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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지만 할로윈 이후 11월과 12월은 정말 눈깜짝 사이에 가버린다. 정신 안 차리면 눈 떠보면 새해가 되어 있을 정도. 땡스기빙 데이인가 싶으면 내 생일이고, 생일 축하 받으며 몇몇 사람 만나다 보면 곧 크리스마스에 연말연시다. 사람들 몇 번 만나 식사하고 선물 몇 번 주고 받다보면, 언제 생일이었고 언제 크리스마스였나 싶게 새해가 되어 있는 거다. 뭔가 억울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요즘 애들 말로 표현하면 '순삭'이라고 할 만큼 시간이 빨리 간다. (혹시라도 용어를 잘못 쓸까 싶어서 인터넷에 '순삭'을 검색하니 순삭은 旬朔, 즉 초열흘과 초하루란다. '순삭'이라고 했을 때 초열흘고 초하루로 이해한다면 그야말로 옛날 사람인 셈이다. ^^;)

 

암튼, 그 바쁜 와중에도 생일 즈음엔 올 한 해도 수고한 나를 위한 선물(그러니깐 일종의 생일선물)로 책을 잔뜩 하곤 하는데, 오늘도 책들을 몇 권 구입했다. 생일이 12월이면 좋은 점 중 하나다. 내 자신에게 선물을 할 명목이 많아진다는 것. 일년을 마무리하면서 한 해 동안 수고한 나한테 맘껏 선물을 해줄 수 있다는 거.

 

정확히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구입하는 책의 20~30% 11 12월에 구입하는 책일 거다. 거기에 결혼기념이 있는 5월에 구입하는 책까지 합치면 1년 구입한 책의 50% 정도가 될 듯하니, ‘명목이라는 게 매우 중요한데, 개인적으로는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을 기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여행이랑 책 구입이 아닐까 싶다. 여행 가서 구입한 책이라면 제일 좋구.

 

각설하고, 오프라인 서점의 좋은 점은 예상하지 않은 책들, 의도하지 않은 책들을 발견하고 구입할 수 있다는 거다.

 

온라인 서점에서도 큐레이션을 해서 내가 좋아할 만한 책들을 추천해주고는 하지만, 그건 내가 구입한 책이나 검색한 책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상상 이상 혹은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기는 어려운데, 오프라인 서점을 여기 저기 다니다보면 '뜻밖의 보물'이라고 여겨질 만한, 아주 아주 썩 괜찮은, 입이 귀에 걸리는, 세상에 이런 책도 있었구나 싶은, 책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살면서 그만큼 좋은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기쁜 일이 별로 없기 마련이므로, 이런 작지만 큰 기쁨은 삶에 매우 큰 의미가 된다.

 

지난 주말에 이어 오늘도 그런 식으로 구입한 책이 있는데 아래의 두 권이다.

 

William Faulkner: Novels 1926-1929 (Soldiers' Pay, Mosquitoes, Flags in the Dust, The Sound and the Fury)

 

 

 

 

 

 

 

윌리엄 포크너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문화가 일천한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귀한 작가임에 분명하다. 대체로 미국인들에게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꽤 많은 사람들이 포크너라고 대답할 만큼. 그런데 그런 걸 다 떠나서 나는 그냥 포크너가 좋다. 어쩐지 12월이 되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읽고 싶어질 만큼. 이 책에는 1926~1929년 사이에 창작한 네 편의 작품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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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Scott Fitzgerald: Novels and Stories 1920-1922 (This Side of Paradise, Flappers and Philosophers, The Beautiful and Damned, Tales of the Jazz Age)

 

 

 

 

F. 피츠제럴드는 오해를 많이 받고 저평가된 작가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데, 흔히 돈을 목적으로 잡지에 실었다는 소설들도 개인적으로는 꽤 좋아한다. 어디에 실었냐보다 중요한 건 누가 쓴 거냐고 생각하니깐. 이 작가만큼 스타일리쉬하면서도 자기 세대에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던 작가가 있을까? 사람들은 <위대한 개츠비>만 아는데 사실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과 장편들의 거의 모두가 다 괜찮다. 여기 수록한 네 편을 포함해서 말이다.

 

Duane Michals: Portraits (by Duane Michals)

 

11월에 듀안 마이클의 사진전을 갔다가 너무 반해서 12월에 한 번 더 갔다가 이 사진집을 구입했다. 사진작가로서의 그를 평가하는 것도 유의미하겠지만, 그가 사진을 담았던 사람들 중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데 듀안의 사진 속에 있는 그 인물들이 너무 역동적이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워서, 이 사진집은 꼭 사야겠다 생각했다. 뭔가 살면서 지치고 피폐해진다고 생각할 때 이 사진집 속의 틸다 스윈턴이나 매릴 스트립의 사진을 보면, ‘여성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회복할 수 있는 기분이랄까. 생명력으로 가득 찬, 다시 말하자면 누군가의 가장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들로 가득 차 있는 사진집이다.

 

 

The Art of Reading: An Illustrated History of Books in Paint (by Jamie Camplin and Maria Ranauro)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고질병일 수도 있는데, 책도 좋아하고 그림도 좋아하다 보면 책 읽는 사람을 그린 그림이라던가 책이 놓여 있는 정물화 등을 특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건 게티 미술관에서 출판한 책인데, 나같은 사람에게 적격인 그런 책이다. 정물로서 책이 들어간 그림들과 책을 읽는 사람을 그린 그림을 거의 총망라했다. 그런데 왜 예술가들은 책을 사랑할까? 왜 책을 그린 걸까? 이 책을 읽다보면 그 질문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겠지.

 

Rubens: El Triunfo De La Eucaristia

 

게티 미술관에서 열렸던 루벤스 기획전의 도록인데, 스페인어로 되어 있어서 희귀하다. 실제로 아마존 같은 데선 1000불에 팔리기도 한다. 재산 축적이 목적은 아니지만, 희귀한 도록들을 소장하고 있는 기쁨이 있다. 설사 스페인어를 모른다고 해도 루벤스의 작품을 보고 감상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고 말이다.

 

Olio (by Tyehimba Jess)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 더위를 피해 갔던 샌프란시스코의 <시티라이츠 북스토어>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시집이다. 그 뒤로 도서관에서 빌려 꽤 오랫동안 읽었는데 반납하면서 소장을 위해 구입했다. 한국에선 거의 안 알려진 시인인데,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랄까, 탐구 같은 것들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시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도 모험적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그런 건 물성이 있는 책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시집은 반드시 소장을 해야만 했다. 어떤 시들은 온라인에 그러니깐 블로그든 인스타그램에 고스란히 옮길 수 있지만 복제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시들이 있다. ‘건축미라고 해야 할까. 그 시를 표현하고 있는 양식까지를 포함해야 그 시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들. 그런 시들이 많이 담겨 있는 시집이다. 흑인 시인, 그 중에서도 젊은 흑인 시인이 쓴 시는 거의 처음 접해본 셈인데, 이들이 무슨 생각과 고민을 하면서 사는지, 이들이 갖은 정체성은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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