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지난겨울, 한 조간신문에 실린 철학자 문광훈의 칼럼은 오랫동안 사고의 반추를 이끌었다.(중략) 우리의 상황을 반영하듯, 문광훈은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지도자의 덕목을 묘사했다.
(중략) 문광훈은 불합리한 체제와 그 체제 아래서 고통받는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과 성찰 속에서 디킨스가 말하고자 한 바가 결국 '공동체의 품위'가 아니었겠느냐고 되묻는다. (중략)
문광훈은 그것이(먹고 살 수 있는 권리와 계속 일할 권리) 실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아니겠느냐고 묻는 것 같다. 그래서 블랙풀처럼 삶과 유리된 이념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간하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좀더 옳은 일을 선택하고 조용히 자기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사회, 품위 있는 공동체는 그런 고결한 마음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겠느냐고. 나아가 실력과 정직 그리고 공적 헌신의 태도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삶에 녹아 있는 기품 있는 사람이 이 땅의 정치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필자는 그의 바람이 이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37-238쪽)
하필 이 시점에 『애완의 시대』를 읽었다. 마지막 부분의 내용이 더 눈에 들어온 것은 말하면 입만 아프다. 실력과 정직 그리고 공적 헌신의 태도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삶에 녹아 있는 기품 있는 사람이 이 땅의 정치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 라는 대목이 무색하다.(이 책은 2013년에 출간 됐다.) 기품있어 보였던 대통령은 가짜였다. 우리는 또 다시 소수의 기득권에 손에 놀아난 것이다.
『애완의 시대』가 말하는 애완은 사전적 의미로의 해석을 인간에게 갖다 붙이면 된다. 한국 전쟁을 경험한 부모 세대(물리적 전쟁 당시 또 시기적으로 가까웠던)와 그 부모의 통제 아래 외환위기를 관통하며 자란 자식 세대를 아울러 애완의 시대라 명명한다. 부모 세대의 특징은 국가 권력에 길들여졌다는 것이고 자식 세대는 그러한 부모의 통제에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주체성과 독립성의 특징보다 의존적이고 눈치 보는 세대가 자식 세대의 특징으로 본다. 예외까지 굳이 여기서 들먹이진 않는다. 관찰과 연구를 통해 전반적인 특질을 잡아낸 것이다. 나도, 딱 여기에 속하는 세대다.
우리 부모님 중 아버지는 한국 전쟁 당시 아기였고 어머니는 전쟁 이후 황폐화된 시기에 태어나셨다. 경제활동 인구로 편입된 20대때는 서슬퍼런 박정희 유신 정권 아래에서 '산업화'를 기치로 내걸로 죽자 살자 일을 했던 세대이다. 부모 세대의 청춘은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의 시대였다. 고도 성장의 1980년대 유년기를 보내고 외환위기를 지나 2000년대, 20대 청춘을 보냈던 세대가 지금의 30대이다. 우리 세대는 그 이전 세대에 비해 확실히 부모의 관심과 통제를 강하게 받기 시작한 세대이다. 배 곯아 본 적도 없고 가난을 직접적으로 겪어 보지 못한 우리 세대는 되려 성적과 비례되는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해 산업현장보다 책상 머리에 더 앉아있어야 했던 세대이다. 이 모든 온실은 부모세대의 희생과 고생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온실을 벗어나길 주저한다. 그것은 곧, 부모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완의 시대』는 그 점에 천착하여 지금의 대한민국을 진단한다. 국가 권력에 통제된 부모 세대는 자신의 전성기가 국가 권력이 가장 강했던 70, 80년대이다. 자신의 전성기를 떠올릴 때 동시에 떠오르는 인물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일단 달려야 했던 시절, 그 목적지는 '부(富)'였다. 당신의 노력과 고생의 결과로 가진 아파트, 직장, 지위임에도 자동반사로 등장하는 박정희의 환영을 마치 지도자 한 사람에 의한 결과물로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휴유증인 지금도 강력하게 남아있다. (박-최 게이트를 보면 휴유증이 아니라 중증 진단이 나올만 하겠지만 이 책의 써진 시점에서만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애완의 시대'에 딱 맞는 세대가 2,30대, 그리고 그들의 부모이므로 나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 책을 읽고나니 우리 부모님께 더욱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힘들게 70년대 산업화를 넘어오셨으면서 그리고 오직 집 한 채 마련해보겠다, 자식들 교육시켜주겠다는 일념으로 80년대를 악착같이 살아오셨으면서도, 나에게 "'내가 이렇게 힘들게 너희들 키웠다. 너희들은 이 부모를 봐서라도 똑바로 살아라." 라는 말씀을 안하신다는 점이다. 내가 직장일로 힘들어 했었을때도 나에게 얼마나 힘드냐라고 위로해 주셨다. 보통 (드라마 같은 곳) "'그게 뭐가 힘들다고 징징대니? 우리는 그 보다 더 힘들게 살았구만." 할 수도 있는데. 그 부분에 감동받아서 내가 먼저 선수쳤다. "엄마 세대는 더 힘들게 살아오셨는데 제가 이 까짓게 힘들다고 해도 되는지.."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엄마는 "너희 세대는 우리 세대랑 다르지. 너희들 세대에서 느끼는 고통과 어려움은 우리 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어. 그리고 우리가 힘들었다고 너희들까지 힘들어서도 안되고." 라고.
이 책의 에필로그 내용이 가슴으로, 머리로 쏘옥 들어왔다. 온몸으로 공감했다. 어쨌거나 저자들의 요지는 박정희를 욕하자는 게 아니라 아직까지 드리워진 박정희 체제의 그림자를 벗고, 더 나은 대한민국을, 더 자유로운 우리들이 되자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말이다. 세대 갈등이 심각해진 시대다. 자식과 부모들부터 한발씩, 뒤로 물러나야 심각한 세대갈등이 조금 완화되지 않을까.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할 수 없지만, 이렇게 문제를 진단해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책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