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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역사산책 : 한국사편

[도서] 골목길 역사산책 : 한국사편

최석호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요즘 태교를 위해서 책을 읽을때 소리내어서 읽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론 눈으로 읽는 것 보다, 읽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소리내어 읽기 시작한 건, 일종의 태교의 일환이다보니 멈출 수도 없다. 다른 산모들은 뱃속의 아이에게 말도 잘 건네는데, 나는 아직 낯간지럽다고요T_T 우리  신랑조차도 맨날맨날 아가에게 인사하는데, 하 ㅋㅋㅋ 이러다간 내 새꾸가 아빠 목소리만 기억하고 내 목소리를 어색해할까봐, 마지막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소리내어 책 읽기였...다.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소리내어 책을 읽다보니, 글을 읽는것에 있어서 눈으로 보았을 때와는 다른 차이점을 느꼈다. 뭐, 기존에 눈으로만 읽었을 때도 가독성이 뛰어난 글들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확실히 소리내어 읽으니 달랐다. 가독성이 높다고 생각한 글 조차도, 소리내어 읽었을 때는 한 숨에 읽혀지지 않거나, 혀가 꼬이거나 막 그런 문장들이 있더라. 심지어 역사관련 책들은 워낙 어려운 단어들도 많다보니, 그런 경향이 더 심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이 책 『골목길 역사산책:한국사편』은 조금 달랐다. 소리내어 읽어도 문장이 딱딱 떨어지고, 간결한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꼭 박종인 기자님 글을 읽을 때랑 비슷한 느낌! 그러고보니 이 책 저자가 박종인 기자님과 공동집필했던 『골목길 근대사』를 읽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듯?

 

 

이 책 제목 『골목길 역사산책』만 봤을 땐, 그저 골목길이나 동네길 또는 한 건축물에 얽힌 역사이야기를 일종의 해설사처럼, 또는 역사를 주제로한 여행에세이처럼 가볍게 이야기해주는 줄 알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가 책 속에 고스란히 녹인 모든 골목길은 대체로 내가 다 답사를 해봤던 곳인지라, 더더욱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약간 뒤통수 맞은 느낌! 내가 생각한것과는 달리 이 책 속에 들어있는 역사이야기는 정말 깊이가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봤다가 큰 코 다친격이랄까? 심지어 나 역시 갔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는 내용까지 있었던지라(화순 운주사!!!) 이건 뭐 이 책 들고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데 여기서 그냥 뻘하게 궁금한 점 하나. 이 책의 순서다. 뭐랄까, 시간순서도 아니고, 시간역순도 아니고. 뭐지..? 물론 읽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낭 뻘하게 순서를 정한 이유가 궁금하다..ㅋㅋ

 

이 책의 목차

1. 서울 남촌 대한민국길(근현대)

2. 전남 화순 고려길

3. 강릉 조선길

4. 경주 신라길

 

 

 

 

남촌 대한민국길 산책

 

저자의 서울 남촌 역사 산책길을 들어다본다. 나 역시 이 길을 걸었었는데, 그때는 너무 오래전이었던 지라 이 책에서 알려주는 서울로 7017이라던가, 통감관저 기억의 터 등... 대부분 조성 전 이었다는게 함정이다^_T. 뭐 어쩌겠나. 애기 태어나면, 애기랑 다시 가면 되지!

 

 

1911년 4월 ‘희망을 양식 삼고 곤란을 초석 삼아 마침내 집을 짓겠다’면서 경학사를 조직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여 실력을 기르고자 한 것이다. 자주독립은 교육과 독립전쟁을 통해 달성된다. 나라 빼앗긴 망명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아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 5월에는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다. 신민회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新(신)과 망명지에서 흥왕하여 다시 일어나는 무장독립투쟁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興(흥)을 합친 이름이다. 이리하여 신민회에서 목적한 무관학교를 시작한다. p 033

 

신흥무관학교….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서 절대 빠질수 없는 바로 그곳이다. 안동에 있던 석주 이상룡 선생과 서울에 있던 이회영 6형제가 의기투합하여 만주에서 세운, 독립운동가를 키운 무관학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챕터의 주제는 서울 남촌이므로 석주 선생은 잠시 뒤로 빠지고, 서울살던 이회영 형제가 주인공이다. 

 

이회영 6형제는 서울에 있던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헐값에 팔아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이 먹이고 재우고 가르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무장투쟁을 했던 많은 독립운동가가 바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들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슬픈 사실은... 이회영 6형제의 결말이다. 우리는 근현대사를 배울 때 이회영, 이시영 6형제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거나, 이시영이 훗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다는 정도만 배운다. 이시영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형제가 어떻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가 항시 잊지않고 기억해야할,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준 분들인데 말이다.

 

(넷째)이회영은 동북항일의용군 창시자로 나선다. 11월 13일 대련에 내리는 순간 대련수상경찰서 형사들에게 붙들린다. 여순감옥에서 모진고문을 당한다. 11월 17일 고문사한다. 딸 이규숙이 시체실에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순국한 이회영을 확인한다. 일제는 이회영이 삼노끈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삼노끈이 어디서 낫는지 대지 못한다.

 

첫째 이건영은 형제들과 함께 1910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1926년 선산이 있는 경기도 장단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선산을 돌봤다. 1930년 78세 일기로 장단에서 숨을 거뒀다.

 

둘째  이석영은 가장 많은 돈을 독립전쟁 자금으로 지원했다. 80세 된 1934년 끼니를 이을 돈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

 

셋째 이철영은 경학사 사장과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 교장을 역임했다. 신흥무관학교 폐교  뒤 상해, 천진 등지를 떠돌다가 1925년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다섯째 이시영은 독립전쟁 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자 시민들과 함꼐 서울에 남아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부통령이 북한군 포로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한강 다리를 끊기 직전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 피난 중 이승만과 갈등을빚었다. 1951년 군 간부들이 군수물자를 횡령해 수만 국민방위군 청년들이 굶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났다. 5월 9일 이시영은 부통령을 사퇴한다. 1953년 4월 17일 부산 동래에서 숨졌다.

 

여섯째 이호영은 다물단원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밀정을 색출하고 일제 잔당을 처단했다. 일가족 모두 일제에 몰살당했다. p 039~040

 

이시영을 제외한 다섯형제는 해방 이전에 사망한다. 사망이유가 너무 처참하다. 넷째 이회영과, 여섯째 이호영은 일제에 죽임을 당한다. 첫째 이건영은 일제 감시 속에서 죽었다. 둘째 이석영과 셋째 이철영은 가난으로 인해 굶주려 죽고,풍토병에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섯째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형제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걸고 지켰던 한반도에서 이승만의 독재와 민간인 학살에 충격을 받고, 부통령에서 사퇴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이시영, 이회영 6형제의 결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적에만 관심을 둘뿐, 그들의 죽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체 왜? 왜 우리는 이들의 죽음은 왜 가르치지 않는걸까. 이들뿐만 아니다.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죽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홍범도 장군과 김경천 장군이 중앙아시아로 건너가서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여기까지 일뿐. 해서 이런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개개인이 독립운동사 관련한 책을 읽고 배울 수 밖에 없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빛나는 역사만 역사인걸까? 빛나는 역사를 이끌었던 주인공들의 아픈 역사는 왜 가려버리는걸까. 그 모든 것을 알아야만, 그 속에서 그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텐데.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교육에 새삼스레 아쉬울 따름이다.

 

안중근 의사 사후의 이야기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친일파들이 어떻게 이용했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다.

 

1963년 안중군의사숭모회를 만든다. 초대 이사장은 윤치영! 1938년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심기일전해서 친일매국한길로 달려간 인물이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원이 된다. 안중근의사숭모회는 1967년 안중군 의사 동상을 세우고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짓는다. 김경승이 만든 동상이다. 김경승은 1940년 <목동>으로 조선미술전람회특선에 오른다. 일제가 추진한 산미증산 계획을 주제로 한 것이다. 침략전쟁에 쓸 군량미다. p 062

 

해방이후 친일파들은 미군정 휘하에서, 이승만정권 아래서 반공을 외치는 애국투사로 변모했다. 살아있는 친일매국노였던 그들은 당시 살아있던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고 탄압했다. 이미 사망한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치적을 위해 이용했다. 안중근 의사도 친일매국노들이 이용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매우 늦은감이 없진않지만 2005년에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위원회를 새로 꾸리고, 기념관도 새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친일매국노 김경승이 만들었던 도산공원 안창호 동상, 국회 앞 이순신 장군 동상, 정읍 황토현전적지에 있던 옛 전봉준 장군 동상도 철거되었다.

 

1995년 국가안전기획부를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였을 때 서울시가 일괄 매입했다. 미군정과 정부수립 초기 수도경찰청, 이승만 정권에서 안하무인 권력을 휘두른 특무대, 박정희 장군쿠데타 직후 중장정보부. 그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보안사와 국가안전기획부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인주주의와 인권을 마음껏 짓밟았다. (……) 아시아 최초로 독재와 싸워 이긴다. 대한국인이 민주주의를 건설한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민을 고문하던 국가안전기획부를 남산에서 쫓아낸다. 지금은 소방방재센터, 시청별관, 문학의집, 서울유스호스텔, 교통방송 등으로 쓰이고 있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다. p 069 ~ 070

 

내가 남촌을 걸었을 때는 조성되지 않았던 그 공간, 일제의 약탈과 인권유린의 현장을 고스란히 조성한 그곳. 내가 이 곳을 걸었을 때는 끽해야 한양도성이나, 조선신궁 터(정확히는 삼순이계단) 정도였는데 말이다. 부끄러운 사실은 난 당시에 이 곳이 대한민국 시대, 군부독재의 인권유린 현장까지는 인지했어도, 일제강점기 통감관저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다시한번 반성T_T..

 

관훈동 민씨는 민영휘를 말한다. 본명은 민영준이다. 일본국 세자가 조선을 올 떄 환영위원장을 맡아서 환영 행사를 주관한다. 1910년 정우회 총재로서 한일합방 찬성운동을 벌인다. 이자의 집을 고스란히 보존한다. 남산골한옥마을이다. p 076

 

친일매국노 민영휘의 집, 또 다른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집 등이 모두 고스란히 보존되어 남산한옥마을에 있다. 헌데 남산 한옥마을에선 이 사실을 고지하고 있으려나? 서울 유명 관광지 북촌한옥마을은 친일파가 살았던 흔적을 싸그리 지웠는데 말이다. 친일매국의 흔적을 정부에서, 또는 지자체에서 나서서 지워주고 있으니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이렇게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거겠지.

 

예컨데 친일매국노 민영휘의 후손들이 남이섬을 운영하는 것처럼^^ 

 

남이섬이 친일매국노 민영휘 후손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굳이 남이섬을 가서 그들의 재산을 계속 불려주는 행동은 딱히 좋게 보이지 않는다. 뭐,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모르고 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남이섬 역시도 지자체에서 나서서 친일매국의 흔적은 지우고, 관광지로 홍보해주는데 뭐!

 

 

 

운주사 고려길 산책

 

역시나 꽤 오래전이었나, 아빠랑 둘이서 화순 운주사를 갔었다. 운주사는 내가 너무 가고 싶었던 곳이라, 아빠한테 매일 가자고가자고 노래를 불렀더랬다. 물론 집에서 가기엔 너~~무 먼 곳이라, 외가집이 있는 영광에 갈 때나 갈 수 있었던 장소였지만. 여튼! 그렇게 가고 싶던 운주사를 가게되었다.

 

보통 우리가 아는 사찰은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주로 부처의 가르침이나 불교 교리를 가지고 이름 짓는다. 운주사, 불교와 아무 관련 없는 이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에 운주사가 있다. 천년 된 불교사찰이 있는 동네 이름이 도암(道岩)이다. 불암(佛岩)이어야하는데? 맞닿은 마을도 도곡면이다. 불곡면이 아니네? 온통 도교다. p 093

 

고려시대에 도교가크게 일어난다. 도교에는 성수신앙 중 하나 태일신앙이 있다. 태일, 곧 북극성에 대한 믿음이다. 북극성은 하늘의 중심을 이루고 자연계와 인간계 현상의 모든 것을 주관한다. 성수 북극성의 신격, 즉 별자리 신은 태일이다. 태일은 하늘의 황제로서 매년 한  차례  구궁을 순행한다. 구궁이란, 9개의 방위에 세운 황실 도교사원을 말한다. p 094

 

운주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기존의 사찰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떠오른다.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석탑들과 석불이 즐비어 있는 모습도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저 불교 사찰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도교사원이라니, 하 ㅋㅋㅋㅋㅋㅋ 역시 어딜가든 뭘 보든 알고 봐야한다^_T...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운주사에 대한 내용은 천년고찰과 천불천탑, 도선국사 정도였..으니..까...하.....

 

고려와 조선에서 중국 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더 풍성해졌다. 강역이 중국보다 작았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태일전의 규모를 9개에서 5개로 줄여서 운영한다. 화순이 속한 능주 권역은 고려 황후  공예태후를 배출한 지역이다. 공예태후의 다섯 아들 중 세 아들이 황위에 오른 유력한 고장이다. 방위로도 한반도 남서쪽이 위치함으로서 태일 오궁중 간궁을 세우기 적합한 곳이다. 북극3성을 상징하는 좌불, 입불, 시위불과 북두7성을 상징하는 칠성바위 등을 운주사 서산에 배치한다. 애초에 운주사는 불교사원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p 095

 

고려와 도교? 솔직히 이렇다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학교에서 배울때도 그랬고, 나중에 한능검 공부할때도 그렇고, 대체적으로 고려의 종교에 대해선 불교를 위주로 배웠으니 말이다. 그래서 늦게나마 공부를 좀 해보니, 고려왕실에선 도교행사도 개최했고, 도교제단도 만들고, 심지어 개성 만월대에선 왕실에서 도교행사를 주최를 뒷받침하는 유물들까지 나오고. 세상에나!

 

그동안 학교에서든, 역사책에서든 ‘불교’ 또는 ‘유교’를 중심으로 가르쳤다. 그러니 나 역시 아주 당연히 운주사도 불교사찰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저 배운 것에 함몰되고 그게 전부라 생각해서, 나도 모르게 편협한 시각을 가져버린 내 자신을 반성한다T_T.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던, 도선국사와 운주사 창건설화, 운주사 와불 미륵신앙도 자연스레 의심할 수 밖에 없게된다.

 

문헌 속에 등장하는 도선과 운주사의 관계는 1743년에 중간된 《도선국사실록》이다. 그  이후 이런저런 서적들이 이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운주사 명칭도 변화를 겪는다. 운주사(雲住寺)는 ‘구름이 머무는 곳’을 뜻한다. 그런데 한때 운주사를 ‘운행하는 배(運舟 운주)’ 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도선 설화를 수용한 것이다. 도선은 배 모양을 한 한반도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동쪽은 태백산맥이 터를 잡고 있어 무겁고 서쪽은 명야지대라 가볍다. 서로 균형이 맞지 않아 나라가 순조롭게 운행할 수 없다. 그래서 배의 중심에 해당하는 운주사 일대에 천불천탑을 세워 군형을 맞추려 했다. p 106

 

(고려)의종 4년 1150년 의종 황제는 최유청에게 도선의 생애를 기록하라고 명한다. 개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문장으로 전하는 것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최유청은 난감했다. 도선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데다가 알려진 바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동리산 선문을 개창한 혜철비문에서 도선의 탄생설화를 짓는다. 어머니가 태몽을 꾸고 낳은 혜철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도선도 그렇다. 동리산 선문 법통을 이은 선승 도선은 이렇게 탄생했다. 옥룡사를 세운 경보비문을 이용하여 도선 전기를 엮는다. 경보는 김씨 성을 가지고 영암 구림마을에서 태어나 월유산 화엄사에 출가하여 공부하고 옥룡사에 입적한다. 도선도 그렇다. 태조 왕건의 탄생과 고려 창업을 하늘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만들고자 한 고려 황실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도선국사 현창운동을 벌인 것이다. p 107

 

아니나 다를까, 도선국사의 운주사 창건설화도.....하 ㅋㅋㅋ 네, 문헌속에 최초로 등장한 운주사의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집필한 1743년. 심지어 도선국사의 생애까지도. 아..... 그동안 가려져있던 역사들을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새발의 피였다. 

 

 

불교적 관점으로 봤을 땐 이상하게 보이던 운주사가, 도교적 관점으로 보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 운주사에 가서 원형 석탑을 보았을때, 심지어 석탑이 짝수층인걸 보았을때 ‘참 이상하다’ 싶기만 했는데. 처음부터 불교사찰이라고 배웠기에, 그 편견에 사로잡혀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나 자신이란. 휴.

 

동산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육층으로 보이는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이 탑을 칠층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육층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오주석은 칠층석탑이란다. 원래 있었던 한 층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칠층석탑이라는 주장이다. 상식적인 주장이다. 사찰에 육층석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칠층석탑이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탑을 보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념대로 말한다. 땅은 음이고 탑은 양이다. 짝수는 음이고 홀수는 양이다. 탑은 양이니 홀수여야 한다. 그래서 6층이나 7층은 있어도 6층은 없다. p 123

 

 

많은 사람이 석조불감 안 석상은 지권인을한 붓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양보해도 저  손 모양은 불교의수인이랄 수는 없다. 석조불감 안 두  석상의 손  모양이 서로 다르다. 앞쪽, 즉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상은 손을 자연스럽게늘어뜨린모습이고 반대쪽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상은 손을 공손히모으고 있다. p 129

 

은하수 하늘길 남쪽 하늘에 육층석탑을 세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불교적 관점에서 은하수 하늘길 원반육층석탑을보면 문제가 생긴다. 티베트 불교를 제외하면,짝수로 탑을 세우지 않는다. 한 층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으로밖에 달리 해석이 불가능하다. 머릿속에 도교가 없고, 불교만 있는 사람에게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 경우 탑신의 전반적인 비례가 어긋나야만 한다. 한 층이 없어졌으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흔적은 없다. 6층 그 자체로 완벽하고 아름답다. p 132

 

무엇보다 저자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하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 천문관측술, 고려 고분벽화, 고려 시대 왕실에서 세운 도교사원, 도교제사, 수많은 도교 유물, 고려시대 천문도 등 정말 수많은 유물들로 말이다.

 

자 그리고, 대망의 운주사 와불 미륵불이야기!

 

운주사는 역사 속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온 유적지다. 아주 오래전부터 영산강 물줄기가 운주사 앞까지 어어졌었기 때문에 왜구들의 침입에 시달렸다. 이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에 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상감청자 100여  편을 찾았다. 고려중기12세기경에 조성했을  것이다. 홍치 8년이라 새긴 기와도 찾았다. 즉 연산군  1년 1495년에 중수했다. 운주사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정유재란 때다. p 153

 

여기에 주민들까지 가세한다. 운주사에 있는 유물들을 가져다가 생활도구로 사용한다. 주민들에게 석탑과 석상은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미륵의 환생이 아니라 담과 디딤돌을 위한 석재다. 운주사 평지는 생계 수단이다. 그리고 몇몇 주민들은 석탑, 석상들 중 값나갈 만한 것들을 가져다 팔기도 한다. 1980년 석탑은 18기로 4기가  줄고 석상은 70구로 1구가 준다. 운주사 천불천탑을 미륵신앙과 연결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또한 엄청난 크기의 운주사 석탑과 석상이 무수하게 널려 있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민중  지향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정도 규모의 석상과 석탑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주민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강력한 권력집단이어야 한다. 따라서 운주사를 미륵신앙과 연결시킨 것은 문학적 상상일 뿐이다. p 155

 

정말 민중이 와불을 미륵불로 믿었다면, 민중들 스스로 이 절을 망가트리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 제일 와닿는다. 하. 나는 여태껏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었던 걸까.

 

물론 운주사를 도교사원으로 이야기하는 건 저자의 추측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이건 당연히 이거지!’라고 단정하는 게 얼마나 편협한 시각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훌륭한 길라잡이가 된다고 생각한다.

 

 

강릉 조선길 산책

율곡은 공안, 선상, 군정 등 폐정에 대한 개혁을 경장이라 했다. 중쇄기에 접어들어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깨질 위기에 처한 조선을 새롭게 고쳐서 백상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방책이다. 선조는 오랜 구법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율법은 구법이 아니라 악법이라 한다. 홍문관 부제학 미암 유희춘은 “이이가 상소한 바와 같이 공물, 선상, 군정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이 곤고함에서 벗어나 한 숨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아뢴다. p 184

 

율곡은 을사삭훈을 통해 왜곡된 정치를 바로잡고, 개혁을 통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동서분당을 조제보합함으로써 그 폐해를 막고, 변방을 튼튼히 지켜 오랑캐가 넘볼 수 없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무너지는 벽을 바로 세우고 깨지는 기와를 제대로 이어서 조선이라는 집을 반듯하게 하고자 했다. 퇴계나 선조는 율곡을 알았다. 많은 사람은 더불어 살았으면서도 율곡을 제대로 몰랐다. p 190

 

사림들이 대거 죽는 사화의 피바람과 함께 조선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선조 재위기는 붕당정치의 한복판에 있었다. 동인과 서인들은 서로 내가 맞네, 네가 틀리네 하는 상황이었다. 백성들이 힘들던 말던, 임진왜란이 코 앞으로 다가오던 말던 그들에겐 자신들의 논리만이 중요했다. 그런 상황 한가운데 율곡이 있었다.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의 국방을 생각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류성룡 조차도 율곡을 비판했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야, 류성룡은 율곡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율곡은 붕당을 뛰어넘어 망가져가는 조선을 바로잡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을 벌인다. 문성사를 짓고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율곡영정>을 설치한다. 김은호가 1965년에 그린 그림이다. 김은호는 1937년 애국금차회가 미나미 총독에게 전쟁헌금을 바치는 광경을 그렸다. 율국선생께서 살아계신다면 친일매국 화가에게 당신을 그리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에서 친일매국  조각가 김경승이 만든 안중근 동상을 철거한 것은 지난 2010년 10월 26일, 2013년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2015년 국회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 2021년 정읍시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등 김경승이 만든 동상 철거 및 교체가 줄을 잇고 있다. 이제 강릉치 차례다. 강릉시에서 친일매국노가 그린 영정을 제일 먼저 교체했으면 좋겠다. p 192

 

오롯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 있던 율곡을 대한민국 시대에 들어서 친일매국노들이 이용했다. 심지어 군사정권에서도 율곡을 이용했다. 심지어 친일매국노가 그린 율곡의 영정은 아직도 표준영정으로 자리잡고 있다.

 

강릉은 율곡이 태어난 곳이다. 율곡의 모친은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의 고향이 바로 강릉이었다. 우리는 신사임당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기묘명현 신명화에게 신사임당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똑똑한 딸이다. 18세기 노론 중진들에게 신사임당은 아들을 잘 가르쳐서 성공시킨 어머니다. 노론과 소론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배경으로 나온 주장이다. 20세기 권력에게 신사임당은 10만 양병을 주장하면서 상무 정신을 고취시킨 아들을 낳아서 잘 기른 현모양처였다. 유신 정국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내새운 새로운 해석이다. 그 중심에 초충도가 있었다. 신사임당을 신사임당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p 201

 

신사임당은 시대 변화에 따라, 그녀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하지만 그 시각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신사임당’ 본인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본명조차 알려져있지 않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임당은 그녀의 ‘당호’일뿐, 이름이 아니다. 그래도 신사임당의 삶은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신사임당과 같이 강릉에 근거를 두었던 허난설헌의 삶은 어땠나? 그녀는 초당 허엽의  딸이자, 당대 명문장가 허균의 누이였다. 허난설헌은 글을 참 잘썼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그녀의 행복도 끝난다. 그녀의 남편과 시댁은 조선에서, 그것도 한낱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와는 매우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그녀의 버팀목이었던 부친과 오빠, 자식들까지 줄줄이 잃고 그녀는 27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놀랍게도 허난설헌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허초희. 그녀의 동생인 허균이, 누이의 글을 엮어서 사방팔방, 외국에까지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조선 여성중 이름이 알려진 몇 안되는 사람 중 한명인 허초희. 하지만 그녀의 삶은 불행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삶, 결혼 후 그녀들의 삶과 죽음은 달랐지만, 결국 조선식 유교적 잣대에 좌우되어,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누이로 남아버렸다.

 

 

 

경주 신라길 산책

 

요즘 블로그에 경주 여행기를 쓰는 중이라서 그런지, 경주 신라길 챕터가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혹시나 여행기를 쓰면서 이 책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ㅋㅋㅋ

 

 

빅토리아 황금보검, 북방 초원을 가로지른 금관, 서역 너머 로만글라스 게다가 오직 신라에만 있는 높은 굽다리 줄무늬 유리잔, 인도 합금강철 기술등은 신라가 오랜 시간 참아내면서 쌓아온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마 유리와 페르시아 유리를 응용하여 신라 유리를 만든다. 중국에서 난리를 피해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에게 신라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게 한다. 왜에서 표주박을 허리에 메고 바다를 건너온 호공은 재상이 된다. 서역 사람이 원성왕 괘릉을 지킨다. 아랍 사람이 왕 앞에 나와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 p 248

 

유독 동시대 다른나라와는 달리, 이국적인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나라 신라. 그 덕분에 신라 관련 역사다큐도 엄청 봤더랬다. 뭐, 가야도 신라만큼은 아니지만 이국적인 유물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음. 이 챕터의 주인공은 신라니까!

 

신라 고분에서 저기 바다건너에서나 나올법한 로만글라스가 발견되고, 황금보검이 나온다. 북방 기마민족 문화에서나 볼법한 동복이나, 황금문화, 나뭇가지  모양(?)의 금관들이 나온다. 원성왕릉에 세워진 서역인 석상과 사산조 페르시아 서사시에 실려있는 ‘바실라’ 이야기. 우리의 다른 고대국가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신라의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유물들이다.

 

 

천마도를 그린 말다래 소재를 보면 쉽게 출처를 알 수 있다. 자작나무다. 신라에서는 대나무를 사용했다. 천마도 말다래  출처는 신라가 아닌 다른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천마도라면 날개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날개는 없다. 천마가 구름을 타고 가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아니다. 애초에 질주하는 백마였기 때문에 구름이 아니라 먼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백마 몸에 초승달 반점! 중국와 유럽 천마도에는 초승달 무늬가 없다. 초승달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 문양에 등장한다. p 264

 

천마도로 유명한 말다래에서도 북방 기마민족의 향기를 찾을 수 있다. 날개가 없다거나, 초승달반점도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눈여겨 볼 것은 천마도의 소재 자작나무다. 

 

알타이 산맥에 있는 쿠르간은 신라 고분보다  최대 1150년을 앞선 적석목곽분의 원조쯤 된다. 나무무덤방 위쪽에 돌무지가 있기 때문에 나무 무덤방이 썩으면 돌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함몰된다. 대릉원 고분은 무덤방 바로 위에 돌무지가 있었기 때문에 함몰될 때 무덤방 안으로 돌이 많이 들어온다. 파지리크 고분은 무덤방과 돌무지 사이에 봉토층이 있었기 때문에 함몰될 때 돌이 적게 들어왔다. 양자 모두 돌무지 무덤때문에 도굴꾼이 건드리지 못했다. p 267

 

알타이 산맥무덤방은 삼림지대, 즉 자작나무로 뒤덮인 언덕에 정착한 부족장이 사는 통나무집 ‘타이가 하우스’다.  (……) 신라사람들은 하얀 자작나무 껍질을 좋아했다. 타이가 하우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린 말다래, 자작나무로 만든관모. 모두 천마총에서 발굴한 것이다. 일본 사람들 시각으로 보면 신라는 하얀나무 나라다.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를 좋아하니 백목이라 불렀다. 일본말로 발음하면 신라와 백목 모두 ‘시라기’다. p 268

 

난 한일고대사에도 관심이 많다보니, 도래인 관련 일본원서도 곧잘 읽곤 한다. 그러다보니 일본에서 우리 고대국가들을 읽는 이름을 보면서, 대체 왜 그렇게 부르는건가 궁금할 때가 많았다. 고구려는 코쿠리, 백제는 쿠다라, 신라는 시라기, 가야는 가라. 고구려나 가야는 보자마다 대충 느낌을 알았다. 쿠다라는 곰나루 혹은 큰나라 에서 어원이 왔겠거니 했다. 하지만 시라기는 당최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일본이 왜 신라를 시라기로 부르는지에 대한 것을 언급하다니!!!

 

저자의 말대로 하얀나무(백목)을 일본어로 발음하면 시라기다. 하얀 자작나무 껍질을 좋아하던 신라인, 하얀나무, 시라기. 오 뭔가 그럴듯하다. 맞는 말인것 같기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진짜 맞는 것 같다. 일본이 신라를 부르는 이름에서 조차도, 북방 기마민족의 흔적이 나타난다는게 정말 신기하다면 신기하달까?

 

대릉원에서도 옴총 유명한  황남대총이다. 근데 이 황남대총의 유물들로 인해 사람들은 혼돈에 휩싸인다. 조금 더 큰 북분에서 금관이 나와서 피장자가 남자라 생각했는데, 같이 출토된 허리띠에 ‘부인대’라고 적혀있었다. 반대로 조금 작은 남분에서는 금동관과 유해 일부가 출토되었다. 남분의 유해를 확인해본 결과 남성이라고 특정되었다.

 

알타이  고산지대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북분에 아내를, 남분에 남편을 매장했다. 그래서 황남대총 북분에 장신구가 많다. 반대로 남분에는 무기가 많다. 그런데 북분이 남분보다 크다. 북분 왕비릉을 작게 만들고 남분  왕릉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 부장품도 북분이 훨씬 많고 값지다. 게다가 금관은 북분에서 나오고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온다. 왕비릉에서 금동관이 나오고 왕릉에서 금관이 나왔어야 한다. 왜 서로 뒤바뀌었을까? p 272

 

일단 황남대총이 왕릉급 고분, 심지어 쌍릉인건 확실한데, 남성의 유해는 남분에서 나왔다. 조금 더 큰 북분에선 남분보다 더 귀한 금관과 피장자가 ‘여성’이라고 칭한 금제 허리띠가 나왔다. 다름아닌 황남대총에서 혼돈의 카오스같은 상황이 일어난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다시 기마민족 문화를 근거로 가지고 왔다. 수많은 기마민족 향기가 짙은 유물들이 신라고분에서 넘처나게 출토되고 있으니(황남대총포함),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금동관과 남성의 유해가 나온 조금 작은 남분은 왕릉이고, 금관과 금제허리띠(부인대)가 나온 큰 북분은 왕비릉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정때문에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왕릉과 금동관에서 해법을 찾는다. 결과적으로 최대 왕릉을 만들어서 김씨 세습왕조 제2대 왕으로서 예를 갖췄다. 박씨나 석씨와 더불어 왕권을 돌려가질 필요가 없는 김씨 세습왕조를 이제 막 시작했다. 안착시키기 위해서 내부 싸움을 덮어야만 했다. 그러나 왕관이 아니라 금동관으로 격을  낮췄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당대를 죽였다. 힘든 왕위쟁탈전을 치른 만큼 앙금도 쉽사리 가라앉이 않았다. 게다가 왕비 아류부인의 아버지는 왕인데 실성마립간의 아버지는 제2관등 아찬이다. 같은 혈통  안에서도 차별은 존재한다. 왕비 아류부인은 왕관을 쓰고, 왕 실성마립간은 금동관을 쓴다. 이렇게 힘든 내력을 지닌 왕릉과 왕비릉이다. p 278

 

우선 현재 학계에서 황남대총의 피장자를 5세기 무렵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으로 추정한다. 여기서 다수설은 눌지왕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황남대총의 피장자를 실성왕으로 추정한다. 그 근거는 당대의 왕위 다툼 속에서 찾는다. 그 속에서 왕릉이 더 작고, 왕비릉이 더 커진이유가 들어있다.

 

(※우선 당시 신라의 왕 명칭은 마립간이지만, 통칭 왕으로 칭하겠다.)

당대 왕위 다툼의 역사는 이렇다. 내물왕은 사촌동생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내물왕이 죽자 고구려에서 돌아온 실성왕이 왕위에 오른다. 실성왕은 왕위에 위협이 되는 내물왕의 세 아들을 견제한다. 감시하기 위해서 내물왕의 장자 눌지를 자기 딸 아로와 결혼시킨다. 내물왕의 차남 미사흔은 왜에 볼모로 보내고, 내물왕의 삼남 복호는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과거 내물왕이 본인에게 그랬듯이. 이후 실성왕의 사위가 된 내물왕의 장자 눌지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인인 실성왕을 죽위고 왕위에 오른다. 왕이 된 눌지는 박제상을 보내 볼모로 잡혀있는 둘째와 셋째를 환국시킨다. 

 

여기까지가 당대 왕위 다툼의 역사다. 이후 눌지는 장인이면서, 자신의 원수나 다름없는 실성왕의 왕릉 조성을 위해 고심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왕릉이고 뭐고 때려치고 싶겠지만, 이 시기는 김씨 세습왕조를 견고하게 다져야 했던 시기이니 만큼 실성왕의 왕릉을 거대하게 조성해야만 했다. 해서 왕릉을 거대하게 조성하되, 사적인 마음 한 스푼 담아서 왕릉보다 왕비릉을 더 크게 조성한다. 물론 명분도 그럴듯 했다. 실성왕의 부친은 6두품 출신이지만, 실성왕비의 부친은 미추왕(초대 김씨왕^^)이었으니까! 그래서 왕비릉은 크게, 왕릉은 작게 라는게 저자의 추론이다.

 

 

근데 이게 또 빠져든다. 하하...하하. 원래 고대사라는게 남아있는 당대  기록이 없다보니, 발굴된 유물로 추론과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하는 학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일단 지금은 저자의 추측에 한표 던지는걸로...ㅋㅋㅋㅋㅋ

 

경주에서 유명한 최부자댁. 교촌마을엔 최부자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가 경주 최부자댁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라는 정도였다. 그 뒤의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다. 흡사 독립운동가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것 처럼.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 선생은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자본금 100마나 원을 출연해서 백산상회를 경영한다. 자본금 기준으로 당시 조선 10대 재벌이다. 백산상회는  자본금을 빨리 잃기 위해 세운회사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했다. 회사는 곧 망한다. 최준 선생은 기뻤다. p 303

 

최준선생은 광복을 맞자 전 재산을 털어서 대구대학교를 설립한다. 1947년 대구대학교 세우던 해에 경주 교동에 있는 최부잣집을 비롯해서 논과 선산 등도 모두 대구대학교에 내놨다. 1964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로 찾아 온다. “대구대학교를 한수 이남 최고 대학교로 만들겠다”고 한다. 최준은 아무런 대가 없이 대구대학교를 이병철에게 넘긴다. 이병철은 대구대학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한다. 1966년 한국비료는 ‘사카린 밀수 사건’을 일으킨다. 삼성이 갖고 있는 회사다. 곤경에 처한 삼성은 대구대학교를 박정희에게 헌납한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12월 청구대학교와 대구대학교를 합쳐서 영남대학교를 만든다. 최준 선생 모든 재산은 박정희에게 넘어갔다. p 304

 

독립운동을 열심히 지원한  최준 선생은 해방이후에는 교육을 위해 모든 재산을 털었다. 하지만 그 재산은 삼성을 세운 이병철에 입 바른 말을 하며 꽁으로 가져갔고, 이병철이 가져간 최준 선생의 재산은 다시 박정희에게 고스란히 상납되었다. 반면에 최준선생의 손자는 그 박정희 정권에서 빨갱이 취급을 받아,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다. 최준 선생의 모든 재산을 탈취한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때 ‘타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쓰는 일본군이었던 박정희는 그렇게 독립운동을 한 최부자집을 몰락시켰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월정교다. 월정교 복원 공사 시에도 가서 봤었고, 복원 된 후에도 가서 봤던 월정교다. 월정교 관련 포스팅을 할때 이게 정말 복원이 맞는건가 욕을 한참했던 그 월정교다.

 

고려 때 문신 김극기는 월정교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반월성 남쪽 토령 강에 무지개 모양 다리가  그림자를 거꾸로 문천에 비추었네. 용이 꿈틀거리며 은하수에 오르니 꼬리는 땅에 드리우고 무지개가 하수를 마시매 허리는 하늘에 걸치었네. ”

 

월정교를 무지개 모양 다리라고 한 것으로 봐서 월정교는 반월교 또는 홍예교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교각 위에 수평으로 다리를 만든 직선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p 308

 

그래도 꾸역꾸역  이해하려고 애썼다. 당대의 역사기록도 없고, 월정교의 원형을 추론할 수 있는 유물도 없으니 어쩔수 없었을거라고 이해하려 애썼다. 그런데 왠걸, 고려시대 한 문신이 월정교에 대한 글을 남겼다. 월정교는 무지개 모양 다리라고. 그니까 한마디로 홍예교라고. 적어도 지금같은 일자 모양의 교각은 아니었던 셈이다.

 

생각해보면 신라는 홍예, 아치형모양, 반달을 좋아했다. 반달은 점차 차올라 보름달이 된다. 그래서 신라는 점차 차오르는 나라였다. 신라의 도성 이름도 반월성이었고,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도 반달모양 홍예교다. 석굴암 본존불 입구도 반달모양 홍예교다. 물 위에 있는 홍예교가 달빛을 받아, 물에 비치면 원형이 된다. 가득찬 보름달이다. 

 

그런데 월정교를 홍예교로 만들지 않고 일직선 들보교로 복원했다. 월정교 주변 석재를 발굴했다. 다리 난간을 만들 떄 사용했던  홍예교에 해당하는 부재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 호남성에 있는 회룡교를  본떠서 들보교로 복원했다. 홍예교일 수도 있고 들보교 일 수도 있다. 사료는 별로 없고 유물은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월정교 복원은 우리 몫이 아니다. 서두르지말고 후손들에게 맡겨야 한다. p 309

 

하지만 우리 눈앞에 있는 월정교는 일자 모양의 교각이다. 나라에서 월정교 복원에 앞서 모델로 한 것이 중국에 있는 회룡교라고 한다. 아니 대체 왜? 왜때문에 갑분중국? 원형을 추론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본 뜬 것이 중국의 다리라니.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아, 이렇게 된거 이 책의 전작들도 한번 읽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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