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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뚫는 자는 흥한다.’
몽골의 명장(名將) 투뉴쿠크의 비문(碑文)에 쓰인 글귀다. 하나의 영역에만 묶여 있지 말고 외부와 소통하고 교류해야 한다는 의미로 인용되곤 한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혁신방법론과도 맥을 같이한다.

우리나라는 포스트 코로나, 공급망 변화에 따른 신(新)냉전주의, 탄소중립 이행 등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산적해 있다. 여기에 가중된 대외경제의 불확실성은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에서도 과학기술 분야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왔다. 우리나라는 세계 5위 연구개발(R&D) 투자국으로 국내총생산(GDP)의 5%에 해당하는 예산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고 있다. 2019년 이후에는 기업 지원 예산이 출연 연구원과 대학을 크게 앞지르는 등 시장과 산업 중심의 투자가 강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 투자가 시장에 적기에 지원돼 성과를 창출하는 데 일조하는지는 의문이다. 2019년 특허청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가 지원하는 R&D 예산의 10억 원당 특허 생산성은 1.5건으로 미국 공공연구소 0.53건, 일본 대학 0.33건보다 적게는 3배, 많게는 5배 가까이 높다. 반면 정부 R&D 전체 우수 특허 비율은 3.3%에 불과하다.

정부는 질적 성과 창출을 장려하기 위해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을 통해 행정 간소화와 연구 몰입 환경 조성에 노력하고 있다. 부처별로 흩어져 있는 법과 제도를 일원화해 행정 편의를 개선하고 성과관리 중심의 거버넌스 체계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53%는 혁신법 제정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간소화된 규정으로 인해 자칫 감사 지적 등 제재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보이고 있다. 기업의 R&D 행정관리 역량이 대학과 출연 연구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데서 발생하는 우려다.

새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데이터 기반의 디지털 플랫폼 정부’는 이런 기업의 입장에서 참으로 필요한 접근이다. 지금까지 제도 간소화와 예산 확대라는 ‘성(城)’을 쌓는 데 주력해 왔다면 이제는 기업이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혁신해 나가도록 ‘길’을 내줘야 한다.

정부가 보유한 다양한 기술 정보를 기업이 손쉽게 이용하도록 제공하고 함께 협력하는 길을 ‘디지털 플랫폼 정부’가 열어 준다면 인적 및 물적 네트워크가 부족한 기업이 기술적 외연을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아가 대학과 출연 연구원의 기술 이전과 투자자를 찾을 수 있는 복선화 노력도 병행된다면 성과의 질적 개선도 함께 이뤄질 것이다.

작년 국가 R&D 규모가 민간 부문을 합쳐 100조 원을 돌파했다. 정부 투자보다 민간이 스스로 투자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 기업이 각고의 노력으로 탄생시킨 기술이 시장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정부가 ‘성’을 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데이터를 통해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는 ‘길’을 뚫어주는 일도 중요하다.

 

(22.4.20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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