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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도서]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저/이현경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일고십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우연히 김도인님 방송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짧게 낭독해주시는 걸 들었다. 그런 우연에서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느낌이다. 정신과 의사라는 특별한 위치. 그래서 그 안에서도 의사일 수 있었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의 지위가 (물론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올곧은 마음이 더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그에게 살아남을 운을 불러다 준 것 같았다. 좀 더 평범한 수용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빅터 프랭클이 약간의 특권층 아닌 특권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 진짜 그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읽는데 오래 걸렸다. 발에 각 1톤은 되는 쇳덩이가 달린 사람처럼 질질 끌려가는 느낌이다. 자꾸 나까지 무력해진다. 무거워진다. 무너질 것 같았다. 손이 가지 않았다. 손이 닿으면 의욕이 사라졌다. 그들의 무기력증이, 그들의 기계적으로 살아남는 본능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에 한 쪽 읽기가 힘든 순간들도 있었다. 그렇게 자꾸 회피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그 누군가의 광고처럼 몇 십 년 전의 일이라 생각나지 않는다고 묻을 수 있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광고의 숨겨진 의미를 모두가 알고 모두가 쉽게 잊힐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 유대인 수용소 역시 쉽사리 잊혀져서도, 간과되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느리지만 적어도 놓지는 않았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일반 사람들은 이런 모습으로 살았다는 걸 더 잘 알려주었다. 더 참혹했고, 더 끔찍했고, 더 괴로웠던 삶. 그런 모습을 꽤나 담담히 써 내려가는 저자의 필체가 더 슬펐다. 그 상황을 겪고도 그렇게 담담히 쓰고자 노력한 그의 글이 마음에 닿았다. 그래서 이 책이 다른 책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부록에서 독자에게 답하는 부분은 나 또한 늘 궁금했었는데 그 부분을 많이 해소시켜 주었다. 수용소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꼭 이 책을 권한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살겠다는 의지,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 그들을 버티게 만들어 주었을까?

-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할 터였다. 그 이름 뒤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우리였던 존재의 무엇인가가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했다. (34)

이렇듯, 그들 스스로를 버티게 만드는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게 무엇이든 붙잡고 늘어져 살아남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책에서 그려진 모습을 보면 그들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 버티는 사람은 소수이고, 그저 살게 되니, 살아 있으니, 그에 대한 아무 감각이 없으니, 그저 숨을 쉬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느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조차,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을 하거나, 힘을 쓰는 것조차 그들에게는 사치였다. 그 고통과 괴로움을 능가하는 무감각, 혹은 무기력. 그들은 살아 있으나 살아있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 기계에 있었다.

-       우리는 결정의 시간에,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는 나누지 않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간단한 인사였다. 모두 옆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삶에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더 이상 두려움도 없었다. (21)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행할까? 불교에서는 인생 자체는 고행으로 본다. 그 고행을 겪고 겪다 보면 해탈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우리가 괴로운 것이 당연하고, 우리가 슬픈 것이 당연하다. 저자의 수용소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이 드러난다.

-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중략)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110)

-       우리 모두 적어도 몇 시간은 배가 부를 것이므로 싸움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 기분이 좋다. (중략)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들 식으로 불행할 수 있다. (116)

고통이나, 불행이 있는 건 당연한 전제였다. 하지만 그 전제를 바탕으로 어떤 종류의 불행이나 고통을 겪는지가 중점이 되었다. 매슬로의 5가지 욕구 피라미드가 생각나며, 기본적인 의식주가 제대로 되지 않아 주로 힘들고, 그게 잠시라도 해결되면 (아주 드물지만 있다면) 다른 문제들을 떠올려 괴로워했다. 그들에게 삶은 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감정은 스쳐지나가는 걸까? 전제로 깔고 있는 그 감정을 무시할 수 없으니, 우리는 늘 행복을 찾아서 직접 만끽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걸까? 그래서 많은 자기계발서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 인사를 하고, 감사 일기를 쓰라고 하는 것일까? 이 고행과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 무서운 기본 전제가 압도해버리는 삶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게 되면 슬퍼지고 괴로워지고, 우울해지는 것인가?

저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정말 순전히 운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화학자로 뽑혀서 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그 과정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와 무관하게 마지막에 수용소에서 나갈 때 아파서 움직일 수 없어 버려진 게 가장 크지 않았던가. 그 때까지 이런 저런,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살아 남았기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마지막엔 아픈 사람들만 버리고갔던 게 가장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그 안에서도 살 수 있게 해준 건 오직 그것만이 아니다.

-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187)

-       지칠 줄 몰랐던 인간에 대한 관심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 (307)

그 안에서 저자가 유일하게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외부 사람 로렌초.’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레비를 도와주었던 그. 적어도 그 안에서 어떤 일을 겪는지 알고 있으며, 자신도 위험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 그 사람은 저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저자가 받은 건 약간의 물질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마음이었으리라. 자신을 몰아붙이기만 하는 지옥탕 같은 공간에서 그래도 아직은 사람다운 사람도 있구나를 알 수 있게 해주었던 그 외부인.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지만, 결국 저자도 삶의 의미를 잘 찾아서 쥐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자신을 지키겠다는, 눈에 띄지 않겠지만, 적어도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있었기에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거기에 자신이 겪은 일을 반드시 세상에 알리겠다는 의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사명감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그를 살게 했으리라.

그의 삶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갈 때 반드시 외부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함,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지 그리고 삶에 있어서의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

부록에서 내가 항상 궁금했던 두 가지를 시원하게 답해주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이 가지는 독일인에 대한 생각이었다.

-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결국 그리 오래지 않아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276)

수용소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위험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불의에 대한 각성이 필요했다. 그 참혹한 일을 묵인해서는 안 됐다. 저자는 그것을 고의적인 태만함이라고 명시한다. 그래, 그들은 용서 받아선 안 된다. 그 일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사과하고 언급되어, 죗값을 치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질문은 왜 도망치거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지,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지이다. 저자는 그 당시에는 저항 자체를 엘리트와 같은 지식인들이 습득한 보편적이지 않은 사고였다고 한다.

-       결론적으로 저항이 부족했다고 포로들을 비난하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실수다. 이것은 오늘날 어느 정도 일반적인 자산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엘리트들만 가지고 있던 정치의식을 포로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82)

저항 자체가 그들의 머리속에서는 낯선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영주가 그렇게 괴롭혀도 쉽사리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힘이나 생각할 여력이 좀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럴 생각조차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연합하기가 힘든 점, 탈출 한다 하더라도 전혀 모르는 장소이므로 그 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 조금만 이상 행동을 보여도 바로 무자비한 폭행이나 죽임을 당할 수가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설명한다. 그들은 정말 고립되었고, 그들은 정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독일인들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그들을 길들이고, 사육하고, 이용하고, 처참히 죽였다.

  레비는 우연한 기회에 신곡을 들려줄 수 있었다. 그 순간이 레비에게도 뭔가 의미가 있었던 걸까? 그의 마지막 문장이 뭉클해서 쉽사리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       나 자신도 이제야 순간적인 직관 속에서 목격한, 이 거대한 무엇인가를, 어쩌면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오늘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중략)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를 덮쳤다.’ (177)

바다가 덮친 그들. 흡사 신곡의 여러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책 곳곳의 구절들. 그래, 그 곳이 진짜 신곡에 그려진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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