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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사자 작전

- 독일은 1940년 5월 10일 베네룩스 3국을 시작으로 프랑스를 공격하여 영불 연합군을 포위 및 격파하는 데 성공하고 6월 14일 파리에 입성하게 된다. 이로써 서부 유럽의 강국이었던 프랑스는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독일과 굴욕적인 항복 협상에 서명해야 했다. 이제 독일의 적은 영국이 유일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보여진 것처럼 여전히 영국과의 협상을 기대하였는데, 이는 처칠의 강력한 항전 선언에 의하여 물거품이 된다. 따라서 독일은 그들의 강력한 국방군을 영불해협을 건너 상륙시켜 침공할 계획을 입안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바다사자 작전'이다.

 

 히틀러는 이 작전을 9월에 시행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지만, 앞서 벌어진 노르웨이 침공 작전에서 드러난 것처럼 영국 해군의 강력한 해상 통제는 육군의 상륙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였기에 독일은 고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군의 부담을 덜겠다고 나선 이가 있으니 바로 독일의 2인자이자 공군 총수인 헤르만 괴링이었다. 제해권을 영국이 가진 상황에서 독일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제공권 확보였고, 실제 루프트 바페(독일 공군)의 사기는 드높았기에 괴링의 호언장담은 어느 정도 타당했기에 받아들여진다.

 

 탐색전을 거쳐서 독일은 1940년 8월 13일 '독수리 작전'을 시작으로 영국과의 공중전에 돌입하게 된다.(영국 본토 항공전) 하지만 루프트 바페의 자신감과 더불어 그들이 미처 영국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국의 전투기 '호커 허리케인'은 물론 '스피트 파이어'가 독일 매서슈미트의 'BF-109'와 비슷하거나 능가하는 성능을 보였으며, 독일이 영국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의 부재로 인하여 폭격에도 문제를 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종사의 질적 수준 역시 독일에 비하여 그리 떨어지지 않았으며, 격추되더라도 영국 조종사는 자신들의 영토로 낙하산 탈출을 할 수 있었지만, 독일 조종사는 포로로 잡히거나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루프트 바페의 손실은 더욱 커지게 된다.

 

 더구나 독일은 몰랐지만, 영국의 '울트라'는 독일의 '에니그마'에 의한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기에 독일의 전략은 영국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초반의 물량전에서 독일이 우세를 점할 수 있었지만, 영국의 효과적인 반격과 더불어 우연한 실수로 인하여 베를린이 영국으로부터 공습을 받자, 군수 및 항공, 레이더 기지에 집중되던 독일의 폭격 역시 런던으로 향하면서 오히려 영국이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됨으로써 영국 본토 항공전의 주도권은 실질적으로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결국 독일 루프트 바페의 막대한 피해와 더불어 향후 전개될 러시아와의 전투를 대비하기 위하여 결국 '바다사자 작전'은 무기한 연기 되었으며, 이는 실질적으로 영국 본토 상륙의 포기로 이어지게 된다.

 

 "인류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처칠의 영국 공군에 대한 이러한 찬사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서부 전선에서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U보트 전술

- 독일 해군은 상대적으로 재무장에서 우선순위가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였으며, 전통적으로 독일의 전략은 육군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리히 레더 제독이 이끄는 독일 해군은 2차 세계대전 내내 영국과의 정면 대결을 취할 입장이 아니었다. 1940년 노르웨이 침공 당시 비록 노르웨이 점령에는 성공했지만, 병력을 상륙시키는 과정 중에 독일 함대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이후 독일의 수상 함대는 치고 빠지는 전술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독일 해군의 자랑이라 불리운 전함 비스마르크호는 1941년 5월 첫 출항에서 영국의 순양 전함 후드호를 격침시켰지만, 결국 영국 해군의 집단 공격에 의하여 침몰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독일의 수상함대의 이러한 전력 약화는 결국 되니츠 제독이 이끄는 독일의 유보트에 대하여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도 이미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그 위력을 보여주었던 유보트는 전신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보다 조직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되면서 독일 해군의 주요 전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1939년 10월 14일 독일의 권터 프린은 U-47로 침투하기 쉽지 않은 영국의 스캐퍼플로에 잠입하여 영국 전함을 격침하는 전과를 얻게 된다.

 

 프랑스의 함락으로 인하여 독일의 유보트는 대서양 진출이 보다 쉽게 이루어짐으로써 연합국의 호송 작전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 킬 항을 중심으로 이들 유보트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선단을 전신 기술을 통하여 잠수함 기지국으로부터 전략을 하달받아서 마치 늑대가 무리를 이뤄서 사냥하듯이 집단으로 모여서 연합국의 수송 선단을 공격하게 된다. 이들의 활약은 대서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훗날 북해와 지중해, 미국 동부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더욱 확대된다. 전신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배터리 기술로 인한 잠항 시간의 증대는 유보트의 위력을 배가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수송 선단을 호위하는 연합국의 호위함의 전술적인 배치와 더불어 음파 탐지기를 비롯하여 장거리 수상 정찰기의 도입으로 인하여 유보트는 점점 설자리를 잃게 된다. 더구나 유보트가 사용하는 '에니그마'가 영국의 '울트라'에 의하여 낱낱이 해독됨에 따라 전쟁 후반기에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전쟁 발발과 더불어 유일하게 전략적인 열세를 보였던 독일 해군이 취할 수 있었던 전술은 유보트가 유일하였으며, 되니츠 제독의 '울프팩(늑대떼) 전술'은 연합국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만약 히틀러가 되니츠 제독의 요청대로 유보트를 보다 많이 생산하여 일찍 전장에 투입했더라면 전쟁의 향방은 달라졌을 수 있다는 가정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존 톨랜드 저/민국홍 역
페이퍼로드 | 2019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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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ne518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그렇게 돼서 다행이다 싶은 게 있기도 하죠 상대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걸 좀 더 잘 읽는 쪽이 이기는 거기는 하겠습니다 그 차이는 크지 않고 얼마 되지 않을 듯해요 그렇다 해도 그걸로 나타나는 결과는 크겠습니다 히틀러가 유보트를 많이 만들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암호 해독한 사람들도 대단합니다 앨런 튜링이 생각납니다


    희선

    2019.06.12 01:36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앨런 튜링'이 비운의 인물이었죠. 독일의 암호기 '에니그마'를 계산에 의하여 해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면서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인하여 결국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말이죠.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그를 연기한 [이미테이션 게임]도 그래서 흥미롭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울트라' 덕분에 독일 전술의 많은 부분을 미리 알고 대응할 수 있었다는 점은 확실히 영국으로서는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한 해독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하여 자국 국민들을 공습에 의하여 무참히 죽게 방관하는 '코벤트리의 비극'을 감안한다면 때론 정부가 개인이 아닌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얼마든지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는지를 마주하게 되어 전쟁의 비극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네요.

      2019.06.12 08:49
  • 스타블로거 추억책방

    책찾사님 책 리뷰 후의 제2차 대전 전쟁사도 재미있네요. 영국 침공을 위한 "바다사자 작전"이나 연합군 수송선들의 간담을 떨게 했던 그 유명한 "U 보트 전술"까지 결국 독일 전략에 잘 대응한 영국 덕분에 서유럽에서의 반전을 이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역시 전쟁에서 정보전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한번 깨달으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2019.06.13 12:3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그렇죠. 암호 해독기 '울트라'가 아마 연합국이 이룬 전쟁 중 최고의 성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독일은 끝내 그 사실도 모르고 '에니그마'에 대한 맹신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정보가 낱낱이 연합군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추억책방님 말씀대로 정보전의 중요성을 확실히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2019.06.13 14:45
  • 스타블로거 異之我...또 다른 나

    끝내 'U보트'가 실패한 카드가 되었음에도 독일은 계속 그 카드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죠. 해군력은 잠수함 뿐이었으니까요. '애니그마'가 더는 암호가 되지 않았던 상황도 절망적이었지만, 바다를 장악할 수 없었던 독일은 끝내 '노르망디'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독일의 해안선 방어는 단단했지만 결국 패튼의 '기만작전'에 상륙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구요. 곱씹어봐도 노르망디는 참으로 '무모한 작전'이 운좋게 성공한 셈이에요. 히틀러는 절대적인 수세에 몰렸음에도 '단단함'을 놓지 않았구요.

    2019.06.14 03:1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그렇죠. 독일의 수상 함대가 영국과 정면 대결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보트는 독일 해군의 유일한 전력이었죠.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다양한 대잠 기술와 전술로 인하여 전쟁 막바지에는 별다른 활약을 할 수 없었고, 기만과 전력을 앞세운 연합군 앞에 노르망디 해안은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도 했구요. ^^

      연합국의 상륙에 대해서도 독일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방어할지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는 점은 그만큼 방어 작전도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해안에 상륙하는 시점에 공격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함대의 함포 사격으로부터 벗어나서 적들을 공격해야 한다는 입장이 갈렸고, 상륙지가 칼레라고 생각하였기에 노르망디 상륙이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으니까요.

      2019.06.14 10:32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