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 아기 엄마의 마지막 희망
2007년 가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미군이 실수로 교통사고를 내서 시민 여섯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그 사고를 취재하기 위해 희생자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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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중 한 명인 누르의 집 마당에 들어서자 나이 든 누르의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들은 스물다섯 살의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별로 여유 있어 보이지 않는 그 집의 유일한 수입원은 죽은 아들의 월급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결혼한 지 1년 반밖에 안 된 새신랑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인 아내와 태어난 지 석 달 된 딸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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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안고 나타난 그 집 며느리 샤하르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터뷰도 겨우 몇 마디 못하고 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아기 엄마가 진정할 때까지 아기를 얼러 주며 기다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터뷰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도 마음이 아파서 촬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윽고 아기 엄마가 진정되자 다시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제 나와 아기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도 그 사람도 미군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미군은 왜 아기 아빠를 죽였는지 모르겠어요.”
아프가니스탄과 미국 간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를 다 떠나서 한 가정이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촬영 내내 이 아기 엄마가 앞으로 어린 딸과 살아가야 할 가시밭길이 안타까웠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망인의 재혼을 금지합니다. 이제 그녀는 평생 이 가난한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야 하는 운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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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취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촬영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가 보니 낮에 취재한 아기 엄마였습니다. 그녀는 부르카 속에서 안고 있던 아기를 꺼냈습니다.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급하게 통역 쉬르를 불렀습니다. 쉬르의 말이, 이 아기 엄마가 나에게 아기를 맡기러 왔다는 거였습니다.
“나는 이제 남편도 없고 아기 키울 돈도 없어요. 아까 보니 우리 아기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고 당신은 저널리스트이니까 여자여도 돈을 벌잖아요? 그러니 우리 아기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서 배고프지 않게 잘 키워 주세요.”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말렸지만, 그녀는 아기와 보따리 하나를 내려놓고 무작정 나가 버렸습니다. 쉬르가 쫓아갔지만 그녀는 이미 골목을 돌아 사라진 뒤였습니다.
난감해하는 나를 보며 쉬르가 오늘 밤만 데리고 있다가 내일 아침에 그 집에 찾아가 돌려주자고 했습니다. 나도 아들을 키워 봤으니 하룻밤은 데리고 있을 수 있겠다 싶어 그러자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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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와 아기를 침대에 눕히고 보따리를 풀어 보니 다 해어진 아기 옷 몇 벌뿐, 우유병도 기저귀도 없었습니다. 아기 먹일 게 없네 하고 당황해하다, 취재 가방에 비상식량으로 넣고 다니는 전지분유가 생각났습니다.
나는 분유를 물에 타서 아기에게 먹여 보았습니다. 아기는 그 작은 입으로 잘도 받아먹었습니다. 내가 조금씩 떠 주는 우유를 먹으며 아기는 나를 빤히 바라봤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나를 보는 아기의 눈이 마치 “엄마!” 하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기는 파란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어머 이 아기가 진짜 내 딸이 되려나?’
순간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어차피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딸 하나 더 있으면 좋지 않겠어? 이렇게 예쁜 아기가 내 딸이 되면 좋잖아?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취재 일정을 정리하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나는 아기와 놀았습니다.
아들 키운 이후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행복이었습니다. 아기는 울지도 않고 순했습니다. 목욕을 시킨 후 자장가를 불러 주니 금방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기를 한국으로 데려 가려면 여권이 필요한데, 한국 대사관에서 입양을 했다고 하고 여권을 만들 수 있을까? 우리 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아프가니스탄 아기를 데리고 나타나면 우리 엄마 기절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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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밤새 뒤척이다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민박집 주인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기 엄마가 다시 왔다는 거였습니다.
“아기를 돌려 달라고 왔어요.”
나는 황당했습니다. 나는 밤새 아기랑 장밋빛 꿈을 꾸었는데 겨우 하룻밤 만에 데리러 올 것을 왜 그 난리를 만들었느냔 말입니다.
“도저히 우리 아기를 보낼 수가 없었어요. 밤새 잠도 못 자고 울다가 이렇게 다시 왔습니다. 남편도 없는데 아기까지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아기 엄마는 울고불고 난리였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방에서 아기와 보따리를 챙겨 아기 엄마에게 갔습니다. 그녀는 얼른 아기를 받아들고 허둥지둥 대문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서둘러 나가려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아기 이름이라도 알려 주고 가요.”
“아기 이름은 막답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황급히 나가 버렸습니다. 막답…. 나는 아기 이름을 계속 되뇌며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김영미
카불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들.
아프가니스탄은 이제 이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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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만 나의 딸이었던 막답. 겨우 하룻밤이었지만 나는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하룻밤이 나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세상 어디든 엄마가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프가니스탄 같은 전쟁 지역이라도.
나는 아프가니스탄에 취재 갈 때마다 막답을 만나고 옵니다. 딸이 없는 나에게 막답은 진짜 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막답네는 여전히 먹고살기 힘듭니다. 아기 엄마는 내가 예상한 대로 눈칫밥을 먹으며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커가는 막답을 보며 힘을 낸다고 합니다. 역시 아프가니스탄이건 한국이건 엄마는 강한 존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