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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즈만이 희망이다

[도서] 퓨즈만이 희망이다

신영전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의료인이 쓴 사회비평서는 처음이다.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바쁜지, 고단한지, 상상만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데 하물며 글 쓸 시간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컸다. 주로 종합병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 드라마를 통해 의료 환경을 상상한 탓도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의학 에세이의 출간이 잦아진 것 같다. 대부분 자신의 의료현장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 소회 정도의 책을 읽었다. 의사가 쓴 에세이도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의 비중이 높다는 생각을 했고. 의사가 쓴 사회비평서를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점이 이 책이 나를 사로 잡은 결정적 이유다. 결정적이진 않지만 원초적인 자극으로 책에 눈이 가게 만든 건 표지였다. ‘뒷모습유화 시리즈가 책 표지로 자주 쓰이는구나. 왜 질리지 않을까. 특히 인문서의 경우 독자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좋은 것 같다. 지적이고 무거운 내용을 덜어줄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표지가 책의 균형을 맞추어 주는 듯 하다.

 

 

 

 

이 책은 의료복지나 의료 시스템과 국가 정책, 의료 연구, 세계 의료 환경까지 다룬다. 귀한 내용들이다. 바이러스 시대에 살면서 이제야 국민들의 관심이 의료 정책 전반에 가기 시작했다. 이재갑, 기모란 교수 등이 방송에 꾸준히 나와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의료 환경에 대해 진지해 보는 건 더 뒤로 밀렸을 것이다. 방송에서 누군가 역할을 했다면 출판계에서도 누군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상당히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내용이라 나의 시선이 대폭 확장될 수 있었다. 한 국가의 의료 정책에서 머물지 않고 세계 보건 의료까지 확장된다. 백신이 개발되어 바이러스가 치료되고 질병의 완치율이 높이면 좋겠다는 수준의 의료 분야의 바람이었는데 얼마나 비좁은 생각과 무심함으로 살아왔는지 알게 됐다. 내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쳐준 책이다. 큰병이 걸린 가족이 있어 보니 의료 보험의 중요성, 대형병원의 시스템, 도농 간 의료 격차 등을 경험적으로 체감했다. 이러한 체험 위에서 읽은 책이라 더욱 와 닿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늙고 병들었을때서야 알게 되었겠지.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가 참 잘되어 있다 정도로 알고 있었다. 어쩌면 가족 중에 지병이 있는 환자가 없었고, 지금은 지병이 있는 가족이 있어도 경제적으로 부담되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이고 생계가 우선인 계층에 속했다면

 

 

의료 민영화는 계속 나오고 있는 이야기다. 대표적인 비교대상국 미국을 들먹이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공병원이 흑자를 내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93)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아 맞네, 싶었다. 병원도 기업이다, 라는 정서가 내게도 강했던 것이다. 진주의료원 폐쇄를 당하고서야 (서부경남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건 당한 거다.)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홍준표의 논리 중 하나 걸렸던 것, 쌓여가는 적자 부분 들을 때마다, 심정적으로는 그래도 의료원을 폐쇄하는 건 아니라고 해도 적자는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제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안해도 되겠다. 그래 맞아, 공공병원이 왜 흑자만 나야 해? 공공성을 가장 갖추어야 할 부분이 국방, 치안, 복지(교육, 의료)인데 말이다. 패러다임이 전환되게 해준 신영전 교수님, 감사합니다!

 

이 책의 1장은 무조건 강추한다. [없다] 시리즈의 글묶음 장인데, 읽는 내내 문장의 간결함, 그 속에 뼈때리는 말들을 부드러운 수프처럼 조심조심 마시게 만든다. 우월한 생이 없고, 건강이 없고, 노인이 없으며, 자살, 사랑, 희망, 심지어 나쁜 바이러스도 없다고 하는데 왜 없는지를 전혀 생각지 못한 논리로 설명하시니 바로 몰입하며 읽고는 설득당해버렸다.

또 읽어야 할 부분은 챕터 말고, 몇 가지 글이다. 1331[정치인의 칫솔과 유전자검사], 134[대통령 앞 사직서], 189[그때도 그랬다]는 다시 읽어보려고 체크해 두었다.

 

서문을 읽고 2000년대부터 2020년까지의 글을 모았다는 것을 알았다. 글 순서가 시간 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묶였기 때문에 약간의 혼란은 있었다. 내가 지금 살아내고 있는 최근 5년 이내의 상황만 되어도 이 혼란은 덜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있겠거니, 하며 읽었지만 10년 전 글들은 다른 시기의 글들에 비해 어렵게 여겨졌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의 의료 정책 비판이 많이 실렸는데(체감적으로) 이게 내용의 어려움 때문인지, 노무현 대통령 때 이렇게까지 글을 쓰셨냐 하는 아쉬움 때문인지 나도 정확히 잘 모르겠다. 그땐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쳐도, 대통령의 죽음에 언론의 역할도 한몫했다는 것을 다 아는 현시점에선 그때의 글들을 굳이 소환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좁은 생각이 들었다. 내용보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은 내 의지로 제어가 되진 않았다. 객관적으로 글을 읽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당부하며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 내 생각엔 의료 정책이나 의료 제도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년 전 글들도 소환해야 맥락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건의료계의 전문가이니 나의 불편함보다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책을 통해 새 세상을 연다. 내 머릿 속에 새 방이 하나 또 생긴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의료 현실과 불평등, 자살, 자본, 역사, 평화 등을 어떻게 연결해볼 생각을 했을까. 의료계로 한정하여 생각하던 것이 느슨한 형태로 확장되었다. 서로에게 연민을 가지는 태도로, “평등이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논리가 하나의 상식처럼 얼른 자리 잡길 바란다. 퓨즈만이 희망이라는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 사회의 퓨즈를 잘 돌보아야 한다. 구리철사로 땜질을 하면 사회 전체가 불타버릴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단기적이고 단면적인 인과관계에 매몰되지 말고 인류가 만들어낸 구조 전체의 엮음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에 동의한다. 내 머릿 속 새 방이 생긴 이유다. 건강정치학의 기록물을 남긴 저자에게 감사하다. 그것이 아픔의 연대를 출발시키는 출발 총소리가 될 수 있기에.

 

 

바이러스는 우리 몸과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먼저 찾아간다.”(48)

아픔의 적은 무감각입니다.”(50)

사회가 어려워지면 어김없이 차별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차별의 미화로 쉽게 진화한다.”(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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