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달빛처럼
보내준 피터팬 엽서 덕분에 오랫동안 끊겼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어요. 자기 전에 남편과 동화책 읽기. 남편은 어릴 적에 동화책을 읽지 못했대요. 그래서 어느 해인가 남편 생일에 네버랜드 클래식 한 질을 선물하곤 자기 전에 한 권씩 읽기 시작했어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도 다 읽고 <하이디>도 읽으면서 남편의 결핍된 '동심'을 채우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여기로 이사와 저녁에 운동을 하게 되면서 자기 전에 할 일이 많아져서 어느 순간부터 동화책을 못 읽게 되었었어요.
그런데 덕분에 그 일을 재개하게 된 거죠. 물론 매일 자기 전에 30여분의 시간을 가지려면 엄청 부지런을 떨어야 하지만 그걸 충분히 감수하고 감내할 만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예요. 1월에 <피터 팬>을 다 읽고 2월엔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고 있어요. 이 책은 40챕터 쯤 되고 2월은 다른 달보다 짧아서 아마 3월 초순까지는 읽어야 할 것 같지만,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 권씩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덕분입니다. 고마워요.
피터 팬이 그려진 엽서를 보자마자 웃음부터 나왔던 건 <피터팬>와 관련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았기 때문이예요. 내 또래라면 비슷한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텐데, 윤복희 선생과 추송웅 선생이 각각 피터와 후크를 맡았던 뮤지컬 <피터 팬>이 그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정말 대단한 볼거리였어요. ‘꿈과 환상과 모험의 이야기’가 눈 앞에서 구현된 거니깐요. 하늘을 나는 피터 팬과 무시무시하지만 어쩐지 매력적인 후크 선장. 그때는 지금처럼 문화 콘텐츠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이라 더더욱 훌륭한 볼거리였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걸테구요.
그리고 웬디가 입은 원피스 잠옷.
내 기억 속에는 동생도 나도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어요. 언젠가 오랜만에 앨범을 보다가 엄마한테 여쭈어보았죠. 연년생인 동생은 남자인데 왜 원피스 잠옷을 입었던 거냐구요. 내가 다섯 살 때인가 이모가 저를 주려고 원피스를 몇 벌 사왔대요. 레이스 달린 원피스들 사이엔 원피스 잠옷도 두 벌 있었는데, 워낙에 좋은 건 무조건 자기가 가져야 하는 남동생이 사흘 밤낮을 울었대요. 왜 누나만 예쁜 걸 입냐고 자기도 입겠다고. 그래서 그 시절에 우리는 쌍둥이처럼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던 거죠. 그런데 그 당시엔 그걸 하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피터 팬>때문이었죠. 웬디도 남동생이 두 명 있는데, 셋 다 모두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자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그런 옷을 입는가보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나는 내가 정말 웬디가 된 것 같기도 했구요. 자기 전에 나는 밤마다 웬디가 되는 상상을 했던 것 같요. 동생이랑 피터팬이랑 같이 네버랜드로 날아가는 상상!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
그런데 이번에 읽은 오리지널 <피터 팬>은 우리가 익히 아는 디즈니 판본과는 조금 다르더라구요. 피터 팬은 생각보다 어두운 인물인데, 그건 작가인 J. M 배리의 불우한 유년시절이 반영된 결과래요. 십 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난 배리는 유년 시절에 형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데, 아들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엄마를 위로하려고 오랫동안 죽은 형의 옷을 입고 형을 흉내내며 살았다고 해요. 형이 죽던 해에 150cm 가 약간 못 미쳤던 키는 그 이후로 영영 자라지 않았다고 하구요. 따지고 보면 ‘영원히 아이로 남아 있는 피터 팬’은, 열두 살에 죽어서 영원히 소년으로 남은 형과, 그로 인해 성장이 멈춘 자기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죠. 배리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결혼생활도 원만하지 못 했고, 아이도 낳지 못했다고 해요.
<피터 팬>에서 피터 팬은 종종 악몽에 시달려 울음을 터뜨리는데,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어쩐지 더 짠해지더구요. 뿐만 아니라 네버랜드엔 사람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인디언들과 사람을 죽이는 험악한 해적들이 살고 있죠. 이 사람들 모두 생각해 보면 참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예요. 그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피터 팬>은 상당히 매력적이었어요. 웬디의 부모의 캐릭터, 특히 아버지의 캐릭터가 시시때때로 웃음을 자아내고, 유모 역할을 하는 개도 재밌어요. 네버랜드에서의 생활도 흥미롭고요.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처음으로 웃을 때 그 웃음이 수천 명의 요정으로 변한다는 상상력도 너무 아름다웠어요.
네버랜드에서 집을 잃은 소년들의 엄마가 되어주는 상냥한 웬디나 피터 팬을 짝사랑하는 요정 팅커 벨(팅커 벨이 얼만큼 피터 팬을 사랑하냐면 후크 선장이 피터를 죽이려고 몰래 탄 독약을 피터가 마시려고 하자, 피터를 살리기 위해 그 약을 먹고 대신 죽을 정도예요. 죽음도 불사한 사랑이죠), 악당 중의 악당이지만 음악을 사랑하고 꽃을 좋아하며 품격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제임스 후크 선장도 피터 팬만큼이나 매력적인 인물들이예요.
피터 팬을 대장으로 삼아 네버랜드의 땅속 집에 함께 사는 ‘집 잃은 소년들’의 이름도 하나 하나 불러보고 싶네요. 투틀즈, 닙스, 슬라이틀리, 컬리, 쌍둥이 형제.
피터 팬이 추장의 딸 타이거 길리를 구해주 뒤로는 인디언들도 피터 팬 일행을 도와 해적들과 맞서 싸운답니다. (아, 쓰다 보니 또 한 번 읽고 싶어져요. <피터 팬> 속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리워져서 말이죠.)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밤마다 읽으면서 참 행복했답니다. 어릴 때처럼 책의 내용을 꿈으로 꾸기도 했죠.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릴 때처럼 내가 늘 웬디는 아니였다는 거예요. 팅커도 됐다가 피터도 됐다가 후크도 됐다가, 어떤 날은 이 작품을 쓴 제임스 매튜 배리가 되기도 했지요.
이 책엔 오리지널 삽화가 수록되어 있어요. (선물로 보여주고 싶어서 맘에 든 그림 몇 점을 사이사이에 실었어요. 마음에 드나요?) 메이블 루시 애트웰이 그린 그림은 우리에게 익숙한 디즈니의 그림체와는 꽤나 다르지만, 훨씬 사랑스럽답니다. 아마 그 그림들 덕분에 이야기 속에 좀더 푹 빠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특히 ‘피터’는 머리 길이에만 차이가 있지 웬디와 비슷하게 묘사되는데, 2차 성징이 일어나기 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어린소년과 소녀를 닮은 듯 그린 게 더 타당한 것 같아요. 오히려 그쪽이 ‘영원히 자라지 않는’ ‘네버랜드의’ 피터팬’의 이미지와 더 부합하는 것 같구요.
내 기억 속에 있는 디즈니 판본과 오리지널의 또 다른 점 하나는 마지막 챕터예요.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웬디가 어른이 되었을 때’예요. 뭔가 제목부터 슬프죠.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고 결국 어른이 됩니다. 그래서 웬디와 소년들은 모두 어른이 돼요. 하지만 피터 팬은 그렇지 않(못하)죠. 그렇다면 그 마지막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는데, 해피엔딩이라기보다는 새드엔딩에 가까울 것 같잖아요. 실은 그래서 마지막 챕터는 안 읽고 싶었어요. 아마 나만 읽었다면 마지막 챕터를 읽지 않고 끝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남편과 같이 읽은 거라서, 남편이 마지막 챕터를 읽고 나는 옆에 누워 눈을 감고 그 내용을 들었죠.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만년필 선물을 받았을 때, 달빛처럼님에게 답장을 보낼 때 만년필을 처음으로 쓰겠다고 했는데, 마지막 부분을 필사할 때 만년필을 꺼냈어요. 이걸 편지와 함께 보내고 싶었거든요.
덕분에 <피터 팬>을 읽은 거라 고마운 마음을 담고 싶기도 했고, 어쩐지 이 부분을 읽을 때 달빛처럼님이 생각났어요. 음… 피터 팬의 입장이 달빛처럼님과 비슷하구나, 어쩌면 그래서 달빛처럼님은 자기 자신을 피터 팬에 빗댄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아이들은 자라고, 성장해서 어른이 되면 어릴 때 기억은 전부 잊잖아요. 그렇지만 어른이 되면 아이를 낳죠.
웬디가 낳은 딸 제인이 피터와 함께 네버랜드로 가려고 할 때 웬디는 소리쳐요. “안 돼, 안 돼.”
“봄 대청소 때만요. 피터는 이제 내가 늘 대청소를 해줬으면 하거든요.”
이 말에 웬디가 한숨을 지으며 말해요.
“내가 너희들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는 못 날잖아요.”
이 다음부터가 제가 필사한 부분이자 이 책의 마지막이예요.
어른이 된 웬디는 날 수가 없어 네버랜드에 가지 못하지만, 그 딸인 제인이 엄마를 대신해서 피터와 함께 네버랜드에 가죠. 제인도 평범한 어른이 되지만 마가레트란 딸을 낳고, 매년 봄 대청소 때마다 피터가 찾아와 마가레트와 함께 네버랜드로 가요. 이런 식으로 계속 관계는 계속 되죠.

선생과 제자의 사이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사랑을 듬뿍 담아 모든 시간을 함께 했던 아이들은 졸업을 하고, 어른이 되고, 그렇게 각자의 생활에 바빠 학창시절은 잊게 되죠. 그래도 교사들에겐 매해 새로운 학생들이 생기고, 그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바치게 되죠. 그것이 무의미한 것일까. <피터 팬>의 결말에 의하면 결코 그렇지 않은 셈이예요. 각자의 인생 속에서 아이들도 나름의 질곡이 있겠지만, 아이들은 명랑하고 순수하고 제멋대로일테고, 그런 아이들과 매해 함께 하면서 그 ‘관계’는 영원히 계속될 테니깐요.
사실 학교 현장에서 오랫동안 있다 보면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건강하게 만들려는 마음도 퇴색하기 마련인 것 같아요. 뭐랄까. 계란으로 바위 치기 정도는 아니더라도 시지푸스와는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달까. 그러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기 십상인데, 여전히 제자들을 먼저 생각하고, 제자들 한 명 한 명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교사로서도 양질의 교육, 최상의 교육을 하려고 노력하는 달빛처럼님을 보면 항상 응원하게 됩니다.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일에 전념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피터 팬>을 읽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피터 팬 엽서를 보낸 달빛처럼님의 마음도 함께 읽었다고 해야 할까요. 풋풋한 청년이었던 달빛처럼님이 마흔이 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선생이길 고민하는, 좋은 인간이 되고 싶은 달빛처럼님의 고민을 들으며 ‘불혹’의 피터 팬을 보는 것 같았어요. 내 응원이 위로가 된다니 고마워요. 알죠? 나는 늘 달빛처럼님 편인 거.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한 여러 시도들,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런 모습들이 어쩌면 ‘피터 팬’ 같은 걸 거예요. 그럼 불혹이라도 여전히 청년인 거죠. 청년 같은 열정에 중년의 노하우와 경험, 연륜까지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최상이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달빛처럼님의 불혹과 40대가 아주 기대가 됩니다.
그러니깐 이런저런 고민은 접어두고, 명랑하고 순수하고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처럼, 본인도 명랑하고 순수하고 제멋대로인 40대로 살아요. 피터 팬처럼.
- 책읽는 낭만푸우 누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