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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생긴지 오래됐다. 집들도 다 유서가 깊다.
내가 사는 이 집도 1945년엔가 지어진 집이다.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많다. 우리집이.
그래서... 뭐랄까. 집에 있으면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 근처 집들이 죄다 그렇다.

 

그래서 집에 오면 참 좋다.
따지고 보면 우리집이 속한 시의 다운타운에서 불과 몇 블럭 사이인데도 너무 조용하고 깨끗하고 아담하고 예쁘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하루종일 바짝 예민한 채로 일하다 퇴근 시간이 되면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듯 엑소더스하는데,

우리 동네에 와서야 비로소 '휴'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속도부터가 다르다. 태초의 인간들과 비슷한 속도로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간다.

견고하게 지어진 요새에 들어온 것처럼이 동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안전하다. 


따지고 보면 세계 모든 곳이 동일한 시간대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어느 곳은 시간이 물질적으로 느리게, 어느 곳은 아주 빠르게 흐른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각 작가마다 삶의 시간이 있고 그것이 글의 리듬이나 내용, 단어에 영향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작가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비슷한 삶의 속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시간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편하고 부담 없어 금방 친숙해질 수 있는데,

사실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숨겨진 좋은 책들'을 찾는 것만큼 항상 가능한 건 아니다.

그러니 태초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네가 있다는 건, 그리고 그 동네에서 내가 산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아침, 저녁으로 운동을 하며 항상 보게 되는 일상의 풍경이지만

늘 최선을 다해 눈에 담으려고 하는 것은

이 동네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매순간 느끼고 그것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한겨울에도 꽃이 핀다.

흔히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고 한다는데,

그렇게 따지면 캘리포니아의 모든 꽃들은 '무궁화'다.

일년 내내 피고 지고 또 핀다.

 

장미도 해바라기도.

 

 

이 동네에선 시를 읽는 게 가능하다.

시를 읽을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느리게 흐르니깐.

가끔 시집을 가지고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고양이처럼 느릿느릿 걸으며 시를 읽는다.

 

 

그때 나는 레고만큼 행복하다.

(서점이나 도서관들이 가까이에 있어 언제든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Strawberry Tree'.

꽃도 열매도 예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벌새가 이 나무를 사랑한다는 것.

느긋한 휴일, 거실창으로 분주히 꿀을 먹고 있는 벌새를 보는 시간은 무엇보다 귀하다.

 

 

 

볕이 좋아서인지 여름에 열린 사과.

그 사이 어린 아이 주먹만한 사과가 다시 열렸다.

일년에 두 번씩 열매는 맺는다.

 

 

동네 전체를 등롱처럼 환하게 밝혀주는 배롱 나무들도 장관이다.

 

 

아빠 생각나게 하는 나팔꽃도.

발돋음을 하고도 손을 쭉 뻗어 찍어야 할만큼 큰 나무다.

오래된 동네이니만큼 오래된 나무들도 많다.

 

 

 

꽃, 꽃, 꽃들.

 

 

 

이런 동네라면 책을 읽는 게 가능하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깐.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 수 있으니깐.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

에덴동산 같은 이 곳에서

나는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이 아름답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태초의 시간이 흐르는 이곳에서는

살아 있음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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