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죽음이 공존하는 곳, 난민촌
보통 ‘난민촌’ 하면 난민들이 텐트 치고 살며 잘 먹지도 못하는 불쌍한 모습들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정말 난민촌에 그런 모습만 있을까요. 나는 제삼자로서가 아니라 난민의 한 사람이 되어 같은 입장에서 난민촌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취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난민촌 취재는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통역인 쉬르는 난민촌의 치안이나 카메라 배터리 충전 문제 등을 들며 반대했습니다. 또 여성의 얼굴을 외간 남자에게 보이면 안 되는 아프가니스탄 문화 때문에 남자인 쉬르와 함께 여자들을 인터뷰할 수 없다는 점도 문제였습니다. 이런 난제들이 발목을 잡았지만 나는 우선 부딪쳐 보자고 박박 우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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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우리는 쉬르의 고향 근처에 있는 다슈탁 난민촌에 가 보기로 했습니다. 쉬르와 경호원들은 난민촌 근처 민박집에 묵으면서 출퇴근하고, 배터리는 발전기를 들고 가서 민박집에서 충전하기로 했습니다. 여성을 인터뷰할 때는 마이크 줄을 길게 연결하여 텐트 밖에서 쉬르가 통역을 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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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륜구동 차가 심하게 요동치는 길을 대여섯 시간 달려 겨우 난민촌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외국 여자와 총 든 사람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김영미
난민촌 촌장인 무함마드 씨는 의외로 흔쾌히 취재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대신 다른 집은 안 되고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고 했습니다. 촌장의 가족은 촌장과 아내, 육순의 어머니, 일곱 살 된 아들, 로숀과 아리아라는 두 명의 여동생이 텐트 두 개에 나뉘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빵 한 조각과 홍차를 내주었습니다. 역시 수도인 카불에 사는 사람들보다 먹는 것이 더 열악했습니다. 나는 ‘촬영하다 죽어야지 굶어 죽으면 안 되잖아’ 하며 돌이 마구 씹히는 빵을 꾸역꾸역 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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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장과 할머니 인터뷰는 그럭저럭 할 수 있었지만, 다른 난민촌 여성들은 도무지 카메라에 찍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고발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카메라만 보면 도망 다녔습니다. 카메라를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성이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어려운 아프가니스탄에서 카메라에 찍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때였습니다. 촌장도 그들을 설득해 봤지만 씨도 안 먹히는 분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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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되던 날, 나는 가방 속에 있는 옷들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벼룩이 가방 안으로 들어갈까 봐 비닐로 꽁꽁 싸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촌장의 여동생 아리아가 보더니 내 부르카를 달라며 손짓을 했습니다.
부르카는 머리부터 발목까지 덮어쓰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의상입니다. 나는 카불에 오자마자 안전을 위해 하나 사서 가지고 다녔습니다. 부르카를 쓰면 사람들이 내가 외국인인 걸 알 수 없기 때문에 제법 편리하기도 합니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부르카를 쓰지 않고 밖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던 때였습니다. 특히 가난한 난민촌 아가씨에게 부르카는 자유롭게 바깥에 나갈 수 있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나는 바로 부르카를 아리아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부르카쯤이야….
ⓒ김영미
아리아는 부르카를 입어 보더니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촌장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자기 모습을 찍어 달라고 내게 손짓을 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아리아가 좋아하는 모습을 마구 촬영했습니다. 드디어 이곳 여성들을 촬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리아를 시작으로 다른 여자들도 서서히 카메라를 겁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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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난민촌 생활에 아예 적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습니다. 사람들이 취재 협조도 잘해 주었고, 밤에 남자들이 잠들고 나면 여자들끼리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습니다. 이대로 이들과 영원히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수많은 일에 치여 사는 것보다 순수한 난민촌 사람들과 빵을 구워 먹으며 정을 나누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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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냥 평화로울 줄 알았던 난민촌에서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취재를 시작한 지 2주가 지났을 때, 뒷집 텐트에 사는 새댁이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뒷집 쌍둥이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울어 댔습니다. 나는 ‘역시 갓난아이 소리는 우렁차야 해. 내일은 새댁네 찍으러 가야지’ 하며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쌍둥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태어난 지 채 이틀도 안 된 아기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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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네로 가 보니 눈이 유난히 큰 새댁은 넋이 나간 채 울지도 못하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서 남편은 어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막 언덕에 쌍둥이를 묻고 왔다고 했습니다.
ⓒ김영미
나는 새댁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면서 눈물이 뚝뚝 흘렀습니다. 얼떨결에 당한 횡사에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잡고 한 손에는 새댁의 손을 잡고 한참을 그렇게 그녀도 울고 나도 울었습니다. 그녀의 아픈 마음이 맞잡은 손을 타고 그대로 전해오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때 찍은 영상을 보면 이제 갓 스물이 된 새댁의 눈물이 방울방울 내 가슴에 묻어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