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기묘한 이야기로 느껴졌던 내용이 실상은 우리의 현실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다시금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도 부제를 마주하는 순간 읽었던 내용들이 재배치된다는 사실은 글을 읽을 때, 어떠한 관점을 갖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필경사 바틀비>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허먼 멜빌의 이 단편소설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 잘 부합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모비딕>과 더불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의미가 내포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 작품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었다는 생각이 들기에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로 만나볼 수 있게 된 점은 행운이 아닌가 싶었다.
이미 작가와 제목에서는 자주 들었던 터라 성급하게 읽기 시작해서일까? 처음에는 바틀비라는 필경사의 이야기가 자못 기묘하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화자인 변호사에게 고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일체의 일들을 거부하는 그의 모습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현실에서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기에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왠지 당연해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화자인 변호사는 이러한 바틀비의 납득할 수 없는 모습에 대하여 나름의 배려와 기회를 주지만, 바틀비는 이상하리만큼 그러한 변호사의 호의를 철저히 무시 내지는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사무실에서 아예 기거하는 바틀비에 질린 변호사는 오히려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까지 바틀비를 피하는 모습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든다.
결국 부랑아 수용소에서 끌려가서 거기에서도 일과 식사를 거부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는 바틀비의 삶은 읽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그는 왜 일을 거부한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다시금 책의 처음으로 되돌아간 나에게 <Bartleby, the Scrivener : A story of Wall Street>라는 제목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갑자기 읽었던 내용들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통상 <필경사 바틀비>라는 제목만을 보았는데, 부제의 '월 스트리트의 이야기(A story of Wall Street)'를 보면서 한 남자의 기묘한 이야기가 아닌 월 스트리트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순과 비참한 근로자의 삶을 꼬집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다시 읽을 필요도 없이 바로 이 짧은 부제를 통해서 말이다.
바틀비가 고용되기 전부터 일하고 있던 두 명의 필경사 터키와 니퍼즈에 대한 이야기부터 생각해보자. 한 명은 오전에 다른 한 명은 오후에만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둘의 모습도 달리 보이게 된다. 이 둘은 완벽하게 제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의 반만 제대로 일을 하는 셈이다. 부제를 보기 전에는 이들을 고용한 변호사가 나중에 바틀비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단점을 눈감아주고 배려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적은 비용으로 이 둘을 고용할 수 있다는 효용성이 부각되면서 변호사의 철저한 관리자의 모습으로 보여지게 된다. 바틀비 역시 싸구려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모습은 그의 기행이 아니라 최소의 비용으로 근로자를 고용하여 최대의 효과를 내려는 변호사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중략) 내 사무실은 불투명 유리 접이문으로 구분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내 필경사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내가 차지했다. 나는 기분에 따라 이 문을 열어놓기도 하고, 닫아 놓기도 했다. 나는 접이문 옆의 한 구석에 바틀비를 배치하되 내 구역 쪽에 두었다. 사소한 일을 해야 할 때 이 조용한 남자를 편하게 부르기 위히서였다. (중략) 한층 만족스러운 배치를 위해 나는 키가 높은 초록색 접이식 칸막이를 세워 바틀비를 내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하되, 내 목소리는 들릴 수 있게 했다.
- p. 32 ~ 33 中에서 -
변호사가 자신의 사무실의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는 부분을 보자. 단순히 변호사가 운영하는 사무실의 배치도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 공간을 당시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으로 확장하고 나면 자본가 또는 경영인들이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하여 근로자들을 자유롭게 배치하고, 근로자는 이에 순응해야 하는 불편한 모습으로 비춰지게 된다. 시야를 차단하되 목소리는 들려야 한다는 변호사의 말은 오로지 근로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만이 존재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유용해. 나는 그와 잘 지낼 수 있어. 내가 그를 내쫓는다면 그는 나보다 덜 관대한 고용주에게 걸려 거칠게 다뤄지다 불쌍하게 쫓겨나 굶어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아. 그래, 나는 싼값에 즐거운 자기 긍정을 살 수 있어. 바틀비의 편을 들고 그의 이상한 고집을 너그럽게 봐준다해도 내가 지불해야 할 비용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내 영혼에는 장차 양심에 달콤한 양식이 쌓이는 거야.
- p. 41 中에서 -
일을 거부하는 바틀비에 대하여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던 변호사의 내면은 이처럼 그가 유용하다는 점과 더불어 그러한 관대함이 자신의 최소한의 양심에 명분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 대목은 근로자를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과 자기만족에 근거한 것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변호사의 자비심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위선적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변호사는 당시 자본사회의 고용주 내지는 자본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에게 고용된 필경사들은 자본주의의 위계 질서와 비인간적인 사회구조의 희생양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틀비가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로 일을 거부하는 것은 그러한 암담하고 모순적인 사회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동적인 저항의 의미로 변이된다. 이러한 최소한의 수동적인 저항에도 크게 당황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당시 자본주의의 모순과 구조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바틀비의 이러한 수동적이 저항을 의미하는'싶은'이라는 단어가 주위 동료들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에 경기를 일으키는 변호사의 모습 역시 근로자의 노동 운동을 두려워하는 자본가의 모습으로의 변이로 보여지게 된다.
부제를 통한 이러한 내용의 변이는 멜빌의 이 작품이 왜 보르헤스의 눈길을 끌었는지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에 착안하여 이 작품을 그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필경사 바틀비>는 꿈의 상상력이 낳은 한가로움 혹은 기교 이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것은 세계의 일상인 아이러니들 가운데 하나인 '허무함'을 보여 주는 슬프고 진실한 작품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