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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도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필립 K. 딕 저/이선주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을 때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두려움이었다. 자기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걸 인식한 후 그 사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매우 이채롭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한 후 가장 처음으로 느낀 것이 수치심이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이나 생명과 구분해주는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처럼 인간과 지능이 비슷하거나 인간보다 훨씬 지능이 높은, 혹은 육안으로는 절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인간은 인간이고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이다. ? 인간은 수치심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쉽게 간과할 수 있지만, 이와 관련하여 꼭 생각해보고 가야 할 것 중 하나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뭉크의 그림들이다. 필립 K. 딕은『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 뭉크의 <사춘기> <절규>, 두 작품을 삽입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두 그림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뭉크의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이 아닐까 싶다.

 

이 두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루바 루프트)와 안드로이드 같은 인간, 이렇듯 상반되는 두 인물과 만날 때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필립 K. 딕의 전작의 기저에 흐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I. 뭉크의 <사춘기>  인간보다 인간다운 안드로이드 루바 루프트

 

양손을 한데 모으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당혹스러운 놀라움과 함께 새롭고도 어리둥절한 두려움의 표정이 얼굴에 각인되어 있는, 한 어린 소녀의 그림이었다.

 

 

 

“나의 요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병과 광기와 죽음의 천사들이었으며, 그들은 그 후에도 줄곧 나의 생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뭉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위와 같이 말했다. 뭉크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누나를 여의고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 풍겨지는
불안과 우울은 이러한 그의 정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뭉크의 <사춘기>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알몸의 소녀를 그린 작품인데 경직된 자세나 긴장한 표정, 겁먹은 눈에서 이유 모를 불안과 두려움이 느껴진다. 오른쪽 뒤로 길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성장기의 불안감을 의미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공통된 해석이다.

진짜로 살아 있는 인간과 인간형 로봇 사이에는 무척이나 많은 차이가 있었다. 아까 미술관의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두 개의 피조물과 함께 아래로 내려왔지.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안드로이드였는데…… 내 감정은 애초에 의도된 것과는 정반대였어. 내가 익숙하게 느끼던 것과는 정반대였지. 내가 의무적으로 느껴야 하는 것과는 말이야.

 

 

사춘기는 비로소 인간이 되어가는 시기이다. 몸과 정신이 성숙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도 성립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최초의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사춘기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자신에 눈뜨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수치심과 두려움, 불안과 공포이다. 뭉크의 <사춘기>에는 그러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가 변화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어른이 되고 있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드러난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이다.

 

그런데 필립 K. 딕은 안드로이드 루바 루프트와의 대면과 그 이후 릭이 갈등하는 장면에서 이 그림을 삽입함으로써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루바 루프트가 죽기 직전 릭에게 사달라고 부탁한 것이 뭉크의 화집이었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고 있던 작품이 바로 뭉크의 <사춘기>였다. 그녀는 그 어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안드로이드였다.[i]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나? 릭은 속으로 물었다. 그건 분명해. 그들이 때때로 주인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치는 이유도 그것이니까. 더 나은 삶, 노예 신세가 아니라. 루바 루프트처럼 말이야. 〈돈 조반니〉와 〈피가로의 결혼〉을 노래하는 거지. 황량하고 바위투성이인 지표면을 힘들게 오가는 것 대신에 말이야. 근본적으로 거주가 불가능한 식민 세계에 사는 것 대신에 말이야. 

근본적으로 거주가 불가능한 식민세계에서 사는 것 대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지구로 도망을 쳤다면, 주인을 죽이고 더 나은 삶을 선택할 만큼 의식 있고 자각 있는 존재라면, 안드로이드도 꿈을 꾼다면,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왜 안드로이드는 죽여야 하는 걸까? 단지 주인을 죽이고 인간에게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매우 궁색한 변명이다.

 

 

여기서 피조물이었던 인간이 창조자가 되었을 때의 고뇌와 회의가 시작된다. 여기에 인간의 이중성이 있다. 피조물이자 창조자라는 점.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위치가 인간을 갈등하게 한다.

 

 

II. 뭉크의 <절규>와 인간인지 안드로인지 모호한 필 레시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절규>는 핏빛의 하늘을 배경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으로, 깊은 좌절에 빠진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형태의 왜곡을 통해 표현하고 있. 뭉크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드에 걸린 칼을 보았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필 레시는 한 유화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없고, 뭔가에 짓눌린 피조물이 묘사된 작품이었다. 머리는 뒤집어놓은 서양 배 같고, 공포로 인해 양손으로 양쪽 귀를 덮었으며, 입은 크게 벌려서 소리도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피조물의 고통이 만들어낸 뒤틀린 잔물결, 그 울부짖음의 메아리가, 피조물 주위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피조물은 자기 자신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기에 이르렀고, 스스로의 소리를 막으려고 양손으로 귀를 덮었다. 그 피조물은 어느 다리 위에 서 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 피조물은 고립 상태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절규에 의해서(또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 필 레시는 이것이 안드로이드가 느끼는 바라고 말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에서 필 레시는 안드로이드인지 인간인지 매우 모호한 상태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필 레시의 주장과는 달리 단절이나 고립 상태에서의 비명은 인간의 근원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뭉크의 <절규>는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다. 그렇다면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구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가? 안드로이드로로부터 구분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필립K. 딕은 이 설정을 통해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릭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쩌면 감정이입 능력은 오로지 초식동물에게만, 또는 (고기라는 식단에서 멀어질 수 있는) 잡식동물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언젠가 이런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감정이입 능력은 궁극적으로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의, 그리고 성공한 자와 패배한 자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기 때문이다.

 

 

을 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만 한다. 감정이입 능력은 오로지 초식동물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사냥꾼에게 감정이입이란 치명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감정이입 능력이야말로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그렇다면 릭이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릭이 하는 현상금 사냥꾼은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전략) 이제 나는 당신이 우울해할 때 어떻게 고통을 받는지를 이해할 수도 있어. 나는 늘 당신이 그 상태를 기꺼워한다고 생각했었고, 당신이 언제라도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 혼자 힘으로 안 되면, 하다못해 기분 조절 오르간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이야.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우울해할 때면, 당신은 아무 일에도 관심을 둘 수 없는 거야. 무감각한 상태인 거지.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니까 말야. 기분이 더 나아지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는 거야. 왜냐하면 당신이 아무런 가치도 갖고 있지 못하다면—”그럼 당신 일은 어쩌구?” 그녀의 어조가 그를 후려쳤다. 그는 눈을 껌벅거렸다. “당신의 말이야.”

 

 

릭은 자신의 고통을 아내에게 토로하지만 아내는 냉정하게 말한다. “그건 당신의 일일 뿐이야.”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릭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안드로이드들이 주인을 죽였다는 것, 거기서 유추할 수 있듯 그들이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릭이 현상금 사냥꾼으로 자신의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할 것이 바로 감정이입의 능력을 축소시키거나 감정이입의 대상을 한정시키는 것이다. 이 딜레마와 모순은 과연 설명 가능한 것이고 해결 가능한 것일까?

 

그러니 인간형 로봇은 단독형 포식자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했다.

릭은 안드로이드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편을 즐겼다. 그러면 그의 일도 바람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앤디를 퇴역시키는(즉 죽이는) 일은 머서가 내놓은 생명의 법칙을 위배하는 일이 아니었다. 너희는 오로지 살해자만을 살해할지니라. 머서는 감정이입 장치들이 지구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바로 그해 그들에게 말했다. 머서교가 점차 완전한 신학으로 발전함에 따라 살해자들에 대한 개념 역시 은근히 자라나게 되었다. 머서교에서 절대 악이란 저 비틀거리며 위로 올라가는 노인의 누더기 망토를 뒤로 잡아당기는 존재였지만, 그 사악한 현존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는 결코 분명하지가 않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머서교 추종자는 자기가 들어맞는다고 생각한 곳 어디에서나 살해자의 모호한 현존을 마음껏 찾아낼 수가 있었다. 릭 데카드의 입장에서는 도주한 인간형 로봇이 딱 그러했다. 그런 로봇은 주인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장착하고, 동물에 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으며, 다른 생명체의 성공에 대한 감정이입의 기쁨이라든지 또는 패배에서 비롯된 감정이입의 슬픔을 느끼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살해자의 전형이었다.

 

 

더 이상 가치에 무감각해진 릭은 윌버 머서 (최후 종말 대전 이후 세계의 신 같은 존재)에게 이에 대해 질문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구원이라곤 없어.라고 말한다.

 

릭이 말했다. “왜 제가 그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차라리 그 일을 그만두고 이민을 가겠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어디로 가든지 자네는 잘못을 행할 수밖에 없을 걸세. 그것이야말로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니까. 즉 자네는 자신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은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야. 그것은 궁극의 어둠이고, 창조의 패배지. 이것이야말로 저주의 작용이라네. 모든 생명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저주지. 우주 어디에서나 마찬가지고.”

 

 

하루 동안 여섯 대의 안드로이드를 퇴역시킨 기록을 세운 릭은 일을 끝내고 집으로 향한다. 안드로이드들을 죽이고 받은 현상금으로 전기양이 아닌 진짜염소도 구입한다. 그는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충분한 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릭의 마지막 독백은 다음과 같이 쓸쓸하다.

 

반드시 필요한 것 치고는 참으로 지독한 직업이야.” 릭은 생각했다. 나는 천벌이야. 가뭄이나 흑사병처럼.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 작품이 미래의 어느 시점을 소재로 한 SF가 아니라 바로 현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대개의 좋은 SF 작품들이 그러하듯 필립 K. 딕의『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든 질문은 매우 구체적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잠정적으로 그가 내린 결론은 뭉크의 그림들이다.

죽음은 확실해도 인생은 불확실한 것이고, 산다는 것은 매우 지독한 것이라는 점. 인간은 그 왜곡된 세계에서 끊임없이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느끼며 회의하는 존재라는 점 말이다.  

 

certa, viata incerta.



[i]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것인 특수인 이지도어의 존재이다. 지능이 낮아 화성 이민도 갈 수 없는 특수인이지만 이지도어는 현상금 사냥꾼으로 안드로이드를 죽이는 릭에 비해 훨씬 휴머니즘적 인간에 가까운 건 존재이다. 이지도어는 비록 지능은 낮지만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릭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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