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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겐소 플랜

 미국의 재무장관 H.모겐소가 입안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처리에 관한 계획안으로서 1944년 9월 퀘벡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의 승인까지 받았다. 아마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독일 역시 오스트리아와 같은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니 이러한 모겐소 플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독일을 농업국가로 만들고, 영세 중립국화 하려던 이 계획은 아이러니하게도 실행도 되기 전에 언론에 유출되면서 바로 미국 공화당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여 결국 실행되지 못한다. 결국 미국 내부에서도 패전 처리에 대해서는 상반된 시선이 존재하였으며, 또한 독일계 미국인처럼 다양한 국가의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에서는 이러한 독일에 대한 처리에 대한 반감은 등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일을 중세로 돌리는 것은 20세기를 사는 독일인을 전부 국외로 추방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라는 공화당의 표현은 왠지 자국의 독일계를 의식하면서 동시에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결합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물론 이로 인하여 전후 독일은 가혹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2.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미국의 시선

 "독립운동 세력이 이렇다 할 저항도 못했으면서 내부갈등과 분열로 역량을 탕진한 것에 대해서는 있었던 그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이 아니라 이해를 위해서다. 무조건 미화한다고 해서 국민적 자긍심이 생겨나는 건 아니잖은가"

 - p. 115 中에서 -

 강준만 교수의 독립 운동 과정 중에서 세력간의 사상 갈등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독립이라는 이유로 미화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장제스는 연합국과의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지만, 미국은 그러한 것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 독립투쟁에서 괄목할만한 활약을 한 것도 아니었고, 중국군의 일부로 활동하는 것에 그쳤기에 활동에 비하여 너무 과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이는 훗날 미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를 하려는 것과 연결되며, 더구나 일본 패전 이후 한국보다 오히려 일본에 대한 신뢰감을 가졌던 점은 이러한 미국의 시선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미국군과 일본 관리들의 만남이 우리에 대한 주도권을 인수인계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도 과장된 표현은 아니었을 것이다.

 

3. 6.25 전쟁에 대한 미국의 시선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공산주의자로서보다 부패무능한 중국의 전통사회를 개혁하려는 혁명세력으로서 중국사회의 혁명기운에 편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라는 1950년 1월 31일자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애치슨의 연설을 인용하면서 이승만을 장제스에 비유하고 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당시 이승만은 북진 정책을 강조하고 있었다. 친일파에 대한 단죄를 위한 반민특위 활동도 막고 대대적인 토지 개혁이라든지 적폐 청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들은 오로지 북한과의 전쟁을 통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미국의 시선에서는 이러한 이승만 정권은 불안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곧이 곧대로 한국의 국방력이 북한을 압도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었겠지만, 미국은 그 실상을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면 무책임한 전쟁이 일어나리라 예상하면서 이승만의 군사적 지원을 외면하게 된다. 과거 이승만의 업적으로 독립에 대한 외교적인 성과를 강조하지만, 그의 정권이 보여준 모습은 상당히 아마추어적인 것이었기에 의심마저 일게 된다.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과도한 북한과의 전쟁론은 미국인들에게 장제스의 실패와 연관지어 한국인들이 장래의 한국 운명을 결정할 것이므로 남한의 내정개혁 없이는 미국 정부가 부패하고 독재적인 이승만 정권에 아무리 원조해야 소용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야기하게 된다.

 

4. 6.25 전쟁에 대하여 기존과는 달리 새롭게 알게 된 부분

 a. 스탈린은 한국과 유엔의 북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북한을 돕자는 중국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스탈린의 부추김에 힘입어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스탈린은 현실적으로 6.25 전쟁을 통하여 미국과 전면전에 돌입할 이유가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중국은 자신들의 국경이 미국의 세력과 맞닿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참전을 결정한 시점이기에 굳이 스탈린이 개입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중국이 개입한 다음에 상황이 호전되자 다시 북한을 지원하게 된다. 물론 소련의 개입을 드러내는 것들은 철저히 차단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b. 일본군 약 2만 5천 정도가 비밀리에 한국전선에 참전하였다는 로이터통신은 6.25 전쟁이 일본의 경제에 숨통만 트여준 것이 아니라 일본 전범들의 면죄부 부여와 더불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되었다. 비록 전투병력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의 지리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러한 일본군은 분명 미군에게는 도움이 되었기에 이들의 참전은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c. 전쟁 당시 한반도에 원자폭탄이 들어와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 중국의 개입으로 인하여 전황에 차질을 빚자, 맥아더는 중국에 대한 원자폭탄 공격을 주장한다. 그것도 무려 26개 지역에 대한 원폭 투하를 건의하였으니 확실히 6.25 전쟁은 3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소련도 비록 미국보다는 늦었지만,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의 사막 지대에서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상태였기에 맥아더의 주장은 전면적으로 전쟁에 나서지 않으려는 소련을 오히려 자극할 수 있었기에 결국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면서 그러한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다.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 영국 수상인 애틀리가 맥아더의 주장에 대하여 강력히 반대하면서 트루먼을 설득하였다는 점이다. 핵전쟁에 대한 위협보다는 3차 세계대전 발발시 영국이 소련의 핵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5. 노근리 학살 사건

 KTX가 아닌 경부선으로 새마을호를 타고 갈 때 충북 영동과 황간 사이에서 창 밖으로 노근리 학살에 대한 표시를 본 적이 있다. 1950년 7월 26일부터 3박 4일간 미군의 '인간사냥'으로 300여 명이 죽어간 '노근리 사건'은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인종차별 또는 전술적인 이유로 인하여 벌어졌다는 주장 등이 제기되었지만,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이 드러난 것은 최근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990년 10월 초에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한국 김대중 대통령이 진상규명 지시를 내렸고, 2001년 1월 12일 클린턴은 사과성명을 냈다. 그러나, 유족들은 미국보다는 한국 정부에 맺힌 게 더 많았다. 

 "군사정권 때야 아무 소리도 못하지. 술김에 벙끗하기만 해도 바로 경찰서에 대려갔다."라는 유족의 진술은 군사정권 시기에 이루어진 눈부신 경제 성장은 자국민에 대한 인권탄압 및 역사에 대한 침묵이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대사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결코 뒤로 미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현재 베트남에 대한 한국군에 의한 피해 진상 조사에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국가에 대한 충성과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명분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조사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지만,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응해야 한다. 일본이 일왕에 대한 충성과 대동아 공영권 형성에 따른 임무에 따라 벌인 전쟁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명분을 대는 것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때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논란을 정치권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6. 매카시즘(McCarthyism)

 논리적인 이론이나 사실의 근거 없이 정적을 비난하거나 공산주의 등으로 몰아 탄압하는 일을 의미하는 '매카시즘'의 시작은 위슨콘신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의 연설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1950년 2월 9일 웨스트 버지니아 주 휠링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신이 손에 국무성에 근무하는 공무원들 가운데 당원증까지 가진 공산당원 205명의 리스트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으며 그 명단은 FBI의 안보 관련 체크리스트로 의례적인 단순조사 대상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 연설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고, 후버의 조언과 지원과 함께 향후 몇 년간 미국에는 매키시즘 광풍이 일게 된다. 

 최근 김원봉에 대한 논란이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의열단을 조직하여 무력 독립 투쟁을 벌였던 그가 광복 이후 월북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유공자에 선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월북하였기에 그를 빨갱이로 매도하면서 그런 논리라면 김일성도 독립운동가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빨갱이 프레임은 참으로 안타깝다. 정치권에서 나온 이러한 논리는 우리 사회 역시 매카시즘에 언제든지 휘둘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원봉의 의열단 활동을 통한 독립 활동이 월북으로 순식간에 삭제되는 것은 이해될 수 없다. 그가 월북한 이유가 그 유명한 친일파 출신의 경찰이자 고문 기술자로부터 광복 이후 고문을 받았다는 점은 왜 부각되지 않았을까? 그러한 점에서 울분을 느끼고 월북한 그의 행적은 과연 빨갱이로 치부되는 것이 당연한가? 정작 친일 적폐 세력은 남한에 그대로 있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주려는 것인가? 무엇을 청산하고 무엇을 떠받들여야 할지를 잘 모르는 그들, 아니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그들이 과연 누구인지 먼저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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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추억책방

    리뷰 후 추가 글까지 이 책을 읽고 책찾사님이 옮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걸 알게 되네요. 덕분에 좀 더 폭넓게 읽게 됐습니다.(특히 우리나라와 관련된 이야기라 더욱 관심 가는 리뷰였습니다.)

    2019.04.06 11:51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네, 책 곳곳에서 새롭게 알게 된 미국의 역사가 우리와 연관된 것도 많아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는데, 한 편의 리뷰로는 담아내기란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나중에라도 책의 내용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도록 이렇게 추가적으로 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

      2019.04.07 10:06
  • 스타블로거 ne518


    6.25 전쟁이 3차 전쟁으로 커질 수도 있었다니 그렇게 됐다면 지금 한국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광복이 되고 여러 가지를 정리를 해야 했는데 그냥 넘어간 듯합니다 친일을 했던 사람이 그대로 미국에 붙어서...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월북했다는 것만으로도 안 좋게 봤군요


    희선

    2019.04.07 03:07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월북에 대해서는 이후 정권에서 사상 갈등을 증폭시키는 과정에서 더욱 좋지 않아졌으리라 생각됩니다. 남로당을 제외한다면 당시 남한 정권의 부패와 한계를 절감하고 월북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말이죠. 3차 전쟁이 일어났다면 완벽한 한국 또는 희선님 말씀대로 아예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죠. 역사에 대해서 가정이란 의미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가정을 통한 생각도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2019.04.07 10:08
  • 파워블로그 찻잎향기

    리뷰에 담지 못한 내용을 이렇게 또 풍부하고 알뜰하게 남겨 주십니다.
    월북, 빨갱이, 좌파... 언제쯤 "프레임"이라는 굴레를 씌우지 않아도 되는, 그런 프레임이 사라지는 날이 올까요. 그야말로 역사책에서, 먼 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할 수 있는 정도의 그런 시절이 오긴 올까요?

    2019.04.07 11:1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그러한 프레임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지적 수준 향상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형성되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것을 쓰는 단체와 세력들도 그러한 국민들의 분열과 혼란을 노리고 있으니 말이죠. 그런 점에서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2019.04.0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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