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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원래 건강이 좋지 않으셨는데다, 동생과 나는 연년생이다 보니 나는 대부분 아빠랑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보통의 다른 여성들에 비해 좀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 그리고 그러한 언어와 행동을 구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부터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친구들이 더 많고, 남자들이랑 있을 때 더 편한다.

내 후년이면 남편 만난지 20년째인데, 남편과 큰 위기 없이 잘 지낼 수 있는 것도 사랑 이외의 다른 부분들도 잘 통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

 

암튼, 연애를 하기 전까지는 나는 엄마보단 아빠랑 더 친했다.

연애를 하면서 비로소 같은 여성으로서 엄마를 이해하게 됐다. '여성적인 삶' '여성으로서의 삶'에 눈뜨면서 엄마랑 동지의식 같은 걸 공유하게 되었다고 할까?

 

내가 학부 4학년 1학기 때 엄마가 자궁암 수술을 했는데, 자궁암 수술이라는 게 결국 자궁을 떼어내는 거라 그 이후에 엄마에게 심각한 우울증이 찾아 왔다. 엄마 혼자 집에 있게 하는 게 아무래도 위험해서 한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을 했다. 그렇게 1년을 엄마랑 함께 했다.

대부분의 가정이 비슷하겠지만, 중학생이 되면 그때부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살더라도 부모와 함께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나 역시 그랬다. 대학 4년 동안 방학 때도 거의 매일 학교에 나갔기 때문에 더더욱 엄마랑 함께 할 시간이 없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어려서부터 나는 주로 아빠랑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집에 있더라도 말이 더 잘 통하는 아빠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런데 그 1년 동안 엄마랑 참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복학하고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는데, 그때 때마침 내 전공 쪽에서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교수님이 방한을 하셨다. 지도교수님이 그 분과 안면이 있으셔서 나를 소개해주셨고, 내 프로필 등을 보신 그분이 나를 좋게 보셔서 자기 학교에 오라고 해주셨다.

미국 학교는 교수 밑으로 들어간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 분이 오케이를 해주신다는 건 합격은 물론 장학금을 비롯한 모든 게 다 해결된다는 의미였다.

모두가 다 부러워하는 기회였는데, 결국 고민고민하다 엄마 때문에 포기했다.

만약 내가 그 시점에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면 6년 정도 유학이 빨라진거니깐, 그리고 그땐 미국 경기도 좋았고 미국이 잘 나가던 때니깐 공부할 때도, 공부한 이후에 자리를 잡는 것도, 늦게 유학왔을 때보다 훨씬 유리하고 편했을 거다. 결정적으로 그 학교는 세계에서도 탑 3에 들었다.

 

지도교수님을 비롯해 모두가 어이 없어 하며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각자 자기 삶을 살뿐이야."

"네 어머님은 네 어머님의 삶이 있고 너에겐 너의 삶이 있는 거야."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내가 엄마 곁에 있어서 엄마가 오래 살 수 있었으니깐.

아주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때 내가 유학을 선택했다면 내겐 아주 유리했겠지만, 엄마는 아마 그 즈음에 돌아가셨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엄마가 그런 말을 하셨다.

"내 소망은 네 학부 졸업식만 보는 거였는데, 10년 이상 더 살고 있는 건 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네가 나한테 준 선물이야."

 

그 말이 너무 짠하고 고맙고 아파서 엄마랑 둘이 손을 꼬옥 잡고 울었던 기억도 있다.

 

수술 후 수혈 합병증에 연세가 들면서 생긴 이런 저런 병까지... 오랫동안 고생하셔서

미국에 와서도 계속 엄마를 챙겼다.

채혈도구 등을 비롯해 하다 못해 솜까지도 그때그때 미국에 있는 내가 인터넷을 통해 주문해서 보내드렸다.

 

인터넷을 통해 채팅도 매일매일 했다.

엄마가 심적으로 '딸을 잃었다'고 생각하셔서,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과 시차가 다르다보니 엄마가 시간에 맞추려다 보니 별의별 에피소드들이 많다.

 

1미터 앞도 안 보일 만큼 비오는 날 차 타고 하이웨이 달라다가도 정신없이 인터넷 될만한 곳 찾아 들어가고 (이 동양 여자가 미쳤나, 하는 눈빛 참 여러 번 경험했다.)

아무리 바쁘고 정신 없더라도 하던 일 딱 멈추고 매일 매일 같은 시간에 엄마랑 채팅했다.

하루에 30분씩은.

 

주로 엄마 이야기 들어주기.

워낙에 맘고생할 일들이 많았던 데다 우울증이 있으시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라면 의연히 넘길 일도 엄마에겐 항상 힘든 일이었다.

"나도 딸이지만 넌 정말 지극 정성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란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그게 엄마한테 어떤 의미인 줄 아니깐 그만두거나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암인 걸 알게 된 후에 국내 최고 권위자라는 의사를 찾아내 바로 검진받을 수 있게 해드린 것도 나다.

미국에서 국제전화로 모든 인맥 다 동원해서 불과 이틀 만에 입원 가능하게 해드렸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엄마가 두려워하지 않으시도록 최고의 권위자에게.

 

힘든 일 당했을 때 울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 복받은 거다.

나는 항상 내가 책임을 질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너질 수도 없었다.

그럴 때일수록 더 냉정해져서 내가 모든 일을 처리해야만 했으니깐.

 

엄마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전화를 받고는 서둘러 일을 정리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도 모든 사람들이 말렸다.

"네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할 때야. 지금은 커리어를 쌓을 때라구."

"너 말고도 너네 가족 있잖아. 다른 가족들에게도 너네 엄마를 케어할 의무가 있는 거라구."

"왜 너네 집에 일이 생길 때마다 네가 해결해야 하는데? 너는 왜 항상 너네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냐?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너네 가족들도 이상해."

"다른 가족들도 제 역할을 해볼 기회를 줘. 네가 지금 그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니?"

 

하지만 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가장 편해하는 사람, 엄마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 엄마가 가장 의지할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석 달 동안 24시간 내내 엄마 곁을 지켰다.

 

말기 암 환자의 투병을, 바로 옆에서, 24시간 동안 지켜봐야 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사람들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지옥이 다른 게 아니다.

그게 바로 지옥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너무 힘들어 도망치고 싶을 때도 많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에 신음하는 걸 보고 있으면

그 고통이 고스란히 칼이 되고 창이 되어 나를 찔렀다.

붉은 선혈이 심장에서 뚝뚝 떨어졌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시라는 주변의 권유도 많았지만,

입원한지 일주일도 안 돼 엄마가 우셨다.

"나 집에 가고 싶어."

그래서 결국 집에 모셔올 수밖에 없었고, 그 고통을, 그 끔찍한 악몽 같은 시간을 모조리 견디며 받아내야 했다.

 

스물세 살 때부터 서른 여덟까지.

그렇게 5분 대기조처럼 살았다.

매일 매일,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듯이, 어디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지뢰밭을 걷듯이.

 

그렇게 엄마가 돌아가시고 2년 반.

한동안은 실어증에 실서증 비슷하게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문장도 제대로 못 쓸 정도로 힘들었다.

상실감이 너무 커서 아무 것도 못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미국에 공부하러 안 오고 계속 엄마 옆에 있었다면, 엄마가 살 소망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었을테고, 그랬다면 엄마가 예전에 자궁암 완치 판정을 받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잘 이겨내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에.

내가 엄마 옆에 있었다면 사람들이 내가 무서워서라도 엄마를 그렇게 괴롭히지는 못했을텐데. 결국 엄마 병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키운 거라고 한다면... 엄마가 돌아가신 건 전부 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엄마 곁을 지켰어야 하는데. 못된 사람들로부터 엄마를 지켜드렸어야 하는데.

그냥 엄마 옆에 있을 걸,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미국까지 와서... 그런 자책감.

 

그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엄마의 엄마'로 살았던 15년.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내가 엄마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엄마가 나 때문에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그걸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네 딸 같고 네가 내 엄마 같아."

"너는 천사야."

"엄마가 우리 딸 너무 고마워."

"엄마가 많이 사랑해."

 

엄마와, 엄마와 관련된(엄마를 챙겨드리는) 일들이 일상에 너무 큰 부분을 차지했었던 지라

엄마를 잃은 상실감과 더불어 그 공허감이 너무 컸던 것도 같다.

 

그렇게 석달을 한국서 보내다 미국에 돌아와 보니

오른쪽 머리의 거반이 하얗게 셌다.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으면, 머리가 하얗게 센 걸까.

 

솔직히 너무 힘들고 지쳐서 중간에 도망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 해야만 했기에 끝까지 버티고 견디긴 했는데

그게 많이 힘들었던 거다. 몸의 어딘가는 비정상이 될만큼.

 

엄마가 돌아가신 지 2년 반 정도 됐는데

이제야 조금씩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일상을 회복하게 되는.

사실 어떤 게 일상인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처럼 정신없게 바쁘게 사는 게 일상이라 생각하며...

 

이제 이 세상에선 더 이상 엄마와 함께 할 수 없지만,

엄마가 자랑스러워하고 고마워하던 딸로서,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다.

 

"엄만, 너 때문에 산 거잖아. 불빛 하나 없이 어둠에 갇혀 있을 때마다 네가 나한테 말을 걸어주고, 빛으로 나오게 해줬잖아. 네가 내 손을 잡아줬잖아. 난 네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존재가 되어줄거라 믿어. 너는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하잖아. 아픈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잖아. 너로 인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을 거야. 그게 하나님께서 네가 주신 달란트 같아, 엄마는. 그래서 우리 딸 위해 기도하고 있어. 매일매일. 엄마가 그랬듯, 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천하보다 귀한 많은 목숨들 살리는 사람으로 쓰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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