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금색 禁色

[도서] 금색 禁色

미시마 유키오 저/정수윤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나는 무익하고 정교한 역설 그 자체다' - 소설 《가면의 고백》 집필노트 중

이것은 미시마 유키오가 25세에 쓴 등단작 『가면의 고백』의 집필 노트에 적힌 문장이다(출판사 블로그에서 읽을 수 있는 역자 후기에도 인용된 문장이다). 청년의 혈기로 뱉어낸 말이었을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는 이 당돌한 선언대로 생을 산 셈이고, 세상의 기억 속에도 그처럼 박제되었다. 이 '미시마의 역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세상의 일부는 그를 두고 ‘무익하고’ 퇴폐적인 별종 작가라 말하고 있고, 다른 일부는 악마적인 (‘정교한’) 재능을 지닌 세기의 소설가로 대접한다. 한동안 나는 그의 작품들을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 연달아 읽은 적이 있다. 꽤 된 이야기다.
 

역설, 크게 양분화된 평가.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미시마 유키오의 세계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며 진면모다. 그리하여 그는, 영롱한 눈빛의 순한 독자들을 멈칫하게 만드는 기이한 작가, 명성을 듣고 기껏 자신의 작품을 찾아온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작가, 책이 입맛에 맞거나 작가에게 호감을 키우게 된 사람들마저 작가의 기행으로 인해 가치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작가로 남는다. 그가 세상에 전시한 그로테스크한 방식의 죽음, 그 기묘한 ‘이별식’ 덕에 그는 나쓰메 소세키나 미야자와 겐지 같은 일본 '국민작가' 칭호와는 영 멀어졌다.(스웨덴의 노벨 재단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그는 1963년 노벨문학상의 최종 후보 6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할복을 노벨상 수상 불발과 연관짓는 전문가도 있다. 1962년 수상자는 존 스타인벡이었고, 1964년은 장 폴 사르트르가 선정됐으나 알다시피 수상을 거부했다. 미시마 유키오가 경합을 벌인 1963년 노벨문학상은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에게 돌아갔다.) 누구보다도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한 생을 살다간 그의 이력을 보면서 나는 그가 아예 처음부터 이러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계획된 일을 끝내자 미련 없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 존재는 아닐까 하는 공상을 하기도 했다. 그의 생은 한 편의 일인극처럼 비쳐지기 충분하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의 작품들이 가져다주었던 즐거움들이 내 기억 속에 건재하다. 연약함에 기인한 파괴의 쾌락. 갈망의 아이러니. 결코 동경하진 않으나 소설 속으로 난 길을 발맞추어 따라가다 보면 아주 조금은 그의 기행을 너그럽게 봐줄 수 있기도 했다. 읽는 내내 현혹되지 않겠다는 의지로 버틴 나의 정신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거운 도덕의 방패를 쳐들고 팽팽히 맞서느라 평소보다 몇 배의 기력을 소진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에 와서는 더욱 잊을 수 없는 시간들.

그의 대한 내 애정이 전보다 식은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오래 전에 읽은 『금각사』나 『가면의 고백』, 『파도 소리』  같은 소설 속 어느 장면이 내 사적인 추억이라도 되는 양 망상의 소재가 되는 걸 보면, 활자를 통해 적잖이 끈끈한 사이였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인연은 인연인지 이렇게 북펀딩을 통해 다시 만나는군, 하며 사소한 의미를 부여해 보기도 했다.
『금색』은 그가 스물 대여섯쯤 연재하기 시작하여 삼십대의 마지막 순간에 완결판으로 내놓은 소설이라고 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청춘. 그 청춘에 도사리던 욕망과 희열, 직시하는 송곳 같은 시선, 그런 날카로운 시선을 갖고도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발밑 아래의 절망 구덩이, 흐르는 오물들......
야심한 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산중의 공원을 홀로 지나는 기분으로 『금색』과 그의 다른 소설들을 경험해보길 권한다.

 

미시마 유키오. 그를 좋아하는 독자들만큼이나 이런 저런 이유로 싫어한다는 사람이 많다(혐오한다는 사람도 있다). 엄연한 현실이다. 수긍이 가는 면도 있다. 상의를 벗고 애써 키운 근육을 뽐내며 칼을 들고 포즈를 취한 그의 사진은 내 눈에 영 바보 같게만 비친다. 자기 배에 스스로 칼을 꽂는 만큼 충만한 기개. 그 기개로 우국을 외치지만 정작 군대 징집은 요령껏 거짓말로 피해 간 일화만 해도 그렇다. 천재라는 둥, 세기의 작품이라는 둥 진부한 수식어로 요란을 떨 마음도 내겐 없다. (문학사에 미시마 유키오 정도 쓰는 작가는 '쌔고 쌨다'. 그렇지 않은 작가의 작품들이 어떻게 긴긴 세월을 이기고 우리 손에 쥐어져 있을까? 도서관에 빽빽히 꽂힌 각종 세계문학전집들은 천재문학전집일까? 하나 건너 천재 하나. 문학에 있어 '천재'라는 말만큼 쓸데없는 미사여구도 없다. 천재들의 화려한 재주넘기를 보려고 내가 시와 소설을 읽어온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이런 모순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인간 미시마 유키오와 그의 작품들을 ‘무익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나는 전혀 동의하기가 힘들다. 그는 무익하지 않다. 그는 유익하지 않다. 그는 무익과 유익의 땅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그곳은 선과 악, 미와 추, 도덕과 부조리가 한데 뒤섞인 광활한 점이지대다. 눈이 고운 체와 거름망이면 될까? 그것으로 아름다움과 추함을 깔끔히 둘로 분리해 낼 수 있을까? 그 세계는 당신으로 하여금 거듭 시험에 들게 하는 세계다. 나를 비롯한 과거의 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의 독자들도 혼란스러운 시험을 치룰 것이다. 세계의 소설 애호가들이 우리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뻘밭 같은 그의 작품들 속을 헤집고 다니다 진귀한 것들을 발견했고 수집했다고 술회한다. (가장 최근 알게 된 미시마 유키오의 애독자는 뮤지션 데이빗 보위다. 원체 다독가였던 것으로 유명한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꾼 100권의 책 목록에 미시마 유키오의 『오후의 예항(1963)』을 포함했다. 이 소설은 국내에는 미출간이지만 서구권에서는 일찌감치 번역되어 명성을 얻은 작품이다.)

 

난생 처음 참여해본 북펀딩. 초판 별지에 작게나마 내 이름을 끼워 넣기까지 했으니, 먼 미래에도 이 책의 존재를 잊긴 다 틀렸다. 끝으로 문학만큼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께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영화 한 편을 추천할까 한다. 1985년 폴 슈레이더 감독이 연출한  <미시마(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는 그의 생애와 작품들을 혼합 구성한 흥미로운 영화다. 이상야릇하고 기기묘묘한 미시마의 세계가 증폭되는 느낌이다.(이와 얼마간 유사한 방식의 영화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The Hours)>를 들 수 있을 듯하다. 버지니아 울프와 댈러웨이 부인을  다같이 만날 수 있었던 바로 그 영화.)

- 끝 -

 

 


PYBLOGWEB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