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도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저/성귀수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이 책의 첫 문장  " 낮은 벼랑 끝에 다다라서야 그는 혼자임을 깨달았다." - 7page

 

19세기 중반. 지리학자 옥타브는 수상한 흰둥이 야만인을 맡아 거두게된다.

나르시스는 섬을 방문한 선원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야만인들 속에서 유난히 흰피부와 머리색깔로 백인임을 의심받고 선원들과 함께 배에 오른다. 하지만 나르시스는 백인의 겉모습만 지녔을 뿐 문명사회의 규칙을 전혀 모르고 말도 못했다. 17년 전의 기억을 모두 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옥타브에 의해서 하나씩 밝혀지는 그의 과거. 그는 17년 전 이미 사망처리된 선원 나르시스 펠티에였다. 18살의 선원이었던 나르시스는 물을 찾으러 갔던 그 섬에서 낙오되어 버려졌고 세상에서 잊혀졌다. 야만인과 함께 살았던 나르시스는 어느새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하며 야만인이 되었다.

 

지리학자 옥타브는 야만인이 되어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나르시스에게 말을 가르치고 문명을 가르치며 그가 겪은 섬에서의 이야기를 하나씩 알아내게 된다. 하지만 나르시스는 자신의 속마음을 전부 꺼내놓지 않았다.

 

왜 나르시스가 그 섬에 남겨질 수 밖에 없었는지, 18살의 소년이 어떻게 문명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야만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만인'이라는 것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느 누가 그들의 생활을 야만이라는 단어로 비약할 수 있는지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두번씩 직접 체험한 흰둥이 야만인 나르시스 펠티에의 생존 실화다!

 

 

 

 

 

"이 고독과 미지의 땅에서 그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죽음은 더이상 낯설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러니 살아야 했다. 살아야만 했다."

 

처음 나르시스가 원주민들을 만났을 때는 미개한 야만인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문명 사회에서 온 사람이고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관계를 가지는 미개한 인간들이라고만 치부했다. 하지만 18살의 나르시스가 외딴 섬에서 홀로 살아남기란 불가능했다. 로빈슨 크루소는 억척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르시스는 그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나르시스는 불도 지피지 못했고 물도 찾지 못했고 먹을 것을 사냥하지도 못했다. 배고픔에 허덕이다 죽기 직전.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원주민 노인이었다. 물을 주고 식량을 주고 추위에 떨때 체온을 녹이게 꼭 안아준 것도 노인이었다. 원주민들이 처음부터 나르시스를 받아들여준 것은 아니었다. 문명사회의 생각을 지우지 못했던 나르시스는 원주민의 생활에 동화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도 점점 지쳐갔고 외로웠다. 그렇게 문명을 고집하며 지내는 사이 그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더이상 선원들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도 없었고 탈출의 희망 또한 버린지 오래다. 목숨을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그가 택한 것은 문명을 버리고 오롯이 그들에게 동화되는 쪽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버려진 채, 날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식인종이나 맹수 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닌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고, 불을 피울 방도도 없다. 허리띠에 찬 단도와 입은 옷이 가진 것 전부다." - 12page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버려졌다면?  무엇보다 혼자라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나르시스의 선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문명인의 눈으로 볼때 원주민들은 야만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 환경에 최적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야만이라 부르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것이다. 얼마 전 봤던 책의 이누이트 원주민 말살정책이 떠오른다. 강대국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원주민들을 쫓아내야 했고 죽이는 방법대신 택한 것이 바로 원주민들의 문화를 말살해 문명에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생각할 수록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하게 다가올 수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구대륙 도착, 침략이라고 배워야하는 것은 아닐지. 새로운 시각으로 그 야만!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나르시스를 관찰하는 지리학자 옥타브는 "대체 그자는 어떤 끔찍한 일들을 껶은 걸까요?"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옥타브가 흰둥이야만인으로 살았던 세월이 끔찍하고 암울한 기억이었을까. 그건 문명인의 잣대로 지켜본 기준이며 모순이 아닐까.

옥타브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이른바 문명인들이 나르시스를 대하는 장면들과 나르시스가 떠올리는 원주민들을 비교해보면 어떤 것이 더 끔찍한 일이었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라고 불리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르시스 펠티에. 그는 문명인 나르시스와 야만인 암글로!

두 삶 중 어떤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그의 대답이 정말 궁금해진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