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와 냉전을 통해 그들이 해체된 이후 전 세계를 홀로 지배하던 이 제국은 최근 인구와 광대한 땅과 자원을 배경으로 치고 올라오는 중국과 G2로 불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강의 경제력, 국방력, 그리고 Soft Power를 자랑하는 강국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버지니아호를 통해 미국 대륙에 첫발을 내딛은 뒤 많은 청교도인들이 영국의 박해를 피해 이 땅에 정착해서 살아가면서 시민사회를 만들어 갔다.
책은 하노버 왕가(영국이지만 그들은 독일인 조상을 두고 있었다. 실제 이들을 통해 영어를 못하는 영국 왕 등 많은 일화를 바탕으로 영화나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출신의 조지 1세부터 시작한다. 1714년 영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영국은 독일 북서부의 하노버 왕국을 떠안게 되었고 외교 문제가 계속 발생했다.
영국에서 모든 정부는 왕의 정부였다. 교구의 가장 낮은 관리에서부터 총리에 이르기까지, 행정업무는 모두 왕의 이름으로 수행되었고, 행정은 정교하지만 효율적이지 못한 정부구조로 제도화되어 있었다.
18세기 모든 영국 왕은 의회제도를 받아들였고, 그 제도 내에서 의욕적으로 일했다. 조지 3세는 "법에 의해 확정된 영국 헌정체제의 아름다움, 탁월함, 완벽함"에 대한 "열광"을 진술한 적이 있다. 조지 2세까지는 독일의 하노버에서 태어나 이주한 왕이었으나, 그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왕위에 오르기 충분치 않았으나 왕위에 오르게 된다.
1760년 2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조지 3세는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파당 정치를 바꾸어 놓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영국은 여러모로 발전하고 있었으나, 유럽 대륙에서 볼 때는 아직 많이 미숙한 나라였고 세계 식민지 역시 아직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은 그들의 소유였다. 프랑스와 지금의 캐나다 국경에서 국지전적인 상황은 많았지만 미국 동부 영토를 개척하면서 식민지로 하고 있었다.
영국이 해상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세계로 식민지 건설을 통해 국력을 자랑하던 18세기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의 행정체제와 경직된 정치사상에 구애받지는 않고 있었다.
물론, 식민지는 영국의 국왕에 충성해야만 했고,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식민지에서의 생활은 모국에서와 달랐으므로 그들은 영국과의 먼 거리, 느린 의사소통(당시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비교적 느슨한 '정치적 유대'가 가능한 정도였다.
이는 훗날 미 3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미국 민주주의 초석이 된 독립선언서에서 영국과의 정치적 유대는 느슨하디고 표현했다. 아메리카인은 이미 1776년 이전에 거의 완벽한 자치 행정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 혁명 당시에 영국 식민지에 닥쳐온 위기는 국가제도와 관련된 문제였다. 인간은 어떻게 통치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즉 아메리카인의 표현대로 하지면 그들은 자유인으로서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1764년에서 1783년 사이에 대영제국을 강타한 미국 혁명은 아메리카인에게 거의 모든 계급과 신분에 걸처셔 일정한 도덕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18세기 중반까지 기본적인 단합의 틀을 갖추지 못했고 단합 의사도 없었다. 지역주의에 깊이 빠져 있던 각 식민지는 나름의 제도를 고수하면서 대서양 건너 영국에 의지했다.
사실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는 다른 세계 곳곳의 식민지처럼 금이나 은이 많지도, 향료도 없었다. 국가 정부 재정 측면에서 그렇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기에 개인들에 의한 개척이 많았고, 정부의 느슨한 체제 하에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창업주인 윌리엄 펜이 그렇다. 펜은 유럽의 박해받는사람들을 자신의 식민지에 끌어오고 싶어했다.
윌리엄 펜은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 델라웨어 강 서안에 대한 지배권을 허락받고 그 땅을 펜실베이니아 라틴어로 '펜의 숲속 나라'로 명명했다.
미국 혁명 이전의 18세기에 적어도 10만 명의 독일인이 아메리카로 흘러들어 왔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인처럼 서부에 정착한 뒤 꾸준히 독일인의 인구가 늘었다. 1775년 펜실베이니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한다. 나는 영국인이나 아일랜드인이 미국 이주민의 중심이라고 알았는데 독일인도 꽤 많이 차지했던 것을 알았다.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한 이민자들은 부지불식간에 아메리카 사회의 영국 성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 인구의 성장에도 기여했다.
1700년에 13개 식민지 인구가 25만명 정도였는데 미국 독립 당시 이 인구는 250만 명으로, 과거보다 적어도 10배 이상 늘어났다. 지금도 예전에도 인구는 국력을 증진시킨다.
식민지의 인구 증가와 함꼐 식민지 경제는 고르지는 않았지만 완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온갖 종류의 무역도 계속 성행했다. 담배 수출이 매우 많았고, 빵, 고기, 곡류, 생선 그 외에 다양한 제품의 수출이 18세기 들어와 큰 폭으로 늘어났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아메리카 사회는 계급으로 계층화하는 경향도 보였다. 상류계급은 부와 생활양식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서서히 구분하기 시작했고, 많은 땅을 가진 지주들은 스스로를 남과 구분했다. 소수는 수십만 에이커의 땅을 소유했다.
펜실베이니아의 펜가문, 캐롤라이나 식민지의 창설자인 카터렛 가문, 메릴랜드 식민지 창설자인 캘버트 가문 등이 수백만 에이커의 땅을 소유했다.
또한 식민지 미국사회에 여러 당파들이 생겨나서 정치적인 대립도 만들어졌다. 그 중에 신앙의 각성을 통해 미국 사회에는 다시 한 번 사회 기강을 재정비 하는데 17세기 종교적 전통의 후에였던 이들이 바로 미국 혁명을 만든 세대가 되었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그리고 이들을 따라 미국 혁명에 가담한 많은 사람은 단지 종교적 열정으로 행동에 돌입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모두 열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도덕적 기질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혁명은 서시히 안과 밖에서 장전되어 태동되기 시작한다.
영국 정부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무역을 단속하고 식민지의 안전을 확보하기 이해 상비군을 두기로 결정했다. 또한 지속적인 적자로 골머리를 앓던 그랜빌 내각은 설탕법을 앞세워 식민지에 과세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반발한 아메리카인들은 상인들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해고, 소규모 폭력 행위로부터 공무 집행 방해, 의회 청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영국의 조지 그랜빌 총리는 인지세법 등 식민지 과세 정책을 주도해 아메리카 식민지와 갈등을 빚었다.
그런 와중에 아메리카인들은 서부로 서부로 계속 이주하기 시작한다. 원래 오하이오 강은 아메리카 정착민과 인디언 영토 사이의 경계였다. 오하이오 회사는 이곳의 토지권이를 이민자들에게 되팔아 수익을 올리려 하면서 인디언과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그랜빌 내각은 영국의 재정문제를 위해 식민지를 재정 수단으로 보고 각종 세법을 강화한다.
이 때 벤저민 프랭클린(1706 ~ 1790)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미국의 발명가이자 사업가이자 정치가인 프랭클린은 설탕법과 인지세법 등에 반대하여 아메리카 식민지 이익을 위해 런던으로 건너가 교섭을 벌였다.
"동의 없는 비자발적 세금에서 면제되는 것은 모든 자유국가의 대원칙이 되어야 한다. 다른 모든 권리를 제외하더라도 이런 권리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자유, 행복, 안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세 개념은 재산의 개념과 불가분의 것인데, 남이 그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개인의 고유 재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인류의 자명한 자연권이다."
---p.147
인지세법과 설탕법에 반대해 미국 곳곳에서 폭동과 집단 행동이 나타난다.
폭동이 일어난 보스턴 이외 각지에서도 인지세법에 반대해 논쟁이 펼쳐졌고, 인지 분배관들을 향한 협박 등 대중의 폭력적 저항도 펼쳐졌다. 조세저항이 식민지 전역으로 퍼졌다.
아메리카인들에게 재산과 자유는 밀접한 관계는 지니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에 대한 침해를 자유의 침해로 받아들여 특히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영국 국왕과 의회의 권위를 존중하는 영국 신민이었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은 부패한 영국의 고관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러한 공포가 언제든 폭발적인 민중행동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인지세법을 둘러싸고 동요가 시작되었을 당시, 아메리카의 지도자들은 식민지를 포함하는 국가 제도라는 개념을 체계적이거나 일관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영국 의회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정치체제라는 거창한 말이 무슨 뜻인지도 생각해 보지도 않은 식민지 예속 상태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체제에 대한 입장은 제임스 오티스의 간결한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의회의 권한은 의회 자신에 의해서만 통제 가능하고, 우리는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
이는 <영국 식민지들의 권리 주장과 증명>이라는 소책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영국에서는 상인들이 의회에 인지세법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넣었고, 로킹엄 후작이 이끄는 영국의회는 1766년 3월 이 법안을 철회했다.
인지세법의 폐지에 아메리카인들은 기뻐했지만 영국인들에 대한 불신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인지세법 폐지의 여파로 메사추세츠와 코네티컷을 비롯한 식민지들에서는 정치 권력의 변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여전히 아메리카에 대한 과세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채텀 내각에서 주도권을 쥔 찰트 톤젠드는 이후 영국과 아메리카에 영향을 미칠 법안들을 밀어붙이는데 성공했다.
이런 톤젠드 법에 식민지 인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즉각적 저항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 새로운 법들 역시 아메리카인들이 중히 여기는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인식이 커졌고, 보스턴 사람들이 이 새로운 싸움을 주도해 갔다.
보스턴에서 버나드 총독과 세관 위원들에 맞서 제임스 오티스와 새뮤얼 애덤스 같은 정치인들은 의회에서, 그리고 나머지 시민들은 거리에서 저항했다.
이러한 저항에 영국군은 보스턴 주둔을 결정한다.
이러한 보스턴에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갔다. 아메리카인들은 영국 수입품 소비 거부 운동 등으로 영국 정책에 저항했고, 영국의 세관 관료들은 더욱 더 아메리카에 대한 세금 수입을 강화했다. 이들을 아메리카 인들은 '기생충'이라 부르며 경멸하고 저항했다.
그런 과정에서 결국 영국군과 보스턴 시민 사이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했고, 1권은 보스턴 학살로 마무리 된다. 보스턴 부두 노동자들과 영국 주둔군 사이에 시작된 사소한 시비가 11명이 죽고 다치는 커다란 유혈 사태로 번졌다.
이 학살로 인해 아메리카인들은 영국의 권력이 아메리카에 무슨 짓을 벌이고 있고 그 권력의 정당성과 적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다수의 아메리카 인들이 자신들의 동포와 국왕과 영국 의회를 위해 그 문제를 명확하게 밝히려고 시도했다.
견제받지 않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권력은 보스턴의 자유와 목숨을 파괴했다. 영국 총리 윌리엄 피트는 의회에서 아메리카인들이 영국의 자식이지 사생아가 아니라고 했으나 아메리카인들은 그들이 영국의 서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들은 아메리카의 적자였다.
이 책은 <옥스퍼드 미국사> 시리즈의 첫번째로 1982년 초판이 출간됐고, 2005년 개정판이 나왔다. 이 책은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미들코프의 책 이외에 제임스 맥퍼슨, 제임스 패터슨 등이 쓴 다양한 시리즈가 있다. 아, 또 내 지갑을 얼마나 털어갈 것인가.
이 책은 12권의 시리즈 중 첫번째 책 <The Glorious Cause>에서는 미국 독립혁명의 과정을 전,중,후의 3단계로 나눠서 각 단계별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민병대들이 대영제국의 정규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는 과정을 보면서 자유와 권리를 지켜내고, 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을 수립하는 과정을 통해 역사의 발전을 살펴보며 오늘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과 미국인의 시작을 깊이있게 볼 수 있다.
나는 아직 완독은 못했지만 강준만 교수님의 <미국사 산책>을 읽었는데 이 책과 비교하면서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다른 미국사 서적과 비교하면서 읽었다.
<미국인 이야기> 2권은 미국 독립전쟁을 다루고 있다. 미국 건국이 1776년인데 1770년부터 1780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옥스퍼드 미국사 시리즈는 미국 건국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 전반을 소개하는 책으로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작을 보여준다.
원제는 「The Glorious Cause: The American Revolution 1763~1789」로 대영제국의 변방 식민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 중 하나인 신대륙의 주인으로 미국인의 탄생과 건국까지 그들의 험난하면서도 의미깊었던 역사를 다루고 있다.
2권은 아메리카의 저항이 본격화 되면서 처음에는 반란으로 시작했지만 이것이 전쟁으로 번지는 과정과, 아메리카 의용군과 정규 영국군의 전투를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의 정예군이었지만 의병 집단인 아메리카군에게 고전한다.
저자는 영국인의 전쟁은 '앙시앙 레짐', 즉 구세대의 전쟁으로 사회 최상층인 지도자와 직업군인만이 참여했고, 아메리카인들은 군인과 민간인이 얽혀있는 최초의 근대적 전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메리카의 급조된 군대가 이 전투에서 물러나지 않았던 것은 이 전쟁이 바로 '나를 위한 전쟁', '내가 믿는 위대한 대의의 전쟁'이라고 한다.
사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전쟁의 목적이 불분명한 군대가 절대적으로 열세로 보이지만 의지가 분명한 군대에게 왜 고전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영국의 노스 내각이 들어서면서 톤젠드 법안이 철회되고, 식민지 상인들이 수입 거부 운동을 끝내면서 식민지 문제는 다소 잠잠해진 듯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영국이 총독과 주교제를 앞세워 자신들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밀무역과 세관 징수관을 둘러싼 갈등 역시 해소되지 않은 채 식민지인들은 보스턴을 중심으로 통신위원회라는 연락망을 구축해 조직적인 대응에 나선다.
영국의회는 1773년에 차세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어려움에 빠진 동인도회사를 구제하기 위한 법이었다. 식민지에서 차를 거래하는 독점권을 부여했다.
식민지인들은 차세법을 자신들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영국인의 음로로 받아들였고, 분노한 민중은 보스턴 앞 바다에 차 상자를 던져 버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용납할 수 없었던 영국 의회는 한 발 더 나간 제재 조치인 참을 수 없는 법을 통과시켰다.
식민지에서는 전면적인 수입 거부 운동이 번져나갔고, 식민지 대표들은 대륙회의에 모여 권리선을 발표하고 좀 더 체계적이고 강제력이 있는 저항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보스톤 항구법은 아메리카인들이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이라고 부른 5대 악법 가운데 첫번째였다. 두 번째와 세번째 법은 메사추세츠 규제법과, 정의이 불편 부당한 시행법인데, 첫 번째보다 더 큰 반대와 활발한 토론이 있었으나 두 건 모두 엄청난 과반수로 통과됐다.
대륙회의는 아메리카에 존재했던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나왔던 생활 방식으로 아메리카인에게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이라는 새로운 도전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1차 대륙회의 이후에도 아메리카인들은 영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국력을 보여주는 나라였기 떄문이다.
식민지의 각 도시에 설치된 지역위원회들은 지방정부를 대신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하면서 점차 대륙협회의 뜻을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내각은 이와 같은 아메리카인들의 반란을 진입하라는 명령을 게이지 장군에게 내렸고,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아메리카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첫 교전이 발생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렉싱턴 전투소식은 식민지 전역으로 퍼졌고 다른 곳에서도 전투가 시작됐다. 식민지인들은 제 2차 대륙회의를 열어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선출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섰다.
훈련된 군대인 영국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벙커힐을 점령했으나 이제는 한 번의 승리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 없게 되었다. 워싱턴은 영국 정규군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었지만 민병대를 강한 군대로 만드른 일에 돌입했다. 비록 퀘벡 원정에 나서 실패를 맛보았지만 보스턴에서는 결국 승리를 거뒀다.
전쟁중에도 아메리카인들은 여전히 독립선언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화해를 원하지 않는 영국의 태도가 아메리카인들을 독립하게 만들었다. 각 식민지는 영국과 관계를 끊고 자치를 시작했고, 1776년 7월 4일 식민지들은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건국기념일이다. 토머스 제퍼슨의 주도로 작성된 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담대한 선언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 선언이 흑인 노예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전쟁이 있었고 워싱턴은 군인보다는 일반인에 가까운 아메리카군의 능력을 불신했다. 우수한 전력의 영국군은 요새들에서 워싱턴을 몰아냈으나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워싱턴은 식민지인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1776년 12월 크리스마스에 모험적인 트랜턴 공격을 감행했고, 이 기습을 성공시키면서 전황을 역전시킬 발판을 마련했다.
겨울이 되면서 전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다시 공격을 시작하지만 공방전 속에서 영국군은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아메리카군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그들이 재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사실 이 책 2권은 재미있는 전쟁사 같은 성격이라 읽다보면 아메리카군과 영국군의 다양한 전투 방법과 전략 등이 나와서 재미있게 읽힌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관계가 불안정해지자 유럽의 판도도 함께 요동치기 시작하낟. 영국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프랑스와 스페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영국이 가지고 있던 세계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아메리카는 비밀리에 접촉했다. 아메리카와 프랑스가 손을 잡으면서 '위대한 대의'를 위한 아메리카 혁명의 불꽃은 이미 유럽의 정세를 뒤바꿀 거대한 전쟁으로 바뀐다.
2권의 마지막까지 아메리카와 영국의 전쟁으로 마무리한다. 찰스턴에서의 공성전과 캠던 전투에서 두 차례 결정적인 승리를 얻은 영국국은 남부지역을 발판삼아 반격의 기회를 노린다.
2권의 제목은 자율이 강제를 이긴다! 이다. 아메라카인은 자유를 위해 억압하는 영국군과 전쟁한다. 아메리카 병사들이 결국 승리하는 것은 영국군과 달리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대의’를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인 이야기> 3권은 전쟁 이후 헌법 제정 과정과 건국의 진통을 다루고 있다. 어느 나라던지 헌법의 제정은 치열한 논쟁과 타협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국은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얻은 미국인들의 자신감이 반영된 법적 원칙과 왕정이 아닌 공화정의 탄생을 야기한 정치가, 사상가들의 협업과 논쟁, 적정선의 타협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강력한 연방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연방정부파와, 중앙정부의 권력이 주 정부를 지배하게 될까 우려하는 반연방정부파가 대립했고, 나아가 선거 방식, 선거인의 정의 등을 놓고도 주 정부들은 치열한 이권 다툼을 벌였다.
많은 갈등 속에서도 결국에는 미국을 하나로 묶는 연방정부가 유지 되어야 한다고 타협한 끝에, 모두의 차선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헌법을 비준하고 건국에 이르게 된다.
미들코프는 건국 과정에서 쟁점이 된 노예제 폐지,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의 갈등, 각 주 정부 간의 갈등, 삼권 분립을 둘러싼 갈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이런 갈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이다.
아메리카 남부에 대한 영국의 기대가 결국 환상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영국은 남부에서 치러진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영국군은 타지에서 굶주림이 만연했고, 넓은 대륙에서 정보는 틀리거나 늦었다.
대륙군과 영국군의 대립에서 결국 영국군들이 점점 지쳐갔다.
독립전쟁에서 당시 영국군보다 전쟁의 기술이나 전략, 체계 등이 없던 아메리카 군대 병사들을 전열에서 도망치지 않게 한 요인은 무엇이었는지, 보급과 병참, 의료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졌고, 바다에서는 어떤 일어났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위에서부터의 통제를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징집병, 보급감, 의사, 사락선의 선원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전쟁에 참여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대륙군의 승리에 기여하게 만들었다.
특히 300여 년전 전쟁을 치르면서 가장 문제된 것은 불결한 환경과 병으로부터 군대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양측 다 군대를 유지하고 통솔함에 있어 이런 부분은 문제가 됐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농촌에 살았던 민간인들은 군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위대한 대의'를 추구했다. 특히 여성들은 외로움과 불안감을 견뎌내면서 전쟁에 나선 남성들을 대신해 가정의 일상을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여성의 역할을 돌아봤다는 데서 이 책의 의의가 있다.
영국군은 렉싱턴 전투 이후 보스턴의 건물들을 불태웠다. 영국 신문조차도 영국군의 잔인한 처사를 만평으로 그려 비판했다.
아메리카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과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상시와 다른 삶을 살아갔지만 전쟁과 완전히 멀어져서 살 수는 없었다.
1781년, 독립전쟁은 종국으로 치닫는다. 아메리카 인들은 요크타운에서 콘 월리스 장군이 이끄는 7,000여 명의 병력을 포위했고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미 합중국과 영국, 프랑스와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강화회담에 나섰다.
결국 1782년 11월 파리에서 주요 내용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위대한 대의'에 의해 아메리카 인들은 세계 최강 중 하나였던 영국군으로부터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후 조정 작업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군사권, 영토권, 재정권 등을 두고 논쟁이 있었다. 혁명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은 샐운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여론 역시 정치체제 개혁을 지지하면서 헌법 제정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1780년대는 중앙정부에 충분한 권한을 부여하려는 움직임과 중앙집권에 맞서 지방의 권력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충돌한 시기였다. 연합 헌장의 작성과 주 헌법의 비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연합회의가 실효성 있는 중앙정부가 되는데 실패했다는 인식이었다. 무엇보다 아메리카인들은 전제적 권력이 다시 출현하는 것을 경계했고, 미합중국은 강력한 군주제로 둘러싸인 세계정세에서 홀로 분열된 국가로 남게 될 위험에 쳐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에 와서 보면 신의 한수였다.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헌법제정회의가 시작됐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치열한 토론을 거쳐 미국의 뼈대를 만들었다.
본래 이 회의는 10년 전 합의됐던 연합규약을 개정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새로운 형태의 연방정부가 필요하다는데 동의했고, 버지니아 대표단의 주도로 헌법 제정작업이 시작됐다.
특히 정부의 형태를 둘러싼 참석자들의 신념이 자주 부딪혔기 때문에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같은 해 9월 17일 55명의 대표 중 39명이 헌법에 서명하면서 작업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
헌법은 보수적이었지만 공화국의 미덕이 어느 정도 구현되어 있었다. 헌법은 특히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사회와 도덕의 부패를 막고자 했고, 다수의 폭정이라는 새로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연방주의자들과 반연방주의자들의 대립 속에서 연방주의자들이 승리하면서 헌법이 비준됐다.
혁명가들이 남긴 지혜에 부응하기 위해 미국인들은 계속해서 그들이 남긴 숙제를 풀어갈 것이다.
* 예스 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