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솔리니에 대한 히틀러의 존경
-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에서도 언급된 부분이지만,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있어서 유일한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히틀러보다 먼저 '로마 진군'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파시즘을 이룬 무솔리니는 분명 히틀러의 정치 행보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면서 대외로 진출하는 과정 중에 무솔리니의 협력과 양해를 구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심지어 전쟁 후반에 실각하여 연금되어 있던 무솔리니를 히틀러는 오토 스코르체니를 파견하여 구출할 정도이니 무솔리니에 대한 히틀러의 우정은 꽤 깊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도 이제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은 그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니 말이다.
2. 동맹국으로서의 이탈리아
- 히틀러가 연이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무솔리니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원래 히틀러보다 정치적인 입지를 먼저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독일과의 관계가 점점 일방으로 종속되는 느낌마저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이탈리아가 벌이는 행동은 종종 독일을 난처한 처지로 만들게 된다.
먼저 프랑스 침공이 거의 마무리가 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탈리아는 남프랑스를 공격하는 추태를 보인다. 정작 침공을 가하였지만, 이탈리아는 독일과는 달리 프랑스의 전선을 압박할 수 없었기에 결국 히틀러의 주선으로 마무리된다. 그 다음에 벌인 것은 바로 알바니아 침공이다. 발칸반도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던 작은 나라 알바니아에 대한 무솔린의 욕심은 탐욕 그 자체였다. 당시 이탈리아 국왕도 알바니아 침공에 반대하였지만, 무솔리니는 히틀러처럼 알바니아 정부에 대한 협박을 통하여 그들을 병합하고자 한다. 그러나, 알바니아는 그러한 이탈리아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이탈리아는 비록 알바니아를 병합하긴 하지만, 꽤 고전해야 했다.
그 다음으로 북아프리카의 식민지인 리비아를 거점으로 영국의 이집트를 향해 침공하게 된다. 과거 로마 군단의 영예를 재현하기 위하여 북아프리카를 장악하려는 무솔리니의 야욕은 그들의 실력에 맞지 않은 탐욕이었음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사막 지역으로 진출한 이탈리아군은 영국의 반격으로 인하여 이집트는 고사하고 리비아의 트리폴리까지 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하였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이탈리아가 보유한 아프리카 식민지 전체를 날려버릴 상황이었다.
결국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벌인 북아프리카 지역에 개입하게 된다. 적어도 무솔리니의 체면을 살리기 위하여 2개의 기갑사단과 1개의 경보병 사단을 파견하여 이탈리아군과 함께 영국으로부터 북아프리카 식민지를 지키기 위하여 나선 것이다. 독일의 이 아프리카 군단의 지휘관은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이었다. 훗날 사막의 여우라 불리우게 되는 롬멜은 기만과 기동작전을 통하여 단숨에 영국을 몰아 붙이면서 이집트를 위협하게 된다. 애초 히틀러는 그저 영국의 공격을 막는 것을 목표로 파견하였으나, 롬멜은 이집트를 정복하여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에 적극적인 공격에 나서게 된다. 아마도 히틀러가 이러한 롬멜의 의도를 찬성하여 추가적인 병력 파견이 이루어졌다면 영국은 필경 수에즈 운하가 아닌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아시아의 식민지와 연계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이를 수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 지역에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지중해의 제해권을 통하여 독일과 이탈리아를 압박하게 된다. 숫적인 열세로 인하여 결국 롬멜은 훗날 버나드 몽고메리에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입고 이후 북아프리카의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며 연합국은 이러한 북아프리카를 거점으로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하게 된다. 결국 이탈리아는 가만히 있던 영국을 건드려서 오히려 북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가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 머무르지 않고, 그리스 침공을 개시하여 히틀러의 분노를 사게 된다. 역시나 능력에 비하여 꿈이 컸던 탓에 이탈리아는 그리스군의 반격에 고전을 하면서 결국 독일은 그리스 전쟁에도 개입하게 된다. 이 와중에 유고슬라비아는 독일편에 서려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가 젊은 장교들의 쿠데타로 인하여 독일과 전쟁에 돌입하지만 수십만에 달하는 이들 정규군이 오합지졸이었음이 이내 판명된다. 독일의 공격과 폭격으로 유고는 며칠 되지도 않아서 항복을 하였고, 그리스 역시 곧 독일에 함락된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독일의 승리라는 점에서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탈리아의 고전으로 인하여 발칸 국가들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독일이 꽤 많은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1941년 5월에 진행될 러시아 침공이 한 달 늦어지게 되었다는 점은 나중에 독일에게 치명타로 작용한다. 정상적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이 정해진 5월에 이루어졌다면 그해 겨울 모스크바를 수십 킬로미터 앞두고 회군해야 했던 독일이 충분히 접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맹국으로서 이탈리아의 행보는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을 어느 정도 견제하였으며, 실제 이집트이 알렉산드리아항에 이탈리아 잠수정이 진입하여 잠수부가 직접 설치한 폭탄으로 영국 전함에 피해를 입힌 일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이탈리아의 전투력은 기대 이하였다. 그러한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일을 벌린 무솔리니가 가장 큰 문제였으나, 정작 히틀러는 끝까지 무솔리니를 내치지 않았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독재자로서의 동병상련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