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구, 거대한 자연사박물관
모래는 대자연이 시간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낸 정교한 조각품이다. 조각의 재료는 거대한 바위덩어리다. 날마다 해가 떠오르면 뜨거운 열기가 바위 표면을 달구고, 해가 지면 바위는 차갑게 식으면서 수축한다. 이러한 과정은 계절을 바꾸어 가며 끝없이 반복된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바위는 조금씩 껍질을 벗어 던진다. 물 또한 바위를 해체하는 일등공신이다. 틈새마다 파고들어 바위 성분을 녹여내는가 하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때면 얼음쐐기가 되어 직접 바위를 부수기도 한다. 때로는 풀이나 나무의 뿌리도 바위를 뚫거나 반으로 쪼개는 괴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부서진 바위 조각은 휘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물살, 은근하면서도 끈기 있게 잡아당기는 지구의 인력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바다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동안 바위 조각은 더 작은 조각으로 부서지게 된다. 바다에 도착해서도 사나운 파도는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거친 물결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다 보면 조그만 바위 조각은 더욱 잘게 쏘개어지고 모서리가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쳐 우리가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운 모래알로 변하게 된다. 모래 알갱이의 대부분은 우이도의 바위들로부터 만들어졌겠지만 주변의 다른 곳에서 물결을 타고 흘러온 것도 섞여 있을 것이다.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에는 오랜 세월 풍상을 겪은 저마다의 역사가 담겨 있다(129-130).
해변의 지형과 파도의 높이, 모래 알갱이의 크기 등 너무나도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예측하기조차 힘들며, 이동 속도 또한 만만치 않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해변의 지형은 미묘하게 변화한다. 흑산도의 사리 마을처럼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몇 년 만에 자갈밭으로 변해버리는 경우도 있으며, 폭풍이 몰아치고 난 후 늘 보아오던 해변이 며칠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리기도 한다(130).
그러나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구를 쓸모 없는 모래덩어리로만 인식해왔다.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모래가 유리 원료와 골재용으로 값어치를 갖게 되자 이번에는 무분별한 채취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한때 우리 나라의 해안 어디에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었던 사구들은 하나둘 사라져가는 운명을 겪게 된다. 직접적인 채취뿐만이 아니라 사소해보이는 인간의 행동들 하나하나가 사구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구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외부의 자극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구를 안정화시키는 초지 군락이 인간의 활동이나 가축의 방목, 화재 등에 의해 사라지게 되면 사구도 따라서 급격히 파괴되고 만다. 사구 부근에 무분별하게 집을 짓거나 도로를 건설하는 일, 해안선을 따라 옹벽을 설치하는 일은 모래가 움직이는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사구의 숨통을 틀어막는 효과를 일으킨다. 조그만 방파제 하나도 물길을 바꾸어 사구의 식량인 모래의 공급을 차단해 버릴 수 잇으며, 간척을 위해 모래의 공급원인 강 하구를 틀어막는 대규모의 방조제 공사는 최악의 사태를 초래하게 된다.
사구의 파괴는 해조류, 갑각류, 어류, 조류 등 다양한 해양생물들에게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생물들은 살아가야 할 터전과 함께 좋은 사냥터와 산란장을 잃게 된다. 사람도 이런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래가 없어지고 나면 파도의 완충지대가 사라지므로 해변 침식은 더욱 가속화된다. 해변지역 주민들의 생활공간이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자연 정수기와 물저장고 역할을 하는 사구가 사라지게 되면 지하수도 그 기능을 잃게 된다. 수질이 나빠질 뿐만 아니라 지하수 수위가 낮아지면서 소금기를 품은 바닷물이 육지 쪽으로 밀려들어 맑은 물을 끊임없이 뿜어내던 지하수가 어느새 먹을 수 없는 짠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제 자연이 얼마나 민감한 존재인지 조금씩 깨달아가야 할 때다.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수성을 길러보자. 조그만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모여 모래밭을 형성하고 사구를 만들며 사라져가는 과정은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다. 우이도의 모래밭과 모래산과 사구는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대한 자연사박물관이다. 자연의 모습에 감동할 줄 안다면 더 이상 자연을 상처 입히는 일도 없을 것이다(131-133).
현산어보를 찾아서 4
이태원 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