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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도서]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백수린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 한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슈퍼에서 파는 플라스틱 통 안의 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병에 든 ‘그’ 꿀, 사실은 그렇게까지 맛이 크게 차이 나지도 않는, 아주 미세한 감각의 차이로만 구별될 뿐인 그런 꿀에 매혹되는 인간일까 하는 생각에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어째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죄다 하찮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쓸모없는 것들뿐인 걸까. 하지만 이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의 감각들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결국은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므로. 】 (p. 59)

 

【 내 마음은 언제나, 사람들이 여러가지 면과 선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고 매일매일 흔들린다는 걸 아는 사람들 쪽으로 흐른다. 나는 우리가 어딘가로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궤적은 일정한 보폭으로 이루어진 단호한 행진의 걸음이 아니라 앞으로 갔다 멈추고 심지어 때로는 뒤로 가기도 하는 춤의 스텝을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고. 】 (p. 72)

 

【 페이지가 줄어드는 걸 아까워하며 넘기는 새 책의 낱장처럼, 날마다 달라지는 창밖의 풍경을 아껴 읽는다. 해의 각도와 그림자의 색깔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숲의 초록빛이 조금씩 번져나가는 걸 호사스럽게 누리는 날들. 】 (p. 78)

 

【 봉봉은 차갑고 이기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한 내 안에도 사랑이 이렇게나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존재다. 봉봉이 먹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목숨을 잃을까봐 먹지 못하게 막거나 고통스러워 하는데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야만 할 때, 자유의지를 주었다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고 누구보다 사랑한다면서 때때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시련을 주는 신의 뜻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 102)

 

【 상대의 슬픔에 공감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쁨과 달리 슬픔은 개별적이고 섬세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겪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건 슬픔에 잠긴 사람의 마음이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쉽게 긁히는 얇은 동판을 닮아서다. 슬픔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끝내 포개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없이 예민해지고, 슬픔이 단 한사람씩만 통과할 수 있는 좁고 긴 터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슬픔에서 빠져나온 이후엔 그 사실을 잊은 채 자신이 겪은 슬픔의 경험을 참조하여 타인의 슬픔을 재단하고, 슬픔 간의 경중을 따지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크기로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쉽게 말한다. 】 (p. 132)

 

【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행복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행복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밤 찾아오는 도둑눈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사라지는 찰나적인 감각이란 걸 아는 나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스무살이었던 나의 빈곤한 상상 속 마흔과는 다르지만 나의 40대가 즐겁고 신나는 모험으로 가득하리란 걸 나는 예감할 수 있었다. 어린 날들에 소망했듯 나 자신을 날마다 사랑하고 있진 않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앞으로 살아가며 채울 새하얀 페이지들에는 내 바깥의 더 많은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적어나갈 테다. 】 (p. 225)

 

저자의 문체가 좋았다. 조곤조곤 잔잔하고 편안하게 들리는 그 느낌이 좋았다. 적당히 쓸쓸함이 베여 있는 따뜻함, 편안함이랄까. 그녀의 글에선 그런 느낌이 묻어났는데 그것이 매력 있게 다가왔다. 작가는 예민하고 섬세하게 주변을 바라보고 느끼며 그것을 글로 옮겨 적었다. 빈 화분에 저절로 자라고 있는 달맞이꽃, 곡물을 담아 놓은 재활용 유리병 등 일상에 흔히 보이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사물들도 작가의 시선을 거치면 감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니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내리쬐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적당하게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오래된 골목길 어딘가를 산책하는 기분도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작가와 그녀의 반려견 ‘봉봉’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그녀의 다정함은 강아지 봉봉에게서 온 것이라는 이야기와 강아지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모습에 감사함을 느끼는 부분에서 깊은 공감을 느꼈다. 강아지를 키우며 그에게서 사랑을 배웠다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아이를 키우며 더 다정해지고 진짜 사랑을 배운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지극히 자기애만이 충만하던 나는 나의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진짜 사랑을 배워갔다. 그 덕분에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두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작고 여린 것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나를 신뢰하고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런 경험이 주어진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 나는 사랑을 배운 대상은 다르지만 내 마음과 너무도 닮은 글을 보며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지금의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했기에, 가을날과 잘 어울리는 에세이집을 찾는 이에게 백수린 작가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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