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여행을 기억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텐데, 그 중에 하나는 기념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기념품은 그 지역의 특징을 살린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건 조금 식상하달까 진부하고,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산다. 부피도 작고 가볍지만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들. 예를 들어 티 코스터나 냄비받침 같은 것들.

그러면 그 물건을 볼 때마다 그 물건을 사온 여행지가 생각나니깐, 여행을 기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원칙이 적용되는 건데, 여행지에서 꼭 사오는 것 중 하나는 책이다.

그 지역의 특색 있는 서점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가보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있다면 반드시 산다. 사인본이라면 당연히 무조건 산다.

어떤 책을 보면 '이건 어느 여행에서 구입한 거지.'가 저절로 떠오를만큼 꽤 많은 책들을 여행지에서 산다.

 

 

LA에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리는 곳들이 있다. 내가 살던 동네의 서점들이다. 그 서점들엔 추억들이 너무 많으니깐. 특히 엄마 돌아가시고 힘들 때, 그래서 내가 마음 둘 곳 없어 힘들 때, 나를 말없이 위로해줬던 곳들이 서점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참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알라딘 서점.

정직하게 말하자면 알라딘 서점이 있는 쇼핑몰은 내가 기피하는 모든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다.

상습 정체 구역인데다 주차장 입구와 출구가 좁아서 빌딩에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일이다. 심지어 주차장도 좁고 길고 구불구불해서 위헙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알라딘 서점은 3층에 있는데, 아주 짧은 구간이기는 하지만 구름다리도 건너야 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에겐 공포스러운 일이다.

 

이런 모든 악조건을 견디고도 거길 가는 이유는 거기에 서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책을 파는 서점.

 

뭐랄까. 국적 항공기를 타면 비행기를 탄 순간 마치 한국에 와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한국책이 있는 공간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외국 생활이라는 게 본인이 느끼든 그렇지 않든 긴장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한국책이 있는 장소가 가는 순간,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안전하단 느낌이 드는 거다. 안정감 같은 것.

 

이번에 갔을 땐 인형처럼 예쁜 여자 아이가 아빠 손을 붙잡고 와서 책을 고르고 있다.

주로 뽀로로 같은 책들이다.

아빠가 "너는 이제 이런 책을 읽기엔 많이 큰 게 아닐까?" 하니깐

아이가 활짝 웃으며 "그래도 사고 싶어요."하고 웃는다.

아빠는 그 순간 무장해제. 모든 아빠들은 딸 바보다.

아빠는 무조건 내 편이라고 믿는 아이의 그 믿음이 참 예쁘다.

보기 좋은 부녀다.

아빠 손 잡고 서점에 오는 것만큼 좋은 추억이 있을까?

아이는 평생을 갈 좋은 습관을 갖게 될 것이다.

 

 

근래에 나온 신간들 위주로 책들을 살펴본다.

모니터로만 봤던 책들의 실물을 직접 보게 될 때의 그 기쁨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책의 물질성, 혹은 책의 육체성이라는 말로는 절대 설명 불가능한 것.

직접 만질 수 있다는 것의 축복은, 그리운 사람이 있어본 사람은 누구가 공감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인문서적이랑 예술서랑 소설들을 가볍게 쭉 살펴본 후 시집 코너로 갔다.

1년 사이 책장들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었는지, 내 기억과는 달리 조금 헤매기는 했지만, 이내 시집들을 찾아냈다.

 

반갑고도 그리운 책들.

 

나한테 없는 시집들을 고르다 이렇게 두 권을 구입했다.

 

장석원 시인은 한 때 참 좋아했는데, 내가 꼼꼼히 안 챙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 들어 통 시집을 출간하지 않는다 했는데, 그 사이 이런 시집을 출간했다. 그런데 사실 이 시집도 2016년 7월에 나온 거니 1년 이상 지난 셈이다.

'파란'이란 생소한 출판사에서 나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느 시인이나 문인이 직접 차린 출판사가 아닐까 싶다.

출판사 이름답게 표지도 온통 파랗다.

196쪽 분량의 시집이라니, 요즘 나오는 웬만한 경장편 소설 분량이다.

 

시인의 말을 읽는다.

 

주체였다면 우리 저항했을까

살아 있었다면 우리 사랑했을까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라

어두운 찬양 속으로 귀의한 것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죄로 진입합니다

 

등불을 들고

저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안고 용서를 빌고

그가 육체 속에 작은 열꽃을 피울 때까지 나는 기어가야 하리

우리가 정치 때문에 윤리를 소거시켰던 것처럼

절망이 확신이 되는 변곡점을 지나간다

 

 

아직 시들을 읽기 전이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하는 시인의 말이다.

곧 11월인데 좋아하는 시인의 시들을, 오랜만에 읽어야겠다.

 

참고로... 남편이 책날개를 보더니 "69년생이 교수라니."한다.

"여보, 당신 나이를 생각해봐. 69년생이 교수라니가 아니라 69년생 교수라면 조만간 은퇴할 나이인 거야."

사람들은 자기도 나이를 먹는다는 걸 자꾸 까먹는다.

 

 

800권이 넘는 시집을 갖고 있으니, 시집은 꽤 많이 읽은 편인데, 류근 시인의 시집은 한 권도 없었다.

계간지 등에서 한 편, 한 편 따로 읽은 적은 있지만, 시집으로 엮어 나온 시들을 읽은 적은 없다.

검색해보니 문지에서 『상처적 체질』이란 시집을 처음 출간했고 이게 두번째 시집이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고, 18년만에 첫 시집을 냈다면, 이번 시집은 첫 시집을 내고 6년만에 나온 거라고 한다. 이 시집 역시 장석원의 시집처럼 작년에 출간됐다.

 

이런 시인의 이력이나 『상처적 체질』이나 『어떻게든 이별』이라는 시집들의 제목을 보면, 시인의 성향이랄지 시 세계를 어느 정도 짐작하거나 가늠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새롭게 '발견'한 시인의 첫 시집이 인연이 되면 좋겠다.

 

이 시집 역시 시인의 말을 읽어본다.

 

당신 만나서 불행했습니다.

남김없이 불행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이 불행한 세상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어서 행복했고

사랑하는 사람

당신이어서 불행했습니다.

 

우린 서로 비껴가는 별이어야 했지만

저녁 물빛에 흔딜린 시간이 너무 깊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서로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단 한 개의 손이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꽃이 피었고

할 말을 마치기에 그 하루는 나빴습니다.

 

결별의 말을 남길 수 있어 행복합니다.

당신 만나서 참으로 남김없이 불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당신', 그러니깐 시인의 헤어진 연인이 '시'처럼 느껴지는 걸까?

 

그나저나... 이번 여행은 Geoff McFetridge의 일러스트로 만든 뉴요커의 리미티드 에코백과 함께 했는데, 이렇게 '실물 영접'한 에코백과 '실물 영접'한 시집들을 함께 찍어 놓고 보니, 이 역시 이번 여행의 추억이 될 것 같다.

여행을 기념하는 '아름다운' 방법! ^^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