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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만지다

[도서] 우주를 만지다

권재술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저 하늘의 별은 사람들에게 아련한 고향의 추억 같은 존재다. 시인에게는 시상이고 연인에게는 사랑이고, 외로운 이에게는 동무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철학자에게는 우주와 인간을 연결해 주는 사색의 다리가 된다.

 - p. 18 中에서 -

 

 과학을 연구하고 또 그것을 가르치는 데 대부분의 삶을 보낸 노과학자의 책 『우주를 만지다』는 다루려는 대상이 과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을 돌아보며 느껴지는 것들을 과학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들은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이라는 부제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던 과학을 인생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급격한 인구 증가와 제한된 공간으로 인하여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지구가 아닌 우주에서 새로운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등장하는 가운데 과학은 그것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대안으로 자주 활용된다. 우주 여행은 가능한지, 또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과연 있는지를 납득시키기 위하여 과학이 동원되고 우리는 거기에 대하여 그러한 계획에 어느 정도 신뢰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을 그저 진지한 과학의 이야기로만 다루려 하지 않는다. 인간을 방랑자로 표현하며 더이상 이 방랑자들이 지구를 방랑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인류가 방랑할 곳은 우주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여느 과학자와는 확실히 다르게 느껴진다.

 

 과학을 일상에 접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현상을 그저 과학의 원리로 설명하는 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까? 현재와 과거, 미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각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저자는 우리가 보는 별빛이 아주 오래전의 별빛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는 공존하며 이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다소 아리송하게 들린다면 또 다른 일상의 모습을 한 번 떠올려 보자. 1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모습은 현재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빛의 속도(초속 30만킬로미터)를 감안한다면 현재 그 연인들이 보고 있는 모습은 10억 분의 3초 전의 모습이고, 소리의 속도(초속 340미터)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들이 듣는 상대방의 목소리는 0.003초 전의 목소리인 셈이다. 지극히 과학적인 이러한 설명에 그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현재와 과거를 명확히 구분한다는 것은 오히려 과학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과학자이면서도 오로지 과학만을 찬양하지 않는다. 앞서 시간의 구분처럼 과학에 의한 경계선을 나누는 일언어를 통하여 새롭게 발견한 것들에 대하여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부분은 젊은 과학자로서의 혈기와 자부심을 누르고 이제는 삶과 과학을 보다 조화롭게 바라보는 노과학자의 연륜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1392년 8월 5일을 우리는 조선의 건국으로 배우면서 이 날을 경계로 조선과 고려를 나누고 있지만, 정작 그날 백성들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과정을 직접 느끼고 있었을까? 이와 같은 경계를 나누는 것에 대한 문제를 통하여 오히려 경계의 모호함의 의미를 이끌어가는 과정은 왠지 모르게 기존에 알고 있던 과학을 달리 느껴지게 만든다.

 

 경계가 이렇게 모호하다는 것은 세상만사와 세상 만물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물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고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통합된 하나를 인간의 분별지심으로 갈라놓고 있다.

 - p. 47 中에서 -

 보통 새로운 것을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고 그것을 과학 이론으로 구축하는 과정은 일종의 경계선을 만들어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오히려 경계의 모호함을 철학적으로 설파하고 있으니 흥미롭다. 이를 통하여 전혀 별개의 것으로 느껴졌던 과학과 철학의 경계가 무의미함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언어 자체가 사물에 가하는 인간의 폭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다, 더럽다, 크다, 작다 등 언어 자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이다. 이 허구적인 관념으로 사물을 규정해 버리니,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언어가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p. 70 中에서 -

 과학에서 새롭게 발견된 것들에 대하여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과학자에게는 대단한 영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언어를 인간의 폭력이라 말하며 이에 대하여 우회적인 비판을 가한다. 특히 명왕성을 태양계의 행성으로 명명하다가 최근 그것을 행성에서 제외를 시켰으니 이 역시 일종의 언어를 통한 인간의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점은 그의 생각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끔 하고 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여 '명왕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가 지금은 다시 행성에서 제외를 하고 있으니 '명왕성'은 그 본질과는 관계없이 인간에 의하여 수시로 그 의미가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과학에 대한 노과학자의 뜻밖의 생각은 거꾸로 과학을 통하여 철학적인 의미를 이끌어내거나 설명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본인 스스로 경계의 모호함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이를 통하여 과학과 철학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암기 교육의 덕(?)분에 지구의 자전축의 기울기가 23.5도라는 점과 그 유명한 아보가드로의 수가 10의 23승이라는 내용을 과학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적인 사유로 확장시킨 부분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삐딱한 지구, 이 삐딱함이 사계절을 선물했다. 항상 곧고 바른 것이 좋은 것만이 아니다. (중략) 지구가 이렇게 삐딱하게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계절이 없었을 것이고, 지구가 돌지 않았으면 밤낮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 p. 56 中에서 -

 그렇다! 그저 암기로 머릿속에 남아있던 자전축의 기울기에 따른 현상이 결과적으로는 시간을 만들어냈다라는 노과학자의 생각은 확실히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변화는 결국 시간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변화가 없었다면 시간이 만들어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보가드로의 수는 어떠한가? 10의 23승이 얼마나 거대한 수인지를 망각한 채 그저 원자가 이 숫자만큼 모여야 인간이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거시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알고 있던 우리에게 이 엄청난 크기의 숫자는 인류를 하나로 묶는 철학적인 메세지로 바뀌게 된다. 우리가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믄 것은 서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는 흔한 철학적인 메세지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것을 한 인간이 내쉬는 공기 속에 무려 10의 23승개의 공기를 이루는 분자들이 들어있으니 이 분자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들이마쉬는 공기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 또는 상대방이 내쉬는 숨에 포함된 분자가 어느새 서로의 허파로 공유되고 있으니 아보가드로의 수는 너와 나를 우리로 만드는 '마법의 수'가 된 것이다.

 

 자전축의 기울기와 아보가드로의 수와 같이 과학적인 지식을 어떻게 이런 철학적인 메세지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것일까? 저자에 대하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반인에게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우리 일상의 모습으로 치환시키는 부분을 보면 아마도 저자는 과학과 일상 또는 철학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전자나 원자와 같은 작은 입자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그 불확정성의 원리를 일상에서 그 누군가를 깊이 관찰하면 상대방은 그것을 의식하여 자신의 본질을 감추거나 교란시키며, 또 관찰을 소홀히 하면 되려 그 실상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의 실제 상태를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과학은 어렵다.' 또는 '과학은 그들만의 분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 책 『우주를 만지다』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노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과 삶의 이야기를 통하여 과학이 명확한 경계선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영역과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철학적인 사색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영역에 도취하여 그 이외의 것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노과학작가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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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cOcOgOOn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리뷰를 보니 새록새록 기억이 나네요!ㅎㅎ

    2020.10.27 14:54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맞아요. 보통 과학이라고 하면 딱딱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마치 에세이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의 내용들을 연상시킬 수 있어서 확실히 재미있더라구요. ^^

      2020.10.28 15:51
  • 스타블로거 삶의미소

    사물에 가해지는 언어적 표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전에 읽었던 책에서 우리가 색을 규정하며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니 검은색은 나쁜 것, 지저분한 것이 되어 피부색과 관련된 인종차별이 벌써 색에서 나온다고요.
    과학서적이지만 좀 특별한 과학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 같네요 ~~
    리뷰 잘 보았습니다^^

    2020.10.27 14:5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저도 언어의 또다른 면을 과학적인 내용을 통하여 드러내는 부분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과학과 철학이 서로 경계를 허물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의미를 보다 넓게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과학에 대한 책에서 언어의 폭력적인 부분을 다룰지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구요. ^^

      2020.10.28 15:52
  • 스타블로거 ne518


    과학은 이 세상 나아가서는 우주를 알려는 것이기도 하네요 오래전에는 철학과 과학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지요 학교 같은 게 생기고 여러 가지로 나뉘었다는 말이 있기도 하던데... 고대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보고 듣지 않고 아주 넓게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람은 나누는 걸 좋아하죠 그게 편하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나누지 않고 다른 것도 받아들이면 좋을 텐데...


    희선

    2020.10.28 01:53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찾사

      그러고보니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철학자이면서도 과학자인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당시에는 그를 과학자니 철학자니 구분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세분화하여 경계를 나누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론 그로 인하여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의 이면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20.10.28 15:55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