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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이사를 했다. 벼르고 벼르던 책방을 하나 만들어 책장을 들였다. 위 절반은 유리창, 아래 절반은 판낼로 가려진 책장이다. 이삿짐을 풀고 책을 책장에 꽂아 넣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나는 '살인',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장르 소설은 외부에서 안 보이는 아래 칸에, 세계문학이나 그 외 수상작은 위 칸에 꽂았다. 언젠가 놀러 온 친구가 책장을 보면서, '아니 무슨 책들이 다 까맣고 빨간 거야? 책장이 왜 이렇게 살벌해?'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아서, 누군가가 와서 내 독서 취향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나온 괜한 방어기제랄까. 지나치다 싶을지 모르지만 미스터리/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 치고, 나중에 괜한 사건에 연루되어 용의자로 지목되었을 때 내 책장이 확신을 심어주지 않을까 걱정 한번 안 해본 사람은 없지 싶으니, 이 정도는 약과다. 하지만 그렇게 책 박스를 하나, 둘 풀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나를 독서의 길로 인도하고(셜록 홈스), 일상에 책 읽는 재미를 주는 내 사랑하는 책들에게 책장의 R석이 아니라 S석도 내주지 못할게 무엇인가 말이다. 그렇다고 장르 소설'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 손에 집히는 책들을 당당하게 '아무 데나' 꽂았다. 내 사랑이 어때서?

올해에도 '피철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미스터리/스릴러 장르의 경우 선혈이 낭자한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도서들을 많이 만났다. 내 사랑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으니, 괜히 올해 읽은 몇 권 안되는 몽글몽글한 책들 말고, 올 한해 즐겁게 읽었던 책들을 자랑해 본다.

***

무서워서 못 견디겠어. 네가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과는 달리 내게 탐정이라는 특등석은 준비되어 있지 않아. 까딱 잘못하면 나는 목격자, 범인에게 불리한 방해물, 적당한 먹잇감으로서 불행하게 사건에 말려들어 살해당하겠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죽기 전에 범인을 밝혀내는 수밖에 없잖아." - 시인장의 살인

미스터리는 인간의 본성과 당시 사회 현상을 민감하게 반영한다. 현실과 비슷한 상황에서 범죄자들의 성향을 분석하는데, 현실과 비슷할수록, 오히려 독자는 '범죄자의 심리'를 이해했다고 믿고, 현실과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르니까'라고 묘한 안도감을 갖게 된다.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나는 '진짜 범죄가 존재하는' 현실의 탈출구로 '범죄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시인장의 살인>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소설 속 현실에서 한 번 더 탈피한다. 심지어 '좀비'라는 비현실적인 배경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탈출쇼는 상당히 현실감이 있다.

미스터리 애호회 회원 하무라와 아케치영화 연구부의 여름 합숙에 함께 한다. 과거 합숙에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 합숙에서 아케치는 무언가 '미스터리한'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첫날 담력훈련을 다녀오던 이들은 '이상한' 존재 - 좀비 - 와 맞닥뜨린다. 합숙장소 '자담장'에 갇힌 그들과 좀비, 그리고 살인사건과 과거의 비밀. 무엇보다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요소들, 학생들, 합숙, 밀실 살인, 연쇄 살인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소설이다. 현실과 너무 닮은 범죄소설은 너무 무겁다 생각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순문학과 비교하여 아직도 미스터리를 저급한 장르로 취급하는 자칭 '현학적'인 놈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지. 순문학은 가능성의 총체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작품이 성립해. <덤불 속>은 물론 두말할 나위 없는 걸작이지만, 세상에는 그 작품을 모방한 셈인지 그다지 재미도 없는 가능성만 몇 가지 던져주고 나머지는 독자 여러분이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이 '도망'치는 '순문학' 작품이 수두룩하게 많아. 오히려 마지막에 수습을 하지 않는 작품을 '열린 결말' 운운하며 높게 평가하여 현학 콤플렉스를 마구 드러내는 멍청이들도 있어.

하지만 미스터리는 거기에서 한 단계가 더 필요해. 가능성의 총체를 제시한다고 해서 미스터리 독자는 만족하지 않아. 그중에서 납득이 가면서도 의외성이 충분한 단 한 가지의 결말을 준비해야 하지. 한 가지 상황에는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의 싹이 무수하게 돋아 있는데, 매번 눈물을 머금고 그중에서 단 하나만을 '진실'로 제시해야 하는 거야. - 미스터리 아레나

미스터리 소설 안에도 많은 것이 담겨 있지만, 기본적으로 책을 집어 들게 하는 원동력은 '재미'다. 범죄나 살인을 무작정 '재미'와 연결하기엔 부담감이 좀 있지만, <미스터리 아레나>에서는 과감하게 미스터리 풀이를 '쇼'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버렸다. 미스터리 서바이벌 TV 퀴즈쇼가 벌어지고, 참가자들은 추리소설의 한 부분과 같은 사건 낭독을 들으며 중간 체크포인트에 추리를 설명한다. 미스터리를 저급한 장르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풀이를 위해 과거에 쓰였던 온갖 트릭을 들먹이는 부분에서는 미스터리 소설들에 대한 자조적인 모습도 보인다. 장르 소설에 대한 사랑에 당당하지 못한(혹은 못했던) 나 같은 사람들에게 써먹기 좋은 포인트가 많다. 무엇보다 이것은 장르 소설 작가들을 위한 책일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을 납득시키고 만족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성토하는 책일지도.

에를렌뒤르는 우연이란 삶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간악하나 술책을 펴거나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연이란 비와 같아서,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도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내린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때로는 소위 운명이라는 것을 형성하기도 했다. 우연이란 난데없이 등장했다. 예상치 못하게, 기이하게, 설명할 수 없게. 에를렌뒤르가 몸담은 곳에서 그런 우연을 칭하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범죄. - 저체온증

따지고 보면 사랑, 불륜, 전쟁뿐인 내용인데도, '고전'으로 유명한 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들이 많다. 미스터리/스릴러의 경우에도 '범죄'라는 소재에 국한된 면이 있지만 그들의 인간 심리 연구와 묘사는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범죄자'에게서 발가벗겨진 인간의 모습들을 많이 보여준다. <저체온증>의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은 "나는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공감할 굴곡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릴 때 눈보라에서 동생의 실종을 경험한 형사가 채울 수 없는 고독으로 아픔을 고스란히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는 미해결 사건, 특히 실종 사건에 관심을 가진다. 해줄 수 없는 게 더 이상 없지만, 실종자 파일을 차마 덮지 못한다. 그가 동생의 실종 사건을 덮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상실감에서도 작가가 말하는 '공감할 굴곡'이 보인다.

"나시다 씨의 인생은 커다란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어요. 그걸 극복해갈 수밖에 없는 인생도 있는가 하면 쓰유구치 씨처럼 돌부리에 걸리기만 해도 벼랑에서 떨어지는 인생도 있어요. 인간 세상은 어쩜 이리도 위태롭고 잔혹하고, 또한 엉뚱하고 신비로울까요!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고, 쓰는 거랍니다." -자물쇠 잠긴 남자 (하)

아리스가와와 히무라는 오사카의 작은 호텔에서 벌써 5년째 장기 투숙하고 있던 나시다씨의 자살 사건에 대해 조사해 줄 것을 의뢰받는다. 자신의 작은 호텔방에서 자살한 나시다씨의 타살 가능성을 확인해 달라는 의뢰였다. 그들은 사건의 기술적인 트릭은 물론이고, 누구보다 비밀이 많았던 '자물쇠 잠긴 남자' 나시다의 '과거를 캐면서 사건에 진상에 근접해 간다. 누군가는 커다란 사건 사고를 지나친 과거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고, 누군가는 종이에 손이 벤 것만으로 자신의 삶을 벼랑으로 몰고 간다. <자물쇠 잠긴 남자>에서는 그 삶의 아이러니와, 교차를 솜씨 좋게 보여준다.

수수께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게 마련이고, 그들이 모이는 이유도 제각각. 각자 다른 속을 가지고 한자리에 모이는 등장인물들이 부대끼는 모습은 배경만 다를 뿐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을 읽으며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소설을, 소설보다 더 소설스러운 현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건 축복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 우리는 우리한테 혹은 다른 누군가한테 말썽이 생겼을 때 종종걸음으로 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달아나서 숨지 않는다. - 여자는 총을 들고 기다린다

미스터리 소설을 읽다 보면 결국 논픽션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다른 책에서 읽었다. 나는 이상하게 그래도 소설 속으로 숨고 있다.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건지. 특히나 소설과 달리 범죄자의 '진짜' 심리나 진실을 추측에 의존해야 하는 것 자체가 아직은 불안하다. 하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과거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이 있다. <여자는 총을 들고 기다린다>는 실제 1914년 콥 자매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콘스탄스 콥이 어떻게 뉴저지 주 최초의 여성 보안관보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전통적인 '여성'의 가치를 강요받고 자라며 그 너머를 보지 못했던 여성이 최초의 여성 보안관보가 되는 거짓말 같은 사실은 그 어떤 스릴러 보다 더 스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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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장르를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무조건 '재미'라고 대답하면 이상한 취향의 변태같이 들릴까 봐 걱정하던 때도 물론 있었다. 수수께끼 푸는 것도 좋고, 답 없는 세상에 답이 제시되는 것도 좋고, 범인은 언젠가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밝혀진다는 사실도 좋고, 범죄의 다양한 원인들을 보면서 나는 '안전하다'라고 확인하는 것도 좋다. 이 모두가 다 내가 이 장르를 사랑하는 이유이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어서 좋다'가 가장 큰 이유라고 이제는 '인정'하고 싶다. 잘 짜인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읽으면 뭔지 모를 만족감도.

재미있는 소설 읽으며 힐링하는 기쁨을 계속하고 싶다.

우리 이대로 사랑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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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세상의중심예란

    이사를 어디로 하신거예요? 국내로 들어오심 좋은데..^^
    올려주신 도서는 모두 제게 생소하네요.. 취향저격이네요 ㅎㅎ

    2019.12.24 12:29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Elly

      그냥 지역만 살짝 옮겼어요 ㅎㅎ 멀리가진 않았는데 살림살이 다 옮기려니 또 일이더라구요. 책도 많고..ㅋㅋ
      제가 좋아하는 분여인데 취향을 많이 타는지라..ㅎㅎㅎ 그래도 재미로 한두권 시도해 보신다면 영광일 것 같습니다 ㅎ

      2019.12.29 03:52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