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바람이 분다, 걸어야겠다

[도서] 바람이 분다, 걸어야겠다

박지현(제주유딧) 글,그림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내가 제주도를 마지막으로 찾은 것은 2009년 11월이었는데, 당시 제주도는 사실 걷기와는 그다지  잘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대중교통도 그리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차를 렌트하지 않으면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제주도가 관광도시였지만 띄엄띄엄 존재하던 그 관광명소를 머무르는 동안 걸어서 방문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해안선을 따라 제주도 전역을 돌아볼 수 있는 올레길이 조성되면서 이제 제주도는 걷기로 각광받는 곳이 되었다. 『바람이 분다, 걸어야겠다』의 저자 역시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제주도에 정착한 이후에 총 26개 코스(총 425km)의 올레길을 완주하였고, 그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제주도로 이끌고 또 올레길을 걷게 한 것일까?

 

 나는 마음속에 무인도 하나를 안고 살아왔다. 상상 속의 무인도를 현실에서 찾으려 했다. 제주는 무인도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산 곳 중 마음이 가장 편하다. 제주에 온 후로 거의 평생이라 할 만큼 긴장하고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걷기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p. 326 中에서 -

 '마음속의 무인도', '제주', '걷기 여행'이라는 키워드를 보는 순간 저자가 왜 제주로 향했고, 또 그곳에서 끊임없이 걸었는지 공감하게 된다. 나 역시 비록 지금은 올레길이라는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걷는 동안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을 알기에 저자의 걷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걷기를 이 책의 그림과 글로 만나는 저자의 걷기에 투영해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밀한 묘사를 통하여 아직 가보지 못한 제주의 26개 코스의 올레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걷는 과정에서 떠오른 저자의 생각의 흐름을 좇는 과정이 더 끌렸다. 왜냐하면 그녀가 단순히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끼기 위하여 제주의 올레길을 걸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는 처음 올레길의 여정을 시작했을 때, 확실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제주에 온 것인지 심지어 빗속에서 올레길을 걸으면서도 왜 걸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원해서 제주에 왔는지 제주가 원해서 오게 된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오늘은 온종일 빗속을 걸었고, 나는 아주 오랫동안 걷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문득 혼자 있고 싶어도 혼자 있을 수 없었던 지난날의 내가 떠올랐다.

 - p. 79 中에서 -

 

 각 코스를 걸으면서 차곡차곡 올레길 완주라는 목표에 다다르고 있었지만, 정작 저자의 의식의 흐름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으로 점철된 선택으로 길을 나섰지만, 길을 걸을수록 시간은 점점 과거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올레길 초반에 저자가 낯선 사람을 기피하는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끼게 된다. 오래전 내가 지리산 종주를 할 때, 비록 처음 본 사람이라도 종주길에 마주치면 "수고하십니다."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동시에 종주를 격려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래서 나를 알아가는 '나만의' 여행을 시작했다. 오로지 '나'와 동행하는 시간인 셈이다. 이 시간을 갖기 위해 아주 많은 걸 버리고 멀리 왔다. 그러니 지금은 낯선 이와 내 시간을 나누고 싶지 않다.

 - p. 166 中에서 -

 단호함마저 묻어나는 타인과의 마주침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보며 다소 의아해했지만, 사실 저자는 열 네살의 아픈 기억에 대한 트라우마 극복을 잠시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변화 내지는 절제하는 노력이 필요한데, 초반 걷기의 과정에서 그러한 시도를 하기에는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걷기는 마냥 즐거움만을 찾기 위한 여정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책에서 묘사하는 올레길의 모든 풍경을 그저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드넓은 바다와 다양한 오름, 그리고, 토속적인 제주의 옛모습과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일어나는 그녀의 감정과 의식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걷기가 거듭될수록 아픈 기억에 대한 그녀의 트라우마는 조금씩 치유되면서 과거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하늘과 바다, 숲과 오름을 걸을 때 모든 감각이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되면서 외로움을 지울 수 있게 된 것이고, 저자는 점점 그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과거가 아닌 현재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과거에 얽메이지 않고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는 오늘을 사는 것. 그것은 곧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오늘부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 (중략) 신의 가호 아래 내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 현재뿐이다.

 - p. 170 中에서 -

 

 이러한 의식의 변화로 인하여 저자의 걷기는 사뭇 달라진다. 타인과의 만남을 꺼려하면서 그저 혼자만의 시간을 갖던 시선은 주변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름 명소로 자리잡은 제주의 의자공원에 마련된 다양한 디자인의 의자보다 행복 쉼터에 놓인 나무 둥치와 낡아서 한 쪽이 기울어진 의자가 더 편안하다고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소박하지만 친절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저자의 모습은 처음 올레길을 걷던 모습에 비하여 생각의 방향과 깊이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낯선 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계를 거두면서 조금씩 그 틈을 줄이려는 모습은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걷기를 통하여 어느 정도 떨쳐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걷기 여행은 아주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올레길은 모두 스물여섯 개의 코스가 있으니 완주를 하면 경험을 확장시키고 나를 성장시키는 스물여섯 권의 책을 읽는 셈이다. 오감으로 만나는 감각은 감성을 섬세하게 자극시키고 수없이 걸으며 만나는 자연과 세상, 사람들 그리고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 p. 331 中에서 -

 제주 올레길의 모든 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스물여섯 권의 책을 읽은 것에 빗대어 말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성숙한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결국 저자의 걷기는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삶의 여정을 압축한 것이었다. 길을 걷는 순간은 물론 제주에 오기 전에 저 멀리 제주 밖에서 제주도를 바라보던 모습과 그 과거의 모습을 이제 제주에서 거꾸로 마주하는 그 순간을 음미하는 저자의 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바람이 분다, 걸어야겠다.

 그 바람이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바람일 수도 있고, 또 지친 삶의 한 순간에 잠시나마 찾아오는 여유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먹기에 따라서 걷기를 부르는 그 바람을 우리 스스로가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픈 기억에 대한 트라우마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여 저자는 새로운 공간으로서 제주를 찾았지만, 걷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 역시 꼭 제주도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주변을 걸으면서 저자와 마찬가지로 많은 생각의 시간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주문과 같은 '바람이 분다, 걸어야겠다'를 되뇌이면서 나 역시 기꺼이 그 걷기에 동참해 본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