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도시 이야기>에서 파리의 극단적인 귀족과 하층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중 귀족들의 잔인성을 마차에 치여 아기가 죽고 말았던 이야기로 그리기도 하지요.
- 마차들은 으레 사람을 덮치고도 다친 사람을 그냥 버려두고 떠났으니까. 안 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158)
생명의 존귀함을 논하여 우리는 귀족의 행태를 비난합니다. 그 당시 귀족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들과 하층민을 아예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며 합리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그들은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유로 그들을 ‘당연히’ 비난할 수 있습니까?
학습된 인종 차별이다. 그들도 태어났을 때에는 분명 이런 차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태어난 그 순간부터 백지인 그들에게 그들이 속한 사회가 그들은 다른 존재이며, 자신들을 제외한, 특히 그들의 아랫 ‘것’들은 다른 부류이니, 마땅히 차별 받아야 한다고 서서히 뼈에 새겼을 테다. 그런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우물 안에 갇혀서 그게 진흙탕인지도 모르고 좋다고, 행복해하는 그들을 그저 비난할 수 있을까? 이것은 그들이 누리는 만큼 누릴 수 없는 비천한 자들의 절규가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짐승들을 대함에 있어서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의 생존을 위한 좋은 먹거리가 되게 하기 위해 비좁은 우리 안에 그들을 가두어 그들이 원하지 않는 사료들만 잔뜩 먹이고, 지속적으로 우유를 뽑아야 하므로 지속적으로 새끼를 낳게 만들면서, 정작 새끼는 낳자마자 격리되어야만 하는. 오늘날 우리 인간은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런 짐승들은 당연히 구별을 둔다.
과한 억측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대의 귀족들에게 하인이라는 것들은, 하층민들은 짐승과 같은 살덩어리였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만행이 아니라, 합당하면서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들이었을지도. 그런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아니, 지금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저 그 당시 그 아랫것들만이 비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는 그 사태를 그저 반면교사 할 수 있을 뿐이다. 혹시 우리도 스스로 매우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이 어떤 이에게는 매우 잔인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지는 않을까?
2. <두 도시 이야기>에서 가장 큰 주제는 아마 연좌제가 아닐까 합니다. 찰스 다네이이자 시몽 에브레몽드는 자신의 귀족이라는 지위에 환멸을 느끼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윗대에서 했던 악마적인 행위로 인해 죽음을 대가로 치뤄야 하는 운명을 마주하게 되죠.
- 선생님, 전 이 아이를 위해서 속죄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할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이 아이는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아도 절대 번창할 수 없을 거예요. 다른 누구라도 이 잘못에 대해 속죄하지 않으면 언젠가 이 아이가 죗값을 치러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제게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좀 있습니다. 보석 몇 가지밖에 안 되지만 만약 그 여동생을 찾을 수만 있으면, 제가 죽더라도 이 아이로 하여금, 어미의 동정과 슬픔을 잊지 않고 그 재산으로 불행한 가족에게 배상을 함으로써 죗값을 갚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471)
그의 엄마는 아이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며, 그에게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그리고 그 윗대의 일들을 속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는 한 번은 타당한 이유로 살아남았지만, 마담 드파르주의 복수로 인해 결국 사형을 선고 받게 되지요. 그런 그의 운명은 인과응보일까요?
불교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에 인드라망이라는 구슬이 있다고 한다.
- 인드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가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고 한다.
우리 인생사는 모두 인드라망의 구슬과 같지 않을까? 비록 찰스 다네이가 직접적으로 저지른 죄는 없지만, 그의 윗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죄들이 쌓이고 쌓여 찰스 다네이에게서 폭발하게 된 것이 아닐까? 게다가 찰스 다네이도 만약 그들의 선조와 같은 방식으로 살았다면 그런 구슬의 울림만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 그가 겪은 화는 비껴갔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누군가는 겪어야 할 일이었다. 단순히 한 집안 안에서의 연좌제가 아니라, 범인류적으로 봤을 때 씻어내야 할 죄악이었다. 물론 그 죄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해야 한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의 그물에 걸린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다.
찰스 다네이가 다시 재판부로 회부되었을 때 그 심장의 답답함, 무척이나 예측 가능했던 그래서 더 슬펐던 칼튼의 희생. 피 묻은 칼이 다른 피를 원하는 상황. 그 희생물이 누가 되는 것인가였다. 왜 찰스 다네이는 굳이 위험할 수도 있는 그 곳에 뛰어들어갔을까. 속으로 니가 불나방도 아닌데 왜 불길로 뛰어드냐며 욕을 해댔지만, 그의 성격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그렇게 풀어내야 했다. 꽁꽁 얽혀 있는 그의 피에 흐르는 매듭들을 그가 풀어내야 했다. 그리고 그였기에 풀 수 있었다. 인과응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해결사 같은 느낌?!
그렇기 때문에 그를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그가 받아야 하는 연좌제의 죗값이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그 혼자 겪게 하지 않기 위해, 그를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그는 살아남았고, 그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마저 누리게 되었던 것 같다. 우리의 그물 안에서 이 떨림이 이 구슬에서 저 구슬로 옮겨가듯 우리의 일들, 행복이든 불행이든, 이리저리 옮겨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3. 파리의 시민들은 결국 자신들이 원하던 대로 귀족들을 몰아내고 서서히 나라 전체를 점령해나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나 갈구하던 자유, 평등, 박애를 얻게 되지요.
- 만약 공화국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한테 좋은 일을 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덜 굶주리고 덜 고생한다면, 그 애가 오래 살 수 있을텐데. 어쩌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을텐데. (532)
하지만 그들을 대표하는 것은 그런 사상이 아닌 기요틴인 듯합니다. 어제와, 오늘의 피가 섞이고, 내일의 피까지 준비되어 있다는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시피 매일같이 그들은 희생물이 필요했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굳건한 의지를 표명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일까요?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무차별적인 ‘살인’은 응당 치뤄야만 하는 대가일까요?
몹시 안타까웠다. 그들의 광적인 살인이 혁명에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물론 역사적 사건이니 잘 해결된 일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피가 얼마나 흘렀을까.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건 그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그 동안 쌓인 울분을 풀어내는 과정이었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칼튼씨와 함께, 죽어야만 했던 그 여자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랐던 여인이었는데..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저 조금은 나은 생활이 아니었던가? 소설 속에 묘사된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죽음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은 어느새 그 죽음에 전도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살기 위해 죽여야만 했던 이들은 결국 그 죽음에 잡아 먹혀 자신이 살아 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 자신이 죽이는 건지, 죽어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피는 피를 부른다고 하는 건가? 그저 씁쓸한 장면이면서도 그 당시 느낌을 잘 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그 피를 마시고 살아났다. 소설 앞 부분에 와인을 먹기 위해 달려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