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다섯 시 즈음부터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다.
비가 오려는 걸까,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일기 예보에 바람 많이 분다고 그랬어.
그래?
밤새 어찌나 바람이 많이 부는 지
태풍 맞은 배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 정말 떠내려 가거나 날아가는 게 아닐까.
'오즈의 마법사' 같은 게 현실이 된다면
결코 멋있지만은 않겠구나, 뭐 이런 생각도 하다가
설핏 잠이 들었는데...
침대가 흔들려서 잠이 깨니 새벽 세 시.
어라, 지진까지 오는 건가? 이제라도 일어나 대피 준비를 해야 하나?
그 와중에도 우리 남편은 잘 잔다.
참 긍정적인 성격이다. 잘 때만.
결국 그 때부턴 잔 시간보다 깨어 있던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도 또 설핏 잠이 들었었나 보다.
알람이 울릴 때가 됐는데 안 울려서 봤더니
새벽녘에 잠깐 전기가 나갔었나 보다.
서둘러 일어나 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씻고 나갔다.
운전하고 가다 보니 정원수가 뽑혀 나간 집이 보인다.
어떤 집은 큰 야자수가 넘어지면서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
프리웨이에 진입해야 하는데 차가 꽉 막혔다.
역시나 뿌리가 뽑혀 도로 안으로 들어온 나무 때문이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크게 심각성을 몰랐는데
출근해 보니 다른 동네는 난리도 아니었나 보다.
심지어 애들 등교를 안 한 동네도 있고
전기가 나간 동네도 있단다.
출근을 하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전기가 안 들어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등교를 한 학교도 조명을 켤 수 없어
애들이 창문을 모두 열어 놓고 수업을 한단다.
난리가.... 다른 게 아니다.
이게 난리다.
현대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진 인간은
한순간에 무능력하고 취약해진다.
전기가 나가 신호등이 안 되는 곳은 교통 정체도 엄청 나단다.
그런 데도 그 모든 게 남의 이야기 같다.
나도 남들한테 듣고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서
와, 심했구나, 하는 거지
나는 뭐... 하룻밤 잠 설친 거 외엔 아주 무사하다.
오히려 그날 아침엔... 바람이 머무는 곳에
다소곳이 모인 나뭇잎들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기도 했으니... --;
암튼, 저는 아주 잘 있습니다.
아, 굴뚝 위에 있던 'spark arrester'가 떨어져 나간 걸
이웃이 주워다 주기는 했지만
그 정도면 아주 양호한 편이지요.
여기저기서 안부를 묻길래
블로거 친구들에게도 안부를 전합니다.
저는 아주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암튼... 11월의 마지막 날과 12월의 첫 날을 그렇게 어영부영 보내다 보니
벌써 12월도 이틀째 날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들이 많다고 하니
생각날 때마다 기도해주면 고맙죠.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모두 잘 지내요.
안녕.
(흠... 역시나... 아직도 돌아오고 있지 않아.
먼 길 떠난 '글 쓰기 능력'은 언제쯤 다시 돌아올려고 그러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