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1.

아무 날의 도시

신용목 저
문학과지성사 | 2012년 09월

 

시인세계 2010년 봄호에서 '주목할 만한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을 선정한 적이 있어요. 시인세계에서 정의한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 2000 1월부터 2009 1월까지의 10년 사이에 등단하여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들이었는데 그때 시인들과 평론가들에게 고루 지지를 받은 시인이 바로 신용목입니다.

권혁웅은 신용목을 다음과 같이 평가(혹은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자 가장 최근 에 나온 시집이 바로 『아무 날의 도시』입니다. 신형철은 “이번 시집의 무게와 그것을 표현하는 기예의 깊이를 옹호하며 덧붙이건대, 이제 그는 동세대·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하나다”라고 평가하였는데 개인적으로는「얼굴의 고고학」을 추천합니다.

 

신용목의 작업은 일종의 꼬리표 붙이기다. 예를 들어 “식당 간판에는 배고픔이 걸려” 있고, “약국 간판에는 절망이 걸려” 있다(「아무 날의 도시」). 대상을 견인하거나 대상과 길항하는 이 꼬리표들(“배고픔”과 “절망”) 덕분에, 신용목의 세계에는 어떤 의미의 과잉이 일어난다. 실은 이런 과잉이 시인이 노리는 것이다.
그는 각각의 꼬리표들로 격벽이나 유로流路를 만들어, 시상의 흐름을 차단하거나 시상으로 하여금 다른 길로 접어들게 만든다. 그는 대상(자연, 생활, 운명, 당신 등)의 구술자가 아니다. 그는 대상의 내밀함을 받아쓰기 하지도 않고, 그것의 선험적 징표들을 수락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대상들이 그의 표상이 되도록 마름질되고 배열된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일관된 구도 아래 대상들을 배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그랬다면 꼬리표들이 대상을 집어삼켜, 대상 없는 의미만이 남았을 것이다). 어떤 방황의 넓이와 시선의 지평과 투시의 깊이가 있고, 그것들의 삼차원적 지평에 대상들이 배치되는 것이다. 그가 두 권의 시집에서 ‘바람’을 표제어로 올렸을 때에도 그의 바람은 방황이나 무형無形의 표상이 아니었다. 첫 시집의 바람이 가계家系와 운명의 표상이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아버지의 뼈 속에 들어” 있었고, 두 번째 시집의 바람은 아예 정주의 표상으로 “탑의 골짜기”를 악물고 있었다. 바람마저 그에게는 저 꼬리표들과 맞물린 의미화의 표식이었던 셈이다. 이 점에서 보면 그는 아주 강한 시인이다. (권혁웅)
  

 

 

2.  

 

깡패단의 방문

최세희 역/제니퍼 이건 저
문학동네 | 2012년 03월

 

제니퍼 이건은 매우 지적인 작가입니다. 21세기 미국의 가장 독창적이고 대담한 소설가로 평가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구요.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근래에 제가 본 여성 중 가장 매력적인 여성입니다『깡패단의 방문』을 통해 그녀는 2011퓰리처상뿐 아니라 미국비평가협회상,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도서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열세 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각각의 장이 다른 화자,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그리고 있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레코드 레이블 대표인 베니와 그의 비서 사샤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인간관계이자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니퍼 이건이 이 책에서 말하는 깡패란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시간을 '깡패'라고 여긴 걸까요? 작품이 직접 말하게 하는 방식이 좋을 것 같아 두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녀는 옛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와 베니는 이제 그 시절을 그렇게 불렀다—단순히 크랜데일로 이사 오기 전이 아니라, 결혼하기 전, 부모가 되기 전, 돈이 생기기 전, 마약을 끊기 전, 뭐가 됐든 책임이란 것을 떠맡기 전의 시절, 그들이 아직 보스코와 함께 로어 이스트사이드를 배회하고, 해가 뜨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고, 모르는 사람의 아파트에 불쑥 나타나고, 공공장소나 다름없는 곳에서 섹스를 하고, (스테파니의 경우에는) 헤로인을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맞는 것 같은 도발적인 행동을 했던 시절을 가리켰다. 그중 아무것도 진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젊었고 운이 좋았고 강했다—그들이 걱정할 게 뭐가 있었겠는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스코는 아파서 운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죽을 계획을 짜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이런 결과는 자연법에서 기형적인 일탈일까, 아니면 마땅히 이렇게 될 줄 알았어야만 했던 평범한 일일까? 어느 정도는 그들이 자초했던 건 아닐까? (pp. 200-201)

 

바닥에 앉아 오후시간이 흘러가는 걸 느끼던 테드는 어느새 수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짝 다른 수전이 아니라 수년 전 어느 날의 그녀—그의 아내—를. 테드가 그의 욕망을 접고 접어 조그맣게 만들기 전이었다. 뉴욕에 놀러 갔을 때 둘 다 한 번도 타본 적도 없고 해서 재미 삼아 스테이튼 아일랜드 유람선을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수전이 불쑥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늘 오늘처럼만 살자.” 그 시절만 해도 두 사람이 한마음이었던지라 테드는 왜 아내가 그런 말을 하는지 더없이 잘 알았다. 그날 아침 섹스를 해서도, 점심식사 때 푸이 퓌세를 마셔서도 아니었다. 아내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파도치는 갈색강물과 쏜살같이 지나가는 보트와 바람 속에서—사방이 움직임과 혼돈으로 가득한 가운데—테드도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수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언제나. 언제나 오늘 같을 거야. (pp. 337-338)

 

개인적으로는 올해 국내에 소개된 해외문학 중 단연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3.   

 

 

포주 이야기

김태용 저
문학과지성사 | 2012년 01월

 

아마도 정영문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김태용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풀밭 위의 돼지』같은 작품은 매우 독창적이고 인상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를 좋아해서 모든 작품을 다 읽었는데 이 작품집은 또 하나의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김태용을 “언어에 반하는 언어” “서사에 반하는 서사”로 한국 소설의 열린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가라고 평가하는데 이 책의 후반부에 실린 작품들은 작가의 이런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한편 전반부에 실린 작품(「포주 이야기」) 은 글쓰기 자체에 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전작인 『숨김없이 남김없이』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궁구한 것이기도 합니다. 문학 이후의 문학의 미래가 궁금한 독자라면 김태용을 권합니다.  

 

김태용 역시 작품이 스스로 작가를 드러내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아 이 소설집에 수록된「물의 무덤」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욕실 변기 대신 요강을 사용하고 있었다. 변기에 일을 보고 내리지 않는 것보단 차라리 요강이 나은지도 몰랐다. 요강에 든 것을 변기 안에 버리고 바지를 내렸다. 아랫배에 힘을 주며 그는 어머니의 배설물과 자신의 배설물이 섞이는 것에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pp.37-38)

 

옷을 벗고 계곡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은 몹시 차가웠지만 어떤 안락감이 느껴졌다. 물속에서 수음을 했다. 방사를 할 때 그는 길게 말 울음소리를 냈다. 허연 정액들이 물 위를 떠다니다 물에 흡수되어버렸다. 그는 물이 잉태할 자신의 자손들을 떠올렸다. (p.53)

 

소설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의 일부도 소개해 볼게요.

 

머릿속에서 물이 출렁거린다. 호흡이 가쁘다. 이야기를 이어서 전달하는 것이 힘에 부친다. 생각도 점점 마비가 되어가나보다. 군데군데 균열이 일어나고 그 사이로 오줌이 스며든다. 머릿속이 습하다. 소금에 절여지고 있다. 소금에 절여진 머리를 땅속 깊이 묻어두어야 한다. 잘 익어가고 있을까. 잘 익어가고 있겠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가끔씩 꺼내 머리에 핀 곰팡이를 걷어내고 손가락으로 찔러 맛을 봐야 한다. 인간의 정신 구조를 연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중략) 오로지 육체를 굴리는 삶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머리 없이 허리 없이」, p.145)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런 식이 가능할까. 불가능하게 시작할 수는 없을까. 시작은 없고 중간과 끝만 있는 이야기는 어떨까. 끝도 필요 없다. 시작과 끝을 연상하고, 연상이 무한히 확장되고, 끊어져 중간의 얼굴을 치장할 수 있다면. 흠집을 낼 수 있다면. 시작을 지연시키는 혹은 끝에 다다르기 위한, 불가능의 이름으로 가능한, 이야기의 중간. 중간 이야기. (「허리」, p.163)

 

다락방은 축소와 확대가 불규칙한 거대한 잠구멍 속이었다, 라고 말하면 과장일 테지만, 다락방이 등장한 이상 그 어떤 과장도 과장이라는 단어가 가진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과장해도 과장이 되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락방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머리말에 불과한 이야기.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의 잠구멍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머리말. 잠구멍이 언제 열리고 닫히는지 알 수 있다면 머리말의 머리를 잘라낼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 p.204)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올해 나온 작품 중 꼭 읽어보고 싶고 기대가 되는 건 다음의 세 작품입니다.

 

톰은 톰과 잤다

손홍규 저
문학과지성사 | 2012년 06월

 

나프탈렌

백가흠 저
현대문학 | 2012년 09월

 

레가토

권여선 저
창비 | 2012년 05월

 

그러고 보니 손홍규와 권여선을 제외한 신용목, 김태용, 백가흠은 모두 저와 동갑내기이고제니퍼 이건은 저와 띠동갑입니다. 그러니깐 모두... 호랑이띠인 셈인데요... 앞의 세 사람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왔다는 묘한 동질감이 있어 응원하며 지켜보게 되는 '동기'들이고 제니퍼 이건은 12년 뒤의 내 모습이길 바라는 '멋진 선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9

댓글쓰기
  • 디오니소스

    낭만푸우님의 추천은 늘 거의 100%에 가깝게 만족을 주곤 했어요. <깡패단의 방문>은 다음 리스트에 올려놓았죠. 음... 아래 기대작 3편 중 <나프탈렌>만 읽었는데요. 낭만푸우님의 기대에 값할 수 있을 지 궁금합니다.

    2012.11.20 13:3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읽는낭만푸우

      (제 블로그 오른쪽 애드온에 <깡패단의 방문> 있어요. 부끄부끄. ^^;)
      전 이 작품 너무 좋았어요. 완전 멋져요. 근래 본 여성 중 가장 멋져요. 이렇게 나이 먹어야 할텐데.
      사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온지라 한 번만 읽고 반납하기 아까워서 두 번이나 읽은 책이기도 해요. 최근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 다 너무 좋아서 최소 두 번씩 읽느라 완전 '전투적'으로 글 읽는 중. 비는 시간 바늘로 콕콕 짚어 내듯 열심히 책 읽고 있어요. ^^;

      2012.11.20 14:07
    • 파워블로그 책읽는낭만푸우

      글쎄요... 저 기대작 세 권 중 <레가토>만 갖고 있어요. 그건 올해 안에 읽어보려구요.
      나머지 두 권은 저한테 없어서... 도서관에 '기적적으로' 들어와 내가 도서관 간 날에 누가 빌려가지 않고 '기적적으로' 남아 있길 바랄 따름입니다. ^^;

      2012.11.20 14:08

  •  



     


     
    생각지도 않았던 시인 친구님의 시집 선물.
     
    쓸쓸할 뻔했던 추석 때 먼저 인사 나눠준 것만 해도 감동했는데
    새 시집까지 보내준 착한 마음,
    고, 맙, 습, 니, 다.
     
    이 시집은 여러모로
    루시드 폴의 '고등어' 같아요.
     
    비행기로 왔는데도 30

    2012.11.20 14:1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eunbi

    야아~ 낭만푸우님의 책도 특색이 있습니다. 신용목님의 시라... 저 시집은 안읽어봤는데... 관심가져봅니다...^^*

    2012.11.20 16:33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읽는낭만푸우

      '주목할 만한 2000년대 젊은 시인들'로 선정된 시인들은 (몇몇 빼고) 다 괜찮더라구요. 저는.
      예스24 선정 도서 후보에 시집이 한 권도 없는 건 좀 아연실색이었어요.
      그런 부분은 알라딘도 좀더 센스 있는 듯.
      예스24는 뭐랄까... 좋게 말해 좀더 대중적이죠. ^^

      2012.11.20 17:13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