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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귀신의 노래

[도서] 길귀신의 노래

곽재구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한 해에 100여 권 책을 읽는다. 사춘기 시절 헌책방을 드나들면서 시작한 독서, 스무 살 때부터 책은 내 일상에서 예외인 적이 없었다. 문학 작품을 읽고 감동하며 삶을 바꿔나갔다.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불안했다. 눈이 좋을 때는 밤새워 읽기도 하고 덜컹대는 시내버스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여행을 갈 때면 당연히 책을 먼저 챙긴다. 책이 몸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책돌이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집안에는 책만 가득하다. 수천 권의 책을 읽으며 좋은 책을 가능하면 소장하려고 한다. 집이 좁아 자꾸 비워야 하는 상황이 오지만 책을 읽고 감흥하며 책을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그동안 책을 읽으며 책을 쓴 이에 대해 고마워한 적이 있었나 싶다. 생각의 틀까지 바꾼 책이 있지만 작가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 적이 없었다. 비로소 곽재구 시인에 이르러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며 한없이 마음이 따스해지고 고요해진다. 시인은 자신의 산문을 잡문이라 일렀다. 시와 함께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한 이래 어느 순간 산문을 써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기간에 쓴 산문을 일컫는 말일 테다. 그러나 시인의 산문을 읽으면서 그것은 시인 자신의 글에 대한 고루한 엄격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이 쓰는 산문은 내게 시와 전혀 다르지 않다. 물론 시와 산문의 영역은 다르다. 시가 품을 수 있는 가락이 있고, 산문이 품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시가 이야기를 품을 수 있고, 산문이 노래를 품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시인의 산문은 산문시에 다름 아니고, 그러면서도 풍성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끝내 나를 배낭 하나 매고 남도를 떠돌던 스무 살의 반짝이는 청춘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러니 마침내 곽재구 시인에 이르러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저물 무렵 랄반 호수가 바라보이는 이 노천 레스토랑에서 아이로부터 나뭇잎 한 그릇의 식사를 받아들면 내 허름한 영혼이 조금씩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로부터 건네받은 나뭇잎 위의 삶은 콩을 천천히 먹으며 내 남은 시의 시간들이 3루피 밥값이라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동안 색색의 반딧불이 천천히 호숫가의 마을을 떠도는 것이었다. (51)

 

인사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인사를 했던 대상들이 나를 향해 안녕, 하고 인사를 해오는 시간이 있지요. 꽃 핀 라일락 나무에게 안녕, 참 향기가 좋구나, 하고 인사를 했는데 안녕, 한 시간쯤 내 향기를 맡다 가도 좋아요, 하고 꽃나무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지요. 시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외롭고 쓸쓸한 영혼들이 캄캄한 밤을 헤맬 때 어디선가 안녕,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고 누군가 기억하지도 않는 허름한 풍경들이 서로 손과 마음을 내밀어 나누는 고요하고 따스한 인사가 내겐 시인 것이지요. (67-68)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은 우리가 매일 시를 읽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행복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큰 기쁨과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좋은 일을 돈이 없다고 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돈이 부족하다고 시를 쓰지 않고 같은 이유로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면 인생은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모두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태어날 적부터 지닌 고통이 있고, 우리는 그들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고통이 있기에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 모든 기쁨은 눈물 근처에 있는 것이다. (193)

 

고마워. 늘 내 곁에 머물고 있어서.

길귀신이라는 말을 듣고 조금 움찔했을 이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냥 길동무라고 해도 좋겠지만 이들이 이 지상에 머물렀을 시간을 생각하면 동무라는 말이 한없이 친근하고 포근해도, 그냥 귀신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은 것입니다. 길 위에 서면 나는 이 셋의 사랑스런 길귀신들에게 내 마음의 혼을 모아 다정하게 인사하는 것입니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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