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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아침드라마 같다'라는 평을 다른 분이 해주셨다는데, 정말 그랬다. 두 집안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그렇다 치고, 할리우드 액션 같은 이 폭발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는 어찌하라는 것인지? 이번 주 분량까지 전체 소설의 절반을 조금 넘었을 뿐인데, 클라이맥스를 백만 번은 지나친 느낌이다.  

3주 차, 12~17장까지. 
이사벨라의 도주와 결혼.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화해와 사랑. 그리고 죽음. 

1.  '사랑'의 모양을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다지만...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나를 찾아오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면서?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아! 견딜 수가 없어! 내 생명인 당신 없이는 못 산단 말이야! 내 영혼인 당신 없이는 난 살 수 없단 말이야! - 274쪽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이상적인 남자들은 무심한 듯 세심하고, 차가운 것 같다가도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는 활활 불타오른다. '나쁜 남자' 캐릭터가 인기를 끈다지만, 만약 <폭풍의 언덕>이 드라마였다면 그 안에서 히스클리프는 절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남자는 아니다. 사랑도 그렇지만 욕망도 숨김없이 드러나고, 거칠기는 이를 데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잠시 의심했다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위해 참고 기다려 주는 것도 아니고, 그 상황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야반도주까지 하다니. 절대 주인공 역할은 될 수 없는 캐릭터다. 같은 맥락으로 캐서린도 여주인공 캐릭터는 아니다.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하기엔 그녀는 사랑보다는 부와 명예를 따랐고, 남편과 애인 모두에게 분노하고 비난하기 일쑤니까. 남이 하면 불륜도 내가 하면 사랑이라고도 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 '사랑'의 모양을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다지만, 이 둘의 사랑은 대체 어느 모양에 끼워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역시 이게 드라마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캐서린의 남편 에드거가 '답답'한 주인공 역할에 어우리려나? 불같은 캐서린과 정 반대로 냉정해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녀가 원하는 데로 하도록 놔두기도 하고, 체면과 걱정에 말다툼과 기싸움을 하기도 하지만 마음은 또 한없이 약해 아픈 캐서린을 보면 다 잊어버린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워낙 활활 타오르다 보니 에드거의 모습이 한없이 소극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서린이 생전에 가족묘가 아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묻어주고, 나중에 당신(에드거)도 죽으면 나와 같이 묻히거나 말거나,라고 한 말에  묘비만 하나 세워둔 썰렁한 묘지에 함께 묻히기로 한 걸 보면 에드거의 사랑이야말로 조금은 더 일반적인 사랑의 모양에 끼워 맞추기 쉬운 사랑이다. 

2. 히스클리프 씨가 인간이야? 
잠깐 타오른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따라갔던 이사벨라의 최후는 그야말로 떠올릴 수 있는 결말 중 가장 최악의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딘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는 이건 코미디인가 싶을 정도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부터는 엘렌에게만 하는 이야기야. 엘렌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어.
첫 번째는, 엘렌은 이 집에 있을 적에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동정심을 잃지 않을 수가 있었지? 주위 사람들이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으니 말이야.
내가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질문은 이거야.
히스클리프 씨가 인간인가 하는 것이야. 만약에 인간이라면 미친 것인지,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귀신인지? 내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말하지 않겠어. 그러나 엘렌이 알고 있다면 대체 내가 결혼한 상대가 무엇인지 설명해 줬으면 해. - 223쪽


그녀가 결혼한 상대는 무엇이었을까? 타오르는 사랑에 인간성을 잃어버린 괴물? 

지난주에 이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다혈질로, 거칠게 만들었나 생각이 들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이야기 어디를 봐도 '평범한'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간신히 끌어낸 답은 '외로움'이었지만, 과연 외로움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다.

내 평생 가장 비참했던 시기엔 나도 캐서린에게 잊혔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작년 여름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도 줄곧 그런 생각을 했지. 하지만 이제는 캐서린 자신이 그렇다고 단언하지 않는 한 다시는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만 됐다 하면 린튼이고 힌들리고 내가 지금까지 꾼 꿈이고, 다 아랑곳없어질 테니까. 나의 장래는 단 두 마디면 족할 거야.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내 삶이란 지옥일 거야. - 243쪽 

거친 환경의 워더링 하이츠. 눈이라도 내리면 순식간에 고립이 되는 그 작은 공간에서 함께 하면 오히려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게 누가 더 외로운지 내기라도 하듯 서로를 밀어내기 바쁘다. 외로움을 이겨내려 사랑을 택하지만, 그 사랑을 잃었을 때를 대비하지 못했던 힌들리의 무너짐. 그 사랑이 사회적 지위나 재산에 밀려 거절당한 기억으로, 다시 확인한 사랑 앞에서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히스클리프. 외로움에 사랑을 쫓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더 외로워진 그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3. 그럼에도 매력적인 캐서린 
그런데 넬리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네. 좀 이상해! 모든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멸시하더라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 뒤에는 모두 돌아서서 적이 되거든. 정말 그렇단 말이야,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싸늘한 얼굴에 둘러싸여 죽는다면 얼마나 쓸쓸하겠어! -200쪽

오, 내 몸이 불덩이 같아! 밖으로 나갔으면, 다시 야만에 가까운, 억세고 자유로운 계집아이가 되어 어떠한 상처를 입더라도 미치거나 하지 않고 깔깔 웃을 수 있었으면! 왜 나는 이렇게 달라졌을까? 왜 조금만 뭐라고 해도 내 피는 끓어오를까? 저 언덕 무성한 히스 속에 한번 뛰어들면 틀림없이 정신이 날 텐데. - 206쪽


머리로 생각하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캐릭터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이라는 캐릭터가 이상하게 끌린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그녀의 모습은, 상황이 이렇게 극적이지 않았다면 당차고 매력적인 여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싶다. 성인이 되고 결혼이라는 관습에 묶여버리긴 했지만 - 심지어 본인이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라면 사회적 관습에도 도전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는 많이 달라서 끌리는 걸까. ㅎㅎ 

4. 인간은 결국 이기적이죠 딘 부인
'아씨는 까무러쳤거나 돌아가신 거야.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된 거지.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짐이 되고 불행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살아 있기보다는 돌아가시는 게 훨씬 낫지.' 저는 생각했어요. - 266쪽

'가엾은 사람 같으니!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은 마음과 신경을 가지고 있었어! 그것을 왜 그렇게 숨기지 못해 안달했을까? 아무리 버텨봐도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할 텐데!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지만 국 하나님의 힘에 못 이겨 굴욕의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군!' 저는 생각했어요. - 273쪽


지난주에 단님이 넬리가 '(비교적) 가장 냉철하고 상식적인 인물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정말 그러고 보니 독자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 분량을 읽으면서, 여전히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 안에서 가장 이기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아침드라마'를 보는 아주머니들처럼, 딘 부인은 주인공들을 걱정하고 그들의 감정의 격하게 동의하지만, 실제 자신이 극 안에 들어가 있는 경우에는 '착한'역할을 떠맡고, '이간질 아닌 이간질'을 시키기도 하고, 초래한 결과에 따라 자신이 한 일을 숨기기도 한다. 이 역할은 그러니까, 극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이지만, 딘 부인처럼 자신이 극 안의 인물인 경우에는 오히려 가장 이기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국 이기적인 동물이긴 하지만... 

... 


"내가 싫어하는 것은 결국 이 부서진 감옥 같은 육신이야. 이런 육신 속에 갇혀 있는 것에 지칠 대로 지쳤어. 나는 한시바삐 저 영광스러운 세계로 피해 가서 항상 거기에 있고 싶어. - 261쪽

이제 고작 절반이 조금 넘어갔을 뿐인데,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벌써 끝 아닌 끝을 맺어버렸다. 캐서린이 죽고, 힌들리가 죽고, 에드거도, 이사벨라도 죽어버렸다. 

죽은 사람보다, 남은 사람이 제일 힘들다는 말을, 히스클리프가 몸소 보여준다. 
마음껏 가여워하지도 못하게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는 히스클리프. 캐서린 없는 세상을 그가 어떻게 견뎌낼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저/김종길 역
민음사 | 2005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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