17세기에(그러니까 1600년대) 일본에 있는 동백을 먼저 보았기 때문에 학명에 자포니카가 붙었던거란다. 서양 식물학자들이 일본에 가서 동백을 보았던 동시대에, 우리나라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조선은 서양인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었다. 아니, 배척했다고 해야하나. 그러니 서양 식물학자들이 조선에 와서 동백을 보고 싶었어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전시관은 1653년에 네들란드 상인 헨드릭 하멜이 일행들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할 당시 타고 온 스페르웨르라는 이름의 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하멜은 난파된 이후 15년이 지난 1668년에야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귀국 후 그가 쓴 <하멜표류기>는 한국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p 282

 

위 동백 이야기와 조금 연결되는 지점이다. 서양 식물학자가 일본에서 동백을 보았던 그 시기에, 제주도 그러니까 조선의 탐라에도 서양사람이 들어왔다. 그 유명한 하멜표류기의 ‘하멜’이다. 우리나라는 하멜이 유럽에 최초로 조선을 알렸다고 과시한다. 제주 용머리해안에 있는 저 하멜전시관에도 동일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해서 난 하멜전시관을 갔을 때, 실망하고 또 실망했다.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알렸다는 사실, 그거 하나 자랑하려고 저 큰 전시관을 만든 것인가? 정말 그뿐인가? 하멜표류기를 잘 따져본다면, 조선에서 하멜일행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본다면, 저거 하나 자랑하자고 저 큰 전시관을 세우는데 막대한 돈을 쓴 것이 그저 어리석어보일 뿐이다.

 

 

당시 하멜은 일본으로 가고 있었는데, 좌초되어 제주로 오게된 것이었다. 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조선은 거부했다. 조선땅에 들어온 외국인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이라도 조선에 들어오면 고향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외국인들. 그렇다면 조선은 외국인이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흡수해서, 나라를 발전시킬 생각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조선에서 서양인들은 그저 푸른 눈의 원숭이였을 뿐이었으니까. 심지어 하멜일행은 조선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다른 죄인들처럼 삼남지방 곳곳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약 13년간 하멜일행은 조선에서 온갖고초를 겪었고, 그 중 살아남은 일부가 겨우 빠져나와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하멜일행은, 일본 관리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다. 질문의 대부분은 조선의 국방, 식량, 문화재등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2백년뒤 일본이 조선에 처들어오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다.

 

 

나는 제주도 여행이 정말 좋다. 그저 관광지로써만 좋은게 아니다. 만약 관광지로써만 좋았다면 제주를 두번, 세번 찾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저자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제주 풍광이 너무 이뻐서, 그림그리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다지만, 그저 이쁘기만 했다면 저자가 이토록 제주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제주는 아름다운 풍광만큼, 그 속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에 저자도 나도 제주를 사랑하는게 아닐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제주로 떠나고픈 마음이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니. 내년에 날 좋은 날에 제주로 날라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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