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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도서] 아무튼, 술

김혼비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아무튼 술. 김혼비

나는 술을 잘 못 마신다. 술이 약하다. 강한 술이 건 약한 술이건 그냥 나에게는 알코올일 뿐이다.
‘내가 술까지 잘 먹었으면 아마 감옥에 있을 거야. 아님 희대의 스캔들을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이 외모에, 이 말발에 술까지 잘 먹어봐. 감당이 되겠냐고.’
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과 작은 위로를 한다.

가끔 반주로 너끈하게 소주 한 병을 해치우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집에 늦게 돌아오는 길에 포장마차에 앉아 말없이 술을 마시고 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에겐 영화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첫 술, 술과 소리, 술 마시는 원칙, 인생을 결정한 술, 주사
술자리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적혀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나처럼 술을 못마시는 사람에게도 재미있는 책일 것 같다.

축소가 꼭 확장의 반대말만은 아닌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되었다. 때로는 한 세계의 축소가 다른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확장이 돌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축소해야 할 세계와 대비를 이뤄 확장해야 할 세계가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게는 ‘모자란 한 잔’ 보다 ‘모자란 하루’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든지, 그래서 모자란 한 잔을 얻기 위해 쓸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모자란 하루들을 늘여가는 데 잘 쓰게 되었다든지, 같은 여러 가능성. 아니 뭐 그렇게 안이어지면 또 어떤가.

야 그 정도면 됐어, 사실 욕이란 게 연습한다고 늘겠냐, 술 마신다고 늘겠냐, 그냥 사는게 씨발스러우면 돼, 그러면 저절로 잘돼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밖에 없다. 앞으로도 퇴근길 마다 뻗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암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맥주는 소주와 달리 목으로 바로 들이붓기 어렵다는 벽에 부딪혔지만, 적벽에 부닺힌 제갈공명이 바람의 방향을 바꿨 듯이 나는 빨대를 사용해서 입 속으로 들어오는 술의 방향을 치료 부위 반대편을 흘려 넣는 것으로 위기를 넘기기까지 했다.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가지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집안 구석 어딘가에 묻어있는 무방비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면모, 이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 매일매일 실존적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관계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흔적을 봐 버리면 필요 이상의 사적인 감정과 알 수 없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 곤란하다. 게다가 집은 대개 말이 많다. 모든 사물들이 집주인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걸 내내 듣다 나오는 건 제법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묵직한 병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울림이 수시로 교차하며 시간에 어떤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무한하게 이어지는 수많은 술병들의 울림을 커다란 배 안의 커다란 술 진열대가 아니라면 어디서 또 들을 수 있을까. 가만히 선 채로 술들의 소리를 한참동안 들으며, 세상에 별이 반짝반짝대는 소리라는 게 있다면 이런 소리일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회식이었다. 아니 장어를 먹는 게 오랜만이었다.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차를 가져갔지만 술을 마실 게 분명했고, 같이 간 사람들과 같이 이동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거의 도착할 무렵 택시기사 아저씨가 놀란듯이 말씀하신다.
“어? 오늘 쉬나 보네요! 장모상중이라고 붙여있는데요?”
순간 놀랐다. 가게 앞에 커다랗게 쓰여진 글씨가 살짝 스쳐 지나 갔다.
어? 진짜?
하는 순간 분명이 예약을 하고 왔다는 게 기억났다.
“예약을 하고 왔는데요!”
택시기사분은 “아! 그러셨어요!” 하고 운전대를 돌렸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확인했다.

장.무.상.망. (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

기사 아저씨는 장모상중 (丈母喪中)으로 읽었던 게다. 언뜻 보기에 그리 보였다.
한 글자도 같은 글자는 없었지만 그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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