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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문

[도서] 일생일문

최태성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역사의 인물과 사건을 통해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것인지 나에게 묻고,경험하고 실천하며 얻는 실수와 잘못을 어떻게 바르게 이끌어서 깨우치고,한계를 극복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성공으로 가는 빠른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잘 사는 게 무엇인지,
꿈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
살아가면서 아끼고 보살피고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얻을 수 있다
맛이 있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맛있게 풀어낼 줄이야
한 번뿐인 인생을 바칠 하나의 질문을 찾았던 역사적 인물을 따라간다
나는 두 분만 뽑아내 본다

'나는 누구로 살 것인가?'
스스로 일본인이 됐지만 끝내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의 질문이다
의사(義士)란 의로운 뜻을 가지고 의로운 행동을 보여준 선비를 가리킨다
민족의 존엄과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의사로 우리는 흔히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꼽는다
이봉창 의사는 그저 평범한 도시의 모던 보이였다
'일본인의 습관을 빨리 배워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겠다'
일본인들로부터 기술을 습득해 성공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평범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마음으로 열심히 직장에 다녔다
이봉창은 일본에서 일하는 것이 오히려 차별을 덜 받는다는 말을 듣고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철공소 등을 전전하며 여러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때로는 술도 마시고 카페에 가거나 영화관에도 갔다 이때의 그의 모습은 당시로써는 첨단의 소비문화를 누리는 모던 보이로 보인다
그러나 1928년 11월,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이 그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그날 일을 하루 쉬고 그 즉위식을 보러 갔는데, 임검하던 경찰이 그를 수색해 가지고 있던 한글 편지를 발견하고는 그를 1주일 동안 유치장에 구금한 것이다
이때 이봉창은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임금의 즉위식 따위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라도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민족의식과 함께 일제의 조선인 차별에 새삼 눈을 뜨게 되고,
1931년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단에 들어가게 된다

백범일지를 보면
“제 나이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 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라는 이봉창 의사의 얘기가 나온다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김구와 기념촬영을 했다.


1932년 1월 8일, 그는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져 명중시키지만, 히로히토는 다른 마차에 타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 청년이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사건은 이후 항일 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무엇보다도 이봉창 의거는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던 임정의 건재를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윤봉길 의거의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국제적 지원까지 얻게 되는 등 침체 일로의 독립운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자리에서 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 형무소에 갇힌 그는 그해 10월 10일,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으니, 이때 그의 나의 31세였다
백범은 이봉창이 처형되던 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해 이봉창의 죽음을 추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실패했지만, 그 영향은 컸다
일제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물론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민국일보는 이봉창 의거를 보도하면서 일왕 히로히토가 “불행하게도 맞지 않았다”는 표현을 써서 보도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상하이 사변은 1932년과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상하이에서 일어난 중국과 일본의 무력 충돌사건이다

'부의 비밀은 무엇인가?'
제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조선의 거상이 된 김만덕의 질문이다
김만덕은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되었다
이를 가엾게 여긴 관기가 그를 수양딸로 삼고, 기적에 이름을 올리며 기생 신분이 된다
어린 김만덕에게는 여성이라는 태생적 한계,가난이라는 경제적 한계,기생이라는 신분적 한계,그리고 제주라는 섬이 지역적 한계를 주었다
김만덕이 살았던 조선 후기는 여성의 사회 진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기고,제주도 여성들에게 출륙금지령도 있어서 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시기다
이토록 많은 한계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지만,김만덕은 굴하지 않는다
김만덕은 한때 제주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양인 신분을 되찾기 위해 관가에 지속적으로 탄원을 넣어 신분 회복에 성공한다

김만덕에게 배우는 첫번째 부의 비밀이다
바로 그 어떤 상황 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목표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후 김만덕은 곧바로 제주와 육지를 잇는 통로였던 포구에 객주를 열어 유통업을 시작한다
말총, 미역, 전복, 귤 등 제주의 특산품과 제주에서 귀한 육지의 물건을 교역하는 식이었다
만덕은 때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에 능하여 팔거나 샀다
시세차익에 능했다는 기록이 정조때 문신 체제공의 번안집에 남아있다
조선 후기 양반을 사고 파는 일이 벌어지자 양반 인구가 급증했고,김만덕은 양반이 쓰는 갓의 테두리를 만드는 양태를 만들기 시작했고 양반이 늘어나자 양태의 수요가 폭발해 양태로 대박을 친다
많은 시세차익을 남기며 관가에도 물품을 공급하게 되었고, 자신의 배까지 소유하면서 제주 최고의 거상이자 여성 CEO로 자리매김했다

이것이 김만덕을 통해 배우는 두번째 부의 비밀이다
세상과 돈의 흐름을 면밀히 파악하고,이에 발빠르게 대응한다는 것이다
오직 돈만 좇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만 부를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김만덕은 몸소 보여주었다

정조 18년, 1794년의 흉년을 일컫는 ‘갑인년 흉년’은 극심한 흉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될 정도로 참혹했다
강한 바람에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제멋대로 굴러다니며 쑥대밭이 된 제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쌀 5000석을 실은 배 12척 중 5척이 난파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정조실록에는 '이즈음 제주 백성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때 김만덕은 쌀 500여 석을 사들여 수천 명의 백성을 살린다
재물이 모이는 때가 있으면 흩어지는 때가 있다는 것,잘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당한 때에 올바르게 흩어지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김만덕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세번째 부의 비밀이다
잘벌고 잘 모으는 데서 나아가 이를 잘 쓸 때 진정한 부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는 '가치있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삶 전체를 풍요롭고 부유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선조들이 평생 답을 찾아 헤맨 궤적이 바로 지금의 우리의 역사라고 강조한다
"역사는 많은 이들의 경험이 가득 담긴 데이터베이스다. 그 양이 너무도 방대해 우리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미래의 모습이 이미, 거의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거나 꿈꾸던 바를 실현해낸 사람들, 자신뿐 아니라 세상을 바꾼 사람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후손된 자격으로 그들이 써 내려간 역사를 이정표 삼아 오늘을 살아갈 지혜를 얻는다.
현재의 막막함과 불안에 사로잡힐 때, 역사만큼 우리를 위로하는 따듯한 지식이 또 있을까?
선조들이 답을 찾아 헤맨 궤적이 바로 지금 우리 앞의 역사다."
책이 이리 맛이 있을 수가 있을까
한국인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는 건 어떨까
한호흡에 읽히는 흥미진진함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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