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에 잠을 깼다.
밤이라 사위가 조용해서였겠지만,
지붕을 때리는, 땅으로 낙하하는 빗물의 소리가 가열차다.
'어쩐지 컨디션이 안 좋더라니.'
남편 등에 꼭 붙었다.
원래 비오는 날은 한 번 깨면 다시 잠들기가 어려운데
너무 피곤해서 인지, 체온이 주는 편안함 때문인지
스르르 잠이 든다.
빗소리는 여전하다.
낮에도 비가 퍼붓는다.
비바람까지 몰아쳐서
거실창으로 큰 나무들이
휘청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 와서 이렇게 비 많이 오는 거 처음 보는 거 같다. 그치?"
"응."
남편이랑 한참 비구경을 했다.
해가 지기 전, 아주 반짝 날이 좋아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무들이 평온을 되찾았다.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보는데
정말 커다란 비눗방울들이
우리집 베란다로 둥둥 떠온다.
어떤 기시감 같은 것에 사로잡힌다.
내가 이 장면을 어디서 보았지?
선명하고 큰 비눗방울들 속에
하나 하나의 추억들이 담겨 있는 듯하다.
아련하다.
이럴 때 좋은 기억들만 떠오르는 걸 보면
적어도 난 행복하게 산 사람인 듯하다.
감사해야지.
비눗방울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물드는 모습이
퍽 아름답다.
아련하고, 아름답다.
프러포즈용이나 이벤트용으로도 퍽 감동적일 것 같은 장면.
너무 아름다운 비눗방울에 끌려 밖으로 나갔는데
거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하핫.
내일도 비가 온단다.
비가 오면 역시나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오늘도 침실을 동굴처럼 해놓고(블라인드를 내려놓고)
내내 잠만 잤다.
동면하는 곰 모드.
꿈도 없는 숙면.
덕분에 거의 한 게 없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푹 쉬고 나니
좀 살 만하다.
여덟 시밖에 안 됐는데 기분에 밤 열 두시는 된 것 같다.
낮에 너무 많이 잤나?
아니면 하루 종일 비가 와서 그런가?
이제부터라도 책 좀 읽어야겠다.
비오는
겨울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