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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도서] 다가오는 말들

은유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중학교 때 반 아이 중에 말을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답변할 때 꽤 논리적이었는데, 보통은 잘게 나눠 얘기해서 더 그럴듯해 보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계절 중에 겨울이 좋은 이유가 뭐지?" 하고 물으면, "저는 겨울이 좋은 이유가 세 가지 있어요."라고 한 뒤, 첫째, 둘째, 셋째 이런 식으로 이어붙였다. 그 친구처럼 말해보려고 답변을 미리 외워 흉내 내보기도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말을 잘 할 확률이 높긴 하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말과 글 모두 생각을 재료로 하지만, 말은 퇴고와 지연을 허락하지 않는다. 발화 중에도 다음에 내보낼 이야기를 구성해야 하고, 여러 단어 중에 잘 맞는 단어를 골라야 하며, 청중과 분위기에 맞춰 어조와 톤을 조절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두를 순간적으로 지연 없이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대개 이런 과정을 의식하지 않으니,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능력임에 분명하다.

 

글은 좀 다르다. 행동경제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시스템이론을 대입해 보자면, 말은 '자동시스템'이고 글은 '숙고시스템'에 가깝다. 말은 날아오는 공을 피하거나 1+1을 계산할 때처럼 직관적이지만, 글은 생각하고 따져보고 계산해야 하는 숙고 과정이 필요하다. 34x289를 계산할 때처럼 말이다. 오랜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 말이 글과 차이 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말을 그대로 옮겨 적어 한 편의 멋진 글이 되고, 시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말은 부러움의 대상이고, 글은 존경의 대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키 크고 잘생긴 타고난 외모는 샘이 날지언정 마음 깊이 경모하게 되지는 않는다. 문학에는 천재가 없다는 말이 있듯,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타인의 삶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된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한 인간의 개별적인 사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잘 쓴 글에는 '인격의 최상의 측면이 발휘'되기도 하지만, 글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잡아주기도 한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한 최상의 것을 쓰려 하고, 또 글이 나를 이끌어 더 좋은 삶을 살도록 독려한다. 짧은 몇 줄의 글을 쓰는 것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보면 글쓰기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생각하지만, 쉽게 써지지 않으니 지적 욕심을 자극해서 평생 해도 질리지 않는 취미로도 삼을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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