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그 상상력에 찬사를 내비치면서 곧 그러한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시선과 더불어 당장은 비현실적인 허상의 이야기라고 평가 절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꿈이 많았던 어렸을 적에는 다양한 경로로 SF소설을 접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F소설 읽기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필립 K. 딕의 존재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너무나 감동있게 보았는데, 이미 그 작품에 대한 원작이 1960~1970년대에 쓰여져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였기 때문이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바로 그 원작인데, 이외에도 그의 소설은 오늘날 우리가 즐기고 있는 대부분의 공상 과학 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다.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은 사실 이 장르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낯선 제목으로 인하여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이 작품은 1965년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매트릭스]와 [인셉션]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이 필립 K. 딕의 다양한 작품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이기에 필립 K. 딕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아니, 읽어야 한다. 나 역시 이 책이 내가 읽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의 이전 작품과 비교해봐도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작품을 그 시기에 생각해 낼 수 있었는지 놀라게 된다. 그가 약물 중독에 고생한 이유도 어쩌면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한 그의 창작 열정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이다.
SF소설의 대단한 점은 그 작품의 배경을 저자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와는 전혀 다른 그 세계는 오롯이 저자의 상상에 의하여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세계가 독자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게끔 구축되어야 작품으로서 빛을 발하게 된다.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은 환경오염과 인구과잉으로 신음하는 21세기 초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낯설지 않은 설정에서 차곡차곡 만들어지는 그의 세계관은 어느덧 별다른 무리없이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1960년대에 그가 지구의 앞날을 다소 어둡게 보고 있지만, 환경오염과 인구과잉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태양계 및 우주로 확장하는 시도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상상력은 어느덧 오늘날의 현실이자 가까운 우리의 미래라는 점에서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의 이야기의 발단은 환각제 캔-D와 새롭게 경쟁 구도를 구축하는 츄-Z라는 제품을 둘러싼 경영자간의 갈등이라는 점은 그 배경이 SF장르이지만, 우리 현실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갈등 구조라는 점에서 빠져들게 된다. 또한 이러한 환각제가 화성과 같이 징집되어 밝은 미래가 없이 그곳에서 평생 노동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개척민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이었다는 점은 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역시 비록 환각제라는 타이틀은 붙어 있지 않지만, 자칫하면 삶에 대한 방향성을 상실하고 무언가를 탐닉하거나 중독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저자의 상상은 역시나 현실화 된다. 캔-D를 복용하면 정해진 시간 동안 과거 세계로 도피할 수 있으니 화성에 거주하는 개척민들 입장에서는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기에 비합법적인 것이긴 하지만 인기를 끌 수 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캔-D와는 달리 합법적인 거래를 승인받은 파머 엘드리치의 츄-Z의 등장은 캔-D를 제조하는 레오 뷸레로 입장에서는 자신의 사업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으로 다가오게 된다.
자신이 운영하던 독점 시장이 무너지게 될 상황에 처하자 벌이게 되는 일련의 행위는 이야기로서 충분히 흥미롭다. 더군다나 츄-Z의 기본 물질이 태양계 밖의 프록시마 항성계에서 파머 엘드리치가 가져온 것이라는 점에서 의문에 쌓여 있었는데, 이것을 직접 레오가 체험함으로써 그는 위기의식을 더욱 크게 느낄 수 밖에 없게 된다. 캔-D와는 달리 츄-Z는 현실에서는 눈 깜박임에 해당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 가상의 공간에서 영원의 시간처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상의 공간은 시간과 존재에 대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다양한 존재로 환생을 체험할 수 있으니 캔-D에 대한 소비자이 외면은 기정 사실처럼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 단계보다 이 작품에서는 신(神)과 종교에 대한 성찰을 곳곳에서 묘하게 비유시킴으로써 꽤 깊은 진리에 다가가는 느낌을 보여준다. 제목의 '성흔'과 같이 파머 엘드리치라는 인물의 기계로 만들어진 의안과 의수, 턱은 츄-Z를 복용한 사람들에게 마치 신의 흔적과 같은 '성흔'처럼 비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파머 엘드리치가 공급하는 츄-Z를 통하여 생겨나는 환각으로 위안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종교에서 말하는 신에 의한 구원을 어두운 모습을 통하여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실제 이 작품에서는 성찬례에서 영성체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에 대한 부분이라든지 또한 츄-Z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상 공간에서 일어나는 윤회의 과정은 다양한 종교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된다. 아래의 문구는 이 작품에서 다루는 내용을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파머 엘드리치는 소외, 흐릿해진 현실, 절망으로 이루어진 사악하고 부정적인 삼위일체를 프록시마에서 -아니, 우주공간에서 - 가지고 돌아왔지만 그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그걸 잠식하지는 못했어.
- p. 377 中에서 -
츄-Z를 복용한 사람들 앞에서 파머 일드리치는 예의 그 '성흔'과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파머 엘드리치는 신과 다름없는 존재이다. 더욱이 그러한 것은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추-Z를 선택하였다는 점과 이후 중독되는 과정은 종교의 일면과 같다고 한다면 너무나 성급하게 판단을 내린 것일까? 아마도 이 작품을 읽는 사람마다 달리 느껴지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다양한 종교와 약물에 심취한 필립 K. 딕의 삶을 떠올려 본다면 확실히 이 작품은 신(神)에 대한 내용을 큰 주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약물 중독과 그것을 공급하는 인물을 신도와 신의 관계로 매칭하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파머 앨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은 이러한 종교 및 철학적인 메세지가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지만, SF소설 특유의 매력과 함게 그러한 묵직한 메세지마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약물을 통하여 현실과 가상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분명 영화 [매트릭스]에서 알약 하나로 사실과 허상을 보여주며, 심지어 허상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안주하려는 부분은 이 작품과 크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러한 가상의 공간에서 활동하는 것은 분명 영화 [인셉션]처럼 꿈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암시를 심어주는 것과 통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이들 영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즐기고 향유하는 것들을 이미 오래전부터 저자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져 있던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흙으로 빚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해. 애당초 근본부터가 그 모양이었으니 크게 기대할 게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면, 바꿔 말해서 시작이 그렇게 미천했던 것치고는 그럭저럭 잘해왔다고 봐야 해. 따라서 우리가 지금 직면한 이 중대한 위기조차도 결국은 타개할 수 있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신념일세. 무슨 뜻인지 알겠지?
- 레오 블레로가 화성에서 돌아온 직후 구술해서 P.P. 레이아웃사의 유행 예측 컨설턴트들에게 배포한 녹음 메모의 일부 -
작품의 맨 앞에 기재된 이 내용을 비평가는 이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디스토피아적인 암울한 분위기를 관통하는 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지 않은가? 김국환 씨의 [타타타]도 왠지 이 글과 비슷한 느낌을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나는 오히려 이 글을 통하여 그러한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 안에서도 삶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위로처럼 들린다. 인간의 삶이 무(無)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마이너스가 될 수 없기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