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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살아가는 방식들

 

경마장에는 노숙자 차림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더러운 옷차림에 머리는 떡 수세미인데 그들이 배팅하는 돈의 액수는 엄청나다. 경기가 시작되기 1분 전 그들이 건 배팅 액으로 인해 전광판에 찍힌 액수는 삽시간에 천문학적으로 올라간다. 그들이 왜 그 많은 돈으로 머리도 감지 않고 옷도 빨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비누가 뭔지 모르는 걸까(144).

 

B는 언어의 대부분이 음담패설이고 R은 자기 자랑이다. 하지만 자랑을 들어주는 것보단 음담패설을 경청하는 게 낫다(147).

 

이제 유행가는 실습 단계에 이르러 원나이트는 일종의 문화로 자리 매김하였다. B가 선호하는 깔끔하다는 원나이트. B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을까. 아니면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속으로 B를 응원한다. B를 몰랐다면, B와 같은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B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B와 친구라는 이유로 B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무조건 B의 편에 서게 된다. 친구란 그런 것이다(150).

 

느닷없이 찾아온 이별은 이렇게나 낯설다. 처음 해보는 이별이 아닌데도 언제나 처음처럼 낯선 이별. 사랑에도 타이머를 부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다소 준비된 망므으로 이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처럼 조각조각 폭박하는 사랑을 향해 굿바이, 손을 흔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증발하여 사라져 버린, 보이지 않는 우리의 사랑을 향해 웃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154).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연애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하지 못하는 사람. 특히 오래오래 사귈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특별한 유전자를 몸속에 지니고 태어난다. 지구의 빛을 보기 전부터 그들에게는 그런 유전자가 있다. 희한하게도 유전자는 서로를 알아본다. 유전자에게도 텔레파시 같은 것이 존재하는 걸까.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사랑에 골인하여 수백 년간 사귄다. 그리고 언젠가 헤어진다. 그 후에도 같은 유전자를 만나면 바로 알아보고 기나긴 사랑에 빠진다(156-157).

 

누구는 살면서 세 번이나 결혼하던데.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것이다. 어찌 그리 잘 사랑하는지. 매번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들만 늘 사랑하는 세상이다(158).

 
11
진짜와 가짜

 

사람에게도 바코드 번호가 있어서 상품으로 진열된다면, 그래서 팔리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는 유통기한 안에 팔려 나갈 수 있을까? (164)

 

너는 니가 성인이 되었다고 느낀 적 있어?”

너랑 기준은 다르지만 성인이 됐구나, 라는 걸 느낀 적은 있어. 내 눈에 모텔만 보이던 날. 거긴 편의점도 있고 노래방도 있고 술집도 있고 다른 건물도 많은 거리였거든. 익숙한 거리라서 눈 감고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모텔만 내 눈에 들어오는 거야. 마치 이때까지 나 몰래 모텔이 숨어 있었던 것처럼. 그전까지는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안 보였나 봐.” (166)

 

나는 R이 진짜 명품을 좋아하든 가짜 명품을 좋아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R은 자신의 것이 가짜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솔직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나만 아는 사실을 은폐하지 않고 떳떳하게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솔직하다. 가끔은 그 솔지감은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아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진실한 말은 듣기 거북하고 듣기 좋은 말은 진실하지 않다는 말이 있다. 나는 듣기 싫은 말을 쓰게 삼킨다. 그들 역시 나의 말을 독주처럼 받아 마신다(168-169).

 

R은 자신이 가짜에 열광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진심 어린 망므으로 그녀의 가자 미니 홈피를 관람해줄 수 있다. R은 미니 홈피를 꾸미고 관리하는 데 하루 중 반나절을 소비한다. 그래서 실제 R의 집은 미니홈피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R을 만나면 방금 미니 홈피에서 막 빠져 나온 사람 같다. 진지하고 우울하거나, 행복하고 가볍거나. 어차피 인생은 포장이다. 무겁고 진실한 것처럼 행동해도 그 역시 연기다. R은 행복하고 즐거운 연기를 잘하는 것뿐이다. R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170).


12
숨겼던 진실

이유와 변명은 같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약속 시간에 늦은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은 변명과 다르지 않다. 시험을 망친 수십 가지 이유 역시 변명일 뿐이다. 이 세상에 이유란 없다. 다만 변명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겁한 단어일 뿐이다. 그것들을 길게 늘어놓을수록 초라한 사람이 된다. 그에게는 이유일지라도 내게는 변명처럼 들릴 언어(198-199).

 

애정이 결핍된 섹스는 구질구질하지 않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구질구질한 거잖아. (후략)” (202)

 

13 저마다의문제

분홍색은 계집애나 좋아하는 색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분홍색을 좋아하는 여자들을 비하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분홍색을 싫어하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다. 왠지 그런 말을 하면 진짜 분홍색을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분홍색을 진짜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되면 좀 어떤가,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홍색이 주는 이미지와 여성성이 나를 가둘까봐 감히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팍팍한 인간이다(205).

 

사진 속 여자는 삶에 찌들었는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 사진 한 장만 봐도 삶의 굴곡이 보인다(210).

 

책은 내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고 싶을 때 책을 잡으면 된다. 작별을 할 때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사람과 작별할 때는 상대방의 기분과 그 상황을 고려하여 인사해야 한다. 그러나 책은 내가 일방적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책은 내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그 어떤 압력도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무수한 말풍선을 달아준다. 나는 친한 사람을 곁에 두둣이 좋아하는 책을 가까이 한다. 나와 잘 통하는 사람은 아무리 같이 있어도 싫증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봤던 책을 또 펼친다(214).

 

14 눈을 뜨고도 꿈과 만나다

나는…… 외로웠어. 니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외로웠어. K가 사람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내 곁에 있어 줄 누군가가, 내 존재의 증명이 되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어. 사람들은 같이 있을 땐 얼마든지 척할 수 있어. 척하는 건 쉬우니까. 중요한 건 같이 있지 않을 때야. (후략)” (220)

 

Y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지는 몰랐다. 나는 늘 타인 앞에서 태연자약한 척해 왔다. 그러면 그들은 내가 무심한 사람인 줄 알았다. 무심한 척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는 매번 그런 식으로 상처받은 본심을 숨겨 왔다(221).

 

특별한 사람은 왠지 속물 같잖아. 부와 명예를 가져야 특별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너 그거 아냐? 특별한 사람은 두 배 노력하면 되지만, 특이한 사람이 되려면 열 배, 스무 배는 노력해야 해. 특이한 사람들은 심오하거든.” (231)

 

,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 느낌을 잘 몰라.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서 앞으로도 못 받을 거라고 생각했고.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서 주는 방법도 잘 몰라. 내가 하는 연애는 몹시 어색할 거야. 아주 어설프고 서툴 수도 있어. 그치만…… 그런 나를 니가 예쁘게 봐 줬으면 좋겠다.” (237)

 

15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자, 진복자(眞福者)일지니

내게 없었던 어머니라는 사람은 분명 또 다른 쓰임과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진짜 어머니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피를 섞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을 섞는 것이다(242).

 

가짜가 진짜일까. 진짜가 가짜일까. 진실이 거짓말을 하는 세상이다. 세상이 만든 질실이 미워지면 너만의 가짜를 만들어라. 네가 원하는 그 상상이 진짜다. 네 진심이 깃든 상상으로 이 세상에 복수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중략) 서로를 속고 속이는 것이 삶이다. 우리의 삶은 무릇 전쟁과 닮아 있다(244).


작가의 말

 

누군가가 건넨 빈말에 하루종일 감동한 적이 있었다. 진실이 거짓말을 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진짜로 위장한 가짜가 소중했다. 진실이란 알면 알수록 아픈 것이었다. 좀 외면하고 싶었다(247).

 

문학 변두리에서 언제까지나 서성거리며 살고 싶다. 미친 자신감을 품은 아름다운 열등생. 앞으로도 그 심정으로 글을 써 나가겠다(248-249).

 

 

마이 짝퉁 라이프

고예나 저
민음사 | 2008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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