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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나는 네가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믿을까봐 두렵다, 장의차가 지나가는 풍경, 가스 불을 켤 때마다 불에 탄 얼굴이 떠오르는 일,

이제 너는 싱그러운 꽃다발을 보고도 메마른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누구보다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이 되어 세상 모든 발소리를 분간할 것이다, 빛이 충분히 드는 집을 찾겠다고 이사를, 이사를 하고,

붓과 물감을 사들일 것이다, 나는 네게 환한 시간만을 펼쳐 보이고 싶은데, 집 안의 시계를 전부 치워버리고, 시간이 일으켜 올릴 싹을 두려워하며, 씨앗 없이 흙을 채운 화분, 그곳에선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기를 것이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손이 손 모르게 그려낸 얼굴을 마주하곤 놀랄 것이다,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유령처럼 걸었던 밤길이, 안간힘 썼던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놓았다는 사실 때문에,

폭발음도 없이 한 우주가 잠든 곳,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그러모으는 일, 나는 네가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믿지 않을까봐 두렵다, 네가 침잠하는 모든 시간에 언제나 한 사람이 곁에 있었는데도

너는 그런 기적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고개를 저으며, 흰 물감으로 또 한번 얼굴을 뭉갤 것이다, 반드시 흰 물감이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수없이 설명하고 설명할 것이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저
창비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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