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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선(다이샨)과 황태극(홍타이지)

- 누르하치에게는 16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중 대선은 둘째, 황태극은 여덟째로 이복형제였다. 1612년 누르하치의 장남이자 대선의 동복형이었던 저영(추옌)이 그간의 뛰어난 활약을 인정받아 국정을 책임지는 전권을 위임받았으나, 동생들을 포함한 4대 패륵(대선, 망고이태, 황태극, 아민(누르하치 조카))은 물론 5대신을 압박하여 결국 누르하치의 분노로 인하여 연금에 처해진 다음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저영(추옌)이 누르하치의 장남이었지만, 유목민족이었던 이들은 장자 승계를 무조건 따른 것이 아니기에 이후 후계자들의 갈등은 심화된다. 그러나, 대선과 누르하치의 첩 사이에 추문이 돌면서 결국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인물은 여덟째인 황태극에게 돌아간다. 그 자체로도 능력이 출중하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당시 여진 부족 중에서는 힘이 강대한 예허부 출신이었기에 후금의 2대 군주이자 청태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대선황태극이 조선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누르하치가 조선에 대하여 화친을 요청하였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사르후 전투(살이호산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 포로를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때 대선은 그것을 반대하였고, 황태극은 적극 지지하였다. 실제 황태극이 누르하치가 1626년에 사망한 바로 그 다음해에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니 조선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황태극의 시선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광해군 역시 이러한 후금의 후계자 다툼에 관심을 보이면서 경계를 하였지만, 이미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물러났기 때문에 조선에 대하여 호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황태극이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것은 예전된 것이었다. 여기에 정묘호란 이후에도 인조 정권의 외교에 대한 무능과 더불어 이괄의 난으로 인하여 북방의 방어 체계가 약화된 것도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팔기 제도

- 누르하치는 기존의 청, 황, 적, 백, 흑으로 되어 있던 것을 1615년 황, 홍, 남, 백이라는 4개의 색을 기본으로 하여 팔기 제도를 만든된다. 색깔은 4개인데 왜 팔기라 칭하였을까? 기본적인 깃발이 색깔에 테두리를 추가하여 4개의 깃발을 추가하였기 때문이다. 즉, 정황기, 정홍기, 정람기, 정백기양황기, 양홍기, 양람기, 양백기가 추가되어 색깔과 깃발의 형태를 통하여 총 8개의 조직으로 나뉘게 된다. 보통 기의 주인을 도통이라는 명칭으로 일컫지만, 이는 이들 팔기가 전쟁 발생시 지휘관의 개념이고, 실제 기에 속한 주민과 재산까지 소유한 주인은 바로 '화석패륵(원래는 적장자를 제외한 왕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누르하치 역시 이들 팔기 중에서 정황기와 양황기를 소유하였으며, 나머지의 기 역시 그의 아들과 조카들이 소유하였다. 당시 누르하치의 다섯째 아들 망고이태는 팔기 부대의 최정예인 정람기를 직접 지휘하면서 전공을 세웠으며, 황태극은 누르하치를 뒤이어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소유였던 정황기, 양황기는 물론 그의 형이었던 정람기까지 장악하면서 황제의 권위를 높이면서 나머지 화석패륵의 입지를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팔기 제도는 군사제도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팔기 제도는 군정 합일, 군민 일체의 사회 조직 형식으로 군사 정벌, 행정 관리 및 생산 조직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각 기의 내부에는 같은 관료 조직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오로지 황제만이 모든 기에 관여할 수 있었으며 각 기는 서로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서 저영이 죽임을 당한 이유 역시 다른 기의 세력 약화를 꾀하였기에 각 기의 수장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이러한 팔기 제도는 처음에는 만주족에 한하여 이루어졌지만, 중원 진출에 따라 몽고 팔기와 한족 팔기 역시 추가로 조직되었으며 이는 청나라의 근간 조직으로 멸망할 때까지 존재하게 된다.

 

3. 웅정필

1619년 사르후 전투(살이호산 전투)에서 명나라는 요동지방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더구나 조선의 지원군 역시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지도 못하고 후금에 항복하면서 명나라의 요동지역은 되려 누르하치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1619년 6월 10일, 누르하치는 4만 대군을 이끌고 개원으로 출정하였으며, 7월 25일에는 철령에 다다르게 된다. 무능한 양호가 사르후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소환되고 그 뒤를 이어 새롭게 임명된 요동경략은 바로 웅정필이었다. 그는 후금이 기병을 이용한 야전에는 강하지만, 그에 비하여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민심을 수습하면서 철저한 방어 작전으로 일관하게 된다. 그 덕분에 1620년 요동에서의 명나라의 사정은 개선된다. 더구나 여전히 후금은 명나라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열세인 상태였으며, 이러한 상황이 고착화되면 후금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누르하치는 그 시점에 명에 화해를 요청할 정도로 전략을 수정하게 된다.(요하를 국경으로 하자는 그의 화해 요청은 명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성사되지 않는다.)

 그러나, 명 내부의 파벌 싸움으로 인하여 웅정필이 해임되고 원응태가 부임한다. 원응태 역시 관료로서는 청렴하고 능력이 있지만, 병법에는 약하였기 때문에 결국 누르하치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원응태는 전장에서 사망하고, 명의 입장에서 심양을 상실하게 된다. 1622년 명은 다시 웅정필을 기용하지만, 문제는 왕화정을 요동 순무로 임명하여 함께 전선을 맡게 함으로써 명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웅정필과 달리 공격적인 입장을 피력하던 왕화정은 상관인 웅정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몽고와 항장인 이영방의 내응 및 가도에 주둔중인 모문룡의 후방 공격을 믿고 누르하치와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왕화정이 믿고 있던 것들은 모두 누르하치의 속임수였으며, 결국 왕화정은 요동 병력 대부분을 누르하치와의 전투에서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웅정필은 그 패전에 대하여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벌 싸움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명은 스스로 그 운명을 재촉하게 된다.

 

4. 원숭환

- 1626년, 누르하치는 13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인 명나라 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제 명나라의 마지막 관문인 산해관과 후금의 사이에는 영원성이라는 작은 성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명나라는 산해관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였지만, 영원성의 성주였던 원숭환은 영원성이 있어야 산해관을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누르하치와의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병법에 밝았던 원숭환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홍이포를 적극 활용하면서 일찍이 후금이 경험하지 못했던 화력을 통하여 누르하치에게 처음으로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다. 그해에 누르하치는 결국 사망하였으며, 이듬해 그의 아들 황태극(홍타이지)의 공격 역시 영원과 금주에서 격퇴시킴으로써 원숭환은 명의 떠오르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그는 1628년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이 해적질과 조선의 양민을 학살한다는 이유로 그를 호출하여 황제의 허락없이 참형에 처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모문룡의 수하였던 경중명, 상가희, 공유덕은 후금에게 항복하게 된다. 사실 모문룡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입장이 존재하였지만, 그의 부장들이 수군과 화포 제작에 능력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원숭환의 그러한 처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실제 이들의 귀순으로 인하여 청태종은 청의 약점인 수군을 강화함은 물론 홍이포를 제작 및 활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되려 명나라에게 치명타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모문룡의 부하들을 확실히 포섭하거나 아예 같이 처단했어야 했다.)

 원숭환 역시 황제에게 보고를 하지 않고 그러한 일을 단독으로 처리함으로써 엄당(환관) 세력에 빌미를 제공하여 결국 그도 1630년 북경으로 소환된 이후에 처형당하게 된다. 이는 명나라 입장에서도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한 꼴이었다. 영원성을 지키던 원숭환의 부하장수인 조대수가 청에게 항복을 하였으며, 원숭환의 아들 역시 청의 군대에 입대하여 활약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명나라는 1644년 '이자성의 난'이라는 농민 반란에 의하여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의 최정예 병력이 존재하던 산해관에서는 오삼계가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관문을 열어줌으로써 결국 난공불락의 산해관은 어이없이 무너진다. 즉, 명나라는 한족 스스로 자멸한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이자성의 반군을 물리치고 북경에 입성한 청나라는 자결했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장례를 치르면서 명의 복수를 천명하는 명분마저 획득하였으니 이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중원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누르하치

천제셴 저/홍순도 역
돌베개 | 2015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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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청현밍구

    저 이 책 보고 싶었는데, 청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같은 역자이신 홍순도님이 번역한 강희대제, 옹정황제, 건륭황제까지 40권이 넘는 것 같은데 책 사놓고 아직 읽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 저도 보면서 청나라 역사를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청나라는 후계 제도가 제대로 안 되서 늘 후계자 선정 때마다 잡음이 일었죠. 옹정황제는 위조라는 말을 항상 들었구요. 4황자에서 앞에 일을 더 붙여서...
    팔기군 체계까지 다 제대로 봐서 도움 많이 된 포스트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19.09.02 21:41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저도 청나라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띄엄띄엄 책으로 만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으로 청나라 창업의 기반을 다진 누르하치의 삶을 꽤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까치 출판사의 홍타이지에 대한 책도 가지고 있어서 조만간 그 책도 읽어보면 적어도 청나라 초창기의 모습은 어느 정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청나라의 후계자 지명이 미리 지명하지 않고, '광명정대'였던가요. 아무튼 그런 글씨가 쓰여진 액자 뒤에 후계자의 이름을 넣어 둔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옹정제의 경우 야사에 좀 그런 이야기가 많이 있었죠. 중국에서 드라마로도 제작하여 시리즈 전체는 아니지만 그 일부의 내용을 꽤 흥미롭게 본 기억도 나는군요. ^^

      2019.09.03 15:23
  • 스타블로거 異之我...또 다른 나

    팔기군..10대에 열독했던 김용의 <녹정기>가 떠오르네요. 실제로 '팔기군'의 활약을 볼 수는 없지만, '팔기군'이 감춰둔 보물을 챙겨서 [반청복명]을 하려는 위소보의 활약이 주목되는 무협소설이었죠(")

    2019.09.02 23:29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지아님의 독서 범위는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저는 김용문의 예전 영웅문 시리즈(요즈음 사조 영웅전 및 신조협려 등등)를 읽은 것이 전부였는데, 거기에 매료되어 최근 소오강호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녹정기도 많이 들었는데, 위소보가 '반청복명'의 뜻을 갖고 있었군요? 저는 강희제와 친하다는 정도로 좀 가벼운 이야기인줄 알았거든요. ^^

      2019.09.03 15:24
    • 스타블로거 異之我...또 다른 나

      물론 처음에는 없었죠. 한량처럼 굴다가 '천지회'의 수장이 죽은 뒤에야 그의 수제자라는 자각과 자신도 한족이라는 깨우침을 느끼고 아주 소극적으로 [반청복명]의 기치를 올리죠^^

      2019.09.03 16:04
    • 파워블로그 책찾사

      내용 중 '천지회'도 등장하는군요. 그렇다면 위소보의 반청복명에 대한 부분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입니다. 김용의 많은 작품 중에서 소오강호와 녹정기, 천룡팔부는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

      2019.09.03 17:57
    • 스타블로거 異之我...또 다른 나

      김용의 작품 중에서 빼놓지 않고 읽을만한 작품은 총 6편입니다.
      시대순으로 <사조영웅문>,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녹정기>를 읽으면 송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국사'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집니다. 그리고 <천룡팔부>와 <소오강호>는 딱히 '시대배경'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읽으셔도 됩니다.

      그밖에 위 작품들이 '외전'격인 책들이 참 많은데, 위의 6편을 섭렵하시면 '외전'도 쉽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만, 딱히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맛의 품격'에서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에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거든요.

      위의 작품들의 주 배경은 '소림파', '화산파', '아미파', '무당파', '개방파'의 무림고수들이 등장인물이자 배경이랍니다. 이런 '공간배경과 인물배경'들 속에서 각각의 주인공들이 어떤 활약을 하는지 주목하시면 됩니다^^

      2019.09.03 20:07
    • 파워블로그 책찾사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는 확실히 순서대로 읽어야지요. 앞의 두 편은 심지어 등장 인물도 큰 연관관계가 있으니 말이죠. 송나라 말부터 원나라 말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라서 저도 거의 달달 외울 정도로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영웅문> 3부작으로 나왔는데, 요즈음은 저렇게 나오더라구요.
      김용의 작품이 상당히 많은데, 언급해주신 작품만 읽어도 괜찮을 것 같네요. [녹정기]를 비롯하여 모두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

      2019.09.05 07:56
  • 스타블로거 ne518


    누르하치한테 아들이 열여섯명이나 있었다니, 했네요 지금 생각하니 조선시대 왕도 아들이 많았군요 아들이 많으면 왕위 다툼으로 이어지고 실제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했죠 여덟번째 아들인 황태극이 누르하치를 이었군요 그 뒤에 나오는 황제 아들도 싸움을 했네요 다른 것보다 그걸 말하다니 잘 아는 것도 아닌데... 한 나라가 멸망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 일이 꼬이고 말죠 명나라가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


    희선

    2019.09.03 00:27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왕조 시대에는 후계자 싸움은 둘째이고 일단 많이 낳는 것이 미덕이었지요. 그런 점에서 왕건과 세종대왕은 독보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럽에서는 폴란드 왕이었던 아우구스트 2세는 엄청난 난봉꾼으로 무려 자녀가 30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물론 정식으로 인정한 자식은 11명이었지만요.
      명나라의 말기 상황을 보면 전형적인 망하는 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어서 우리로서도 배울 점이 많다고 보여집니다. 국가의 흥망성쇠가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으니 꼭 남의 일로만 볼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2019.09.0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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