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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에센셜 클래식

[도서] 조희창의 에센셜 클래식

조희창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클래식 연주 또는 음반에 대한 평가를 접하게 되면 그저 감상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클래식에 대한 조예에 감탄을 하게 된다. 곡의 해석과 분위기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는 물론 박자를 포함한 연주 그 자체에 대하여 조목조목 비판을 하는 부분은 사실 나로서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 부분들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감상과 관심은 물론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니 나로서는 그들이 대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나와 같은 입장이 오히려 장점이 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왠만한 음반은 물론 누가 연주하더라도 경외심을 갖고 그 음악을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조회창의 에센셜 클래식]을 읽게 된다면 이는 연주자 또는 지휘자의 노고를 전혀 감안하지 않은 처사로도 보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머리와 가슴과 기술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음악은 고통을 받게 되죠. 머리가 없으면 패배자가 될 것이고, 기술이 없으면 아마추어로 떨어지게 됩니다. 가슴이 없으면 연주자는 기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자, 그러니 연주를 한다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은 없는 셈이죠."

 - p. 6 中에서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가 연주에 대한 심경을 토로한 이 대목에서 그동안 연주자의 입장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못한 채 클래식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되돌아보게 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는 그들이 남긴 곡으로 인하여 시대를 불문하고 그 이름이 시대를 불문하고 불멸의 상징으로 남아 있지만, 정작 그 곡을 연주하는 무수히 많은 연주자들은 시간이라는 허공 속에서 사라져가기 일쑤이다. 특히 레코딩이 도입되기 전의 연주는 아예 접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클래식 감상을 곡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연주자에 초점을 맞춰야 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거장이 이룩해 놓은 곡을 연주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악보에 따라 정해진 것을 기술적으로 구현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창작의 고통에 비하면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악보가 말하는 것 그 자체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며, 곡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통하여 다양한 느낌의 연주가 됨을 감안한다면 연주자 또는 지휘자의 고뇌 역시 만만치 않음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그 곡을 연주하는 사람 자체가 많은 변수를 가진 존재이다보니 더욱 쉽지 않다. 특히 이러한 연주자들을 지휘하는 입장이라면 그러한 어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곡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물론이고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컨트롤을 할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다수의 지휘자에 대한 글들이 먼저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라는 캐릭터를 좋아해서인지 나 역시 이 대목에서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통령 앞에서 곡을 지휘하다가 연주 수준이 마음에 들지 않자 지휘 중간에 지휘를 포기하고 무대를 나가버리거나, 곡에 대한 해석은 오로지 작곡가의 의도에 따라야 한다는 강한 입장을 표방하는 그의 과장된 모습은 분명 드라마의 극적인 효과를 최대화하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러한 행동을 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이다. 실제 그는 지휘에 대한 완벽함을 추구한 인물로서 적어도 음악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없이 자신의 주관을 그대로 강행한 인물이었다. 파시스트에 대한 경멸을 보이면서 그들의 당가인 [조비네차] 연주를 거부하였으며, 청중들의 앙코르 요구에 화가 나서 지휘를 중단하고 다음날 미국으로 떠나버린 일화는 확실히 [베토벤 바이러스]가 바로 토스카니니를 상정해두고 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포르티시모를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야. 바로 베토벤이란 말이야."라는 그의 절규는 곡에 대한 해석이 오로지 악보에 근거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며, 동시에 그가 추구하던 완벽주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50개의 교향곡과 관현악곡, 100여 편이 오페라를 비롯하여 수많은 실내악과 성악곡을 모두 외운 그의 신비한 암보 능력은 그의 완벽주의와도 연관됨을 알 수 있지만, 그에 대하여 그는 정작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눈이 너무 나쁘거든."

 

 곡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물론이고 여러모로 토스카니니와 비교되는 인물은 바로 빌헬름 푸르트뱅글러(1886~1954)였다. 내가 즐겨듣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 역시 푸르트뱅글러가 1951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지휘한 음반이기에 그의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앞서 다룬 것과 같이 푸르트뱅글러는 그저 베토벤 교향곡의 지휘자로 알고 있던 것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표준적인 테크닉은 표준적인 예술을 만들 뿐이다."라는 신념과 더불어 영감을 중시한 그의 지휘 스타일은 삶의 발자취와 함께 토스카니니와 모든 면에서 대조를 이루었다. 비록 "세상사에 어두운 얼간이", "진실에 대한 침묵"과 같은 비판을 받을 정도로 나치의 교묘한 선전 수단이 된 어두운 과거도 있었지만, 음악을 악보 그대로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연주자의 감성과 영감에 의하여 새로이 창조될 수 있음을 보여준 그의 생각은 한정된 곡에 다양한 연주자 또는 지휘자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지평을 열어준 인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휘에 대한 부정확한 형태에 대한 비판도 따랐지만, 그것마저도 오히려 연주자의 영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해석될 수 있으리라.

 "푸르트뱅글러는 명확히 박자를 세는 지휘기법이 멜로디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해친다고 말했다. 모나지 않게, 원을 그리는 듯한 팔과 손의 움직임이었다. 그는 기계적인 정확함 대신 모든 것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 p. 63 中에서 -

 

 레코딩이 등장하면서 클래식 역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동안 시간의 허공으로 사라졌던 연주를 바로 음반을 통하여 영원히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연주의 일회성을 강조하는 지휘자도 있었지만,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면서 그 와중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일 역시 지휘자에게 필요한 덕목이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그 상징이었는데, 앞서 푸르트뱅글러가 비록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나치 시대에 베를린에서 줄곧 지휘를 한 것을 부끄러워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스스로 음악을 위하여 나치에 입당하였음을 당당히 밝힌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푸르트뱅글러가 그러한 카라얀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뒤를 이어 1954년에 베를린필하모닉 지휘자가 되었으며, 1955년에는 아예 종신 상임지휘자로 등극하여 1989년까지 지휘하였으니 그의 천재적인 능력은 의심을 받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가 나치 입당과 같은 과오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한 이유는 바로 시대의 변화에 대한 이해와 활용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녹음 전문 오케스트라인 필하모니아를 지휘하면서 레코드 녹음에 주력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하였고, 베를린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된 이후에는 기존의 녹음은 물론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기획하는 등 단순히 지휘자에 머무르지 않고, 음악의 다방면에 걸쳐 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따라서 카라얀은 그 지휘 능력과 더불어 현대의 모든 기업과 정치가 요구하는 덕목인 신기술에 대한 파악능력, 정치적 유연성, 적절한 권위와 자기선전, 대중성, 모든 사업과의 연계 및 확장 능력을 갖추었으니 그는 황제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 역시 다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위대한 르네상스맨'이라는 찬사를 얻은 인물이다. 미국 태생인 그는 뉴욕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자휘자, 피아니스트, 작곡가, 작가, 교육자, 엔터네이너의 삶을 산 인물인데, 카라얀이 레코딩에 주목하였다면 번스타인은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의 위력을 직감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미국의 클래식의 저변을 확장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잘생기고 적당히 통속적이며 화려한 좌파이며 동성연애자"라는 그에 대한 딱지처럼 다양한 방면의 확장은 '잡화상'이라는 비난과 함께 뉴욕필하모닉을 깊이로까지는 인도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는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힘으로 인하여 카라얀의 뒤를 이어 베를린필하모닉의 지휘자에 오르게 된다. 카라얀의 철권 통치에 지친 단원들이 아바도를 지지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아바도는 카라얀의 그리고 카라얀이 상징하는 것의 안티테제다."라는 평가처럼 분명 그의 행보는 이전의 카라얀과는 분명히 달랐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생기게 된다. 카라얀의 독재에 시달리면서 많은 수입이 있었던 단원들이 이제는 아바도로 인하여 민주적이지만 초라해진 수입 앞에서 불만을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지휘자는 확실히 음악만으로 평가를 받기란 어려운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 음악을 연주하는 다양한 인간이라는 변수를 모두 컨트롤을 해야 했으니 이는 음반이 아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신동'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불멸의 이름을 남긴 모차르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하이든과 베토벤이라는 인물 역시 그 활약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보통 천재의 등장과 함께 평범한 사람들은 위축되거나 종속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작곡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과정이기에 천재가 존재하더라도 그 범위는 상당히 넓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야샤 하이페츠(1901~1987)는 연주자에게 천재의 등장은 엄청난 충격을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다.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 당대 명바이올리니스트였던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역시나 유명한 에프레 짐발리스트에게 "자네나 나나 이젠 바이올린을 내던져 박살내는 편이 나을 것 같네."라고 건넨 말은 그대로 현실화된다. 하이페츠의 등장과 함께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곡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함께 다양한 느낌의 연주가 가능했지만, 하이페츠의 그 완벽한 바이올린 연주는 그러한 해석마저도 무색케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이페츠가 없었다면 바이올리니스트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훨씬 낮아졌을지도 모른다는 평가처럼 세계의 모든 오케스트라와 음악학교는 이내 하이페츠의 제국에 속하게 된다. 연주에 있어서 천재의 등장은 분명 작곡과는 달랐던 것이다. 실제 이 책에서 QR코드를 통하여 들을 수 있는 비탈리의 [샤콘느]에 대한 하이페츠의 연주는 윤택한 톤과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게 된다.

 

 1086년 호로비츠의 모스크바 귀향 실황공연에서 연주된 [트로이메라이]를 보면 왜 호로비츠가 위대한 피아니스트인지 별다른 수식없이 느낄 수 있다. 연주는 물론이고 감동에 취한 청중들의 모습은 음악과의 조화를 이룬 감동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클라라 하스킬(1895~1960)에 더 관심이 가게 된다. 평소 모차르트의 곡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편인데, 하스킬이 바로 모차르트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연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연주는 1912년 열일곱 살 무렵에 세포경화증(뼈와 근육이 붙거나 세포끼리 붙어버리는 불치병)에 걸려 이후 8년간의 공백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대단한 것이었다. 병이 후유증으로 심각한 외모의 변화를 겪었으며, 유대인이기에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하여 극도의 공포와 피곤으로 인해 뇌졸중까지 걸린 그 고독한 피아니스트는 몸소 음악이 인간에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존재이기도 하다. '몸이 뒤틀린 잿빛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진 마녀와 같은 모습이 연주가 시작되면서 카라얀의 존재를 망각하게 되고, 눈물이 흘러내리게 되었다.'라는 니콜라예바가 토로한 하스킬에 대한 기억은 하스킬에게 음악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지휘자 또는 연주자에 있어서 공연이란 관객과 직접적인 소통의 장이자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연의 일회성을 완전히 무시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글렌 굴드(1932~1982)였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있어서 항상 그의 연주가 추천될 정도로 바흐의 곡에 대한 피아노의 연주에서 뛰어났던 그는 "아주 넓은 연주회장에서 바흐를 연주해야 할 경우엔, 꼭대기 층에 있는 사람들가지 들을 수 있도록 곡을 과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공연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실험실의 피아니스트'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레코드란 그가 담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기록하고 남기는 그릇이라고 생각한 굴드의 모습은 공연과 레코딩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굴드의 행적을 보다보니 자연스레 기타를 클래식의 반열에 올린 안드레스 세고비아(1893~1987)의 모습 역시 자연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바이올린은 4줄이고 기타는 6줄이다. 그런데, 바이올린이 하는 것을 기타가 할 수 없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는 평소의 신념과 함께 그는 현을 퉁겨야 하는 발현악기라는 기타의 특성상 그 음이 기본적으로 '점묘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노래하듯이 그러한 점묘적인 단절성을 극복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를 그의 연주로 들어보게 되면 첫 시작은 마치 피아노로 치는 듯한 착각이 들정도이니 그의 신념이 연주로 표현되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동일한 곡에 대한 연주, 지휘로 인하여 이들은 서로 비교되는 관계 속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더구나 동시대에 활동이 하게 된다면 그들의 경쟁은 또 하나의 숙명이 될 수밖에 없다. 마리아 칼라스(1923~1977)와 레나타 테발디(1922~2004)가 이 책에서 등장하는 대등한 라이벌 관계로 설정되고 있다. '칼라스의 목소리는 '놀랍다, 감동적이다'라고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아름다운 소리'라고 말하긴 힘들다. 이에 반해 테발디는 '타고난 목소리의 미인'이었고, 칼라스의 영원한 안티테제였다.'라는 둘의 비교 평가만 보더라도 그들이 당대의 라이벌로서 치열하게 경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테발디보다는 칼라스에 대하여 익숙한 편인데, 그녀의 풍부하면서도 극적인 연기는 물론 삶의 드라마틱한 굴곡이 아마 그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오페라는 목소리와 더불어 연기적인 측면도 함께 평가될 수 있기에 둘의 라이벌로서의 평가에 대한 답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조희창의 에센셜 클래식]은 25인의 마에스트로에 대한 삶을 다루고 있다. 그들의 연주, 지휘가 담긴 명반은 물론 직접 들을 수 있는 소개도 언급하고 있지만, 책의 대부분은 글을 통하여 오롯이 그들의 행적과 스타일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는 셈이다. 비록 음반으로 들을 수 있지만, 그들의 행위는 일회성일 수밖에 없다. 같은 곡을 다시 연주 또는 지휘하더라도 분명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악보와 같이 그들을 남길 수 있는 것은 기술 덕분에 이제는 음반이라는 수단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수많은 활동에 비한다면 그 역시 그리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다시 그들의 연주를 마주한다는 것은 그들을 기억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하여 나 역시 생각을 조금 바꿔야할 것 같다. 그저 듣는 것에 만족하면서 딱히 누가 연주하는 것이 중요하냐에 대한 생각이 그들의 삶과 노력을 전혀 감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그들의 다양한 연주(지휘)를 감상하는 것을 단순히 비교 또는 평가가 아닌 그들의 삶의 흔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아마 그것이 음악을 감상하는 진정한 의미일 수 있을테니까.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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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고독한선택

    리뷰 제목 중 글쓴이의 이름을 손 보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2019.11.29 13:19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아, 감사합니다. 오전에 정신없이 쓰다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네요. ^^;;

      2019.11.29 15:38
  • 스타블로거 추억책방

    책찾사님 리뷰로 읽은 내용을 다시 되새겨서 좋네요. 저도 책은 며칠 전에 다 읽었는데 감기몸살로 쓰지 못했어요. 주말에나 리뷰를 써야할 것 같아요. 이 책을 통해 클래식 작곡가가 아닌 그 곡을 더욱 빛내주었던 연주자와 지휘자들에 대한 삶과 노력을 알게 되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반가운 인물도 있었고, 전혀 모르고 있던 인물들도 알게 된게 이 책을 읽은 보람 같아요.^^ 책찾사님~ 돌아오는 주말도 가족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2019.11.29 20:23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안그래도 추억책방님이시라면 분명 이 책을 다 읽으셨을텐데 감기 때문에 리뷰가 올라오지 않는 것 같더라구요. 덕분에 저로서는 주말에 추억책방님의 리뷰를 만날 수 있으니 기대가 됩니다. 저 역시 25인의 마에스트로 중 알지 못하는 분들도 많이 있어서 새롭게 배우고, 클래식에 대하여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정말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러모로 유익한 책이었던 것 같아요. ^^
      추억책방님도 가족분들과 함께 즐거운 주말 만끽하시길 바랄께요. 저는 다시 처가로 갈 예정이거든요. ㅎㅎ

      2019.11.29 22:14
  • 스타블로거 異之我...또 다른 나

    우와~ 암튼 예술가들의 완벽주의는 대단합니다. 예전에 '예술은 대중화 될 수 있는가?'란 주제로 토론을 수업했던 기억이 나네요. 예술성을 강조하다보면 예술가 집단만 이해하는 '천상의 예술'이 자칫 '그들만의 예술'로 치달을 수 있고, 예술을 대중화시키면 '수준 저하'가 되어 예술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으니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건가? 라고 풀어보았었죠(")

    2019.11.29 22:0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예술은 대중화 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가 참 흥미롭네요. 자못 그 결과가 정말 궁금합니다. 지아님 말씀처럼 예술성의 추구와 대중화의 균형있는 조화가 진정 예술이 그 영속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는데, 두 가지의 관점을 통하여 그러한 점을 살펴보고 어떠한 결론을 이끌어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책에서도 카라얀과 같은 인물은 예술과 상업성의 접목에서 기막힌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는데, 그에 대한 평가도 호불호가 갈리고 있으니 그 주제에 대하여 결론을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2019.11.29 22:17
    • 스타블로거 異之我...또 다른 나

      맞아요. 토론에 정답은 없지요. 예술성만 추구하는 꼰대도 되지 말아야겠지만 돈벌이로 전락한 저급한 예술 또한 지양되어야 한다는 '모범답안' 사이에서 창의적인 대답이 나와야 하는 거죠^^ 대입논술의 기본 골격이랍니다.

      2019.11.30 00:06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