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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

[도서] 복자에게

김금희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고고리섬으로 전학을 간 건 1999년이었다. (p.7)

 

소설 속에서 '고고리섬'은 제주도의 부속섬 중 하나로, 대정읍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이다.

극중 '나'는 가죽 도매상을 하던 부모의 부도로, 이 섬의 보건소 의사인 고모와 함께 살기 위해 일종의 경제적 피난을 가게 된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 진희가 있었다면, 『복자에게』는 이영초롱이 있다!

 

이 소설은 꽤나 많은 인물들의 서사로 엮여져 있다.

 

우선은 고고리섬으로 전학 간, 다부지고 영리하고 조숙한 소녀인 '나' 이영초롱 서사가 있다.

그리고 판사가 된 '나' 이영초롱의 서사가 있다. 나는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나와 판사가 되지만, 피치 못할 사유로 제주로 좌천된다.

그렇게 어릴 때의 '나'와 어른이 된 '나'의 서사가 제주에서 연결된다.

 

그리고 고고리섬에서 유년시절의 나와 함께 한 고모의 서사가 있고, 고고리섬에서 유일하게 표준어를 구사하며 내게 다가왔던 '복자'의 서사가 있다.

 

소설은 성인이 되어 제주로 내려간 '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과거의 인물들과의 관계가 현재에 다시 되살아나면서 이야기는 풍성해지고 복잡해진다.

 

 똑똑했던 그 많던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후일담이자 현재진행형인 이야기

 

IMF로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했던 소녀가 커서 서울대에 가고 판사가 되었다는 스토리는 그 자체로 인간 승리의 성공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수재들은 대체로 다 여자아이들이었는데, 성인이 된 후 대부분 그들은 종적을 감추고 사라져버린다. 똑똑하고 영리했던 그 많은 소녀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 소설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한 여성의 성공담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문대에 간다고, 판검사가 되었다고, 성공한 그 시점에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인생은 계속되며, 삶이란 대체로 영광의 순간보다는 '던적스럽고' 구차한 순간들이 더 많다. 더욱이 여성이라면 사회생활을 하면서든 일상생활을 하면서든 그런 순간들을 더 많이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영초롱도 그렇다. 서울대를 나오고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판사가 된 그의 이력은 영광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나,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재판을 하면서 인간의 온갖 추찹하고 더러운 면들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것이 '직업'의 세계이다. 밖에서 보는 것과 내부자로서 경험하는 세계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영초롱이 좌천되어 제주로 내려가게 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승승장구를 위해선 줄을 잘 서야 겠지만, 그런 '정치적 놀음'을 태생적으로 못 하거나,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성공하지 못한 인생은 실패한 것일까?

 

그렇다면 성공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인생은 실패한 것일까?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실패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판사로 일하다가 제주로 좌천된 이영초롱이 그렇고, 보건소 의사의 삶을 선택한 영초롱의 고모의 삶이 그러하며,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산업재해를 당한 복자가 그러하다.

작가가 의도한 것이겠지만, 셋은 모두 여성이다. 그리고 이 세 여성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세 사람의 인생만큼이나 고고리섬의 해녀 할머니들의 삶이 인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약자들끼리 연대하는 삶. 제 한 몸을 건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온 가족을 먹여살린 억척스럽고 생명력 강한 여성들의 삶.

 

작가는 이렇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의 경이에 대하여, 지겨운 '밥벌이'를 위해 묵묵히 매일매일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그 모든 지리하고 던적스럽고 때로는 모멸스럽기까지 한 모든 삶들의 총합이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 자신이라는 것에 대하여.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만, 김금희가 직조해낸 인간(들)의 삶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과 어우러져(그러나 기억하자. 자연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혹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든 걸 포함한 것이 자연이고, 우리는 종국엔 자연을 아름답다라고 표현한다), 비극과 희극을 초월한 그 무언가가 된다.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김금희는 소설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소설을 다 쓰고 난 지금,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p.243)

 

김금희가 소설을 잘 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일텐데,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비로소 이 작가가 '인간적으로' 좋아졌다. 

이런 위로와 메시지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 소설을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청춘의 긴 미로 속을 방황하고 있는 MZ 세대에게도,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경험한(혹은 경험하고 있는) 스스로의 가정을 만든 장년들에게도,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누이와 같은 중년과 노년 세대들에게도 각자에게 필요하고 적절한 위로를 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고고리섬의 포용력이 주는 깊은 위로를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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