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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도서]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저/박병덕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데미안>을 읽고 실망했고, 여러 헤세와 관련된 책과 사람들을 통해서 왜 좋은지를 들으면서도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작품 또한 손이 가지 않았다. <데미안>이 그리 안 좋았는데도 사람들은 다 좋다는데 왜 나는 안 좋지? 내가 이상한가? 양가 감정으로 헤세의 여러 작품을 구매해뒀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싯다르타>. 일단 제목도 마음에 들고, 스토리도 흥미로웠다. 게다가 요즘 랜선남친님께서 이 책으로 강의를 하고 있어서 언제 강의를 듣게 될지 모르니 미리 읽어 둬야겠다 싶어서 냉큼 읽었다.

 

  완전 취저. 모든 페이지를 멈춰서 생각할만큼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 전체 구성을 보면서도 감탄하며, 비유와 문체에도 빠져들었다. , 헤세는 정말 천재구나. 이렇게나 작품에 잘 녹여내는 사람이구나. 저자의 작품들은 크게 어렵지 않다. 아니, 어렵지 않다기 보다는 주제가 언제나 명확하며 이거라고 들이댈 정도로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서 이런 저런 모습들을 줄거리의 흐름에 맞게 무척 잘 녹여낸다. , 왜 사람들이 헤세를 그렇게 좋아하는 지 알겠다.

 

  싯다르타는 뭔가 타고난 깨달음에 대한 능력치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추구하고 있었던 깨달음’. 구도자의 면모를 보인다.

-       어디에,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곳으로, 자아를 향하여, 나에게로, 아트만에게로 나아가는 어떤 다른 길, 애써 추구할 만한 보람이 있는 길이 있을까? (16)

그 누구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면 이때부터 이미 알아차린 게 아닐까? 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만족할만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본격적인 구도자의 길을 가기 위해 집을 나왔겠지. 어쩌면 태생적으로 구도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윤회하면서 이미 경험치가 좀 쌓인 영혼이 아니었을까?

 

고타마 싯다르타를 만나 제대로 깨달음이란 가르침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장면도 무척 인상적이다. 고타마와 대화 나누는 장면을 보며 저자의 거리두기 방식에 또 감탄했다. 적당히 그 장면과 거리를 두고, 고타마와 싯다르타 사이에도 거리를 두어 고타마도 그대로 인정하면서, 싯다르타도 훼손하지 않는 이야기. 성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이라도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싯다르타. 그럼에도 고타마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싯다르타를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 거리두기가 인상적이었다.

-       결국 내가 단지 또다시 어린애가 되고 또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짓, 얼마나 많은 악덕, 얼마나 많은 오류, 얼마나 많은 구토증과 환멸과 비참함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난 길이었어, 나의 마음은 그 점에 대하여 그렇다고 말하고 있으며, 나의 두 눈은 그 점에 대하여 웃음을 짓고 있어.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어. 내가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나의 내면에서 다시 아트만을 발견해 내기 위해서였어.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였어. (141)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싯다르타가 그 이후 많은 걸 경험한다는 점이다. 오로지 구도자의 길을 걷고 그 안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방향의 삶을 경험해본다는 점이 싯다르타가 가진 힘이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든 나쁘든 겪어야 하는 일이기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리라. 그걸 속세의 많은 타락을 경험하고 싯다르타는 온 몸으로 마음으로 사색으로 깨닫게 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싯다르타는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추구하던 것이 어떤 점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어 정도를 걷고자 한다.

처음에 고빈다의 역할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싯다르타와 마찬가지로 구도자의 삶을 살고자 했던 고빈다. 싯다르타를 도와주는 인물일까 싶었는데, 오히려 싯다르타와 비교 대상으로서 설정된 인물인 듯 하다. 특히 마지막 장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와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145)

-       구도 행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중략)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스님,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 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202)

너무 목적에 집중하는 나머지 그 외의 것들을 모두 배제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에서는 도, 깨달음을 이야기 하지만 사실 물질적인 측면이나 사랑과 같은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돈이 목적이 되어 나쁜 짓을 서슴없이 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 주변의 귀중한 것들을 놓치는 경우도 있으며, 아이의 행복이 목적이라 하면서도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 공부와 공부와 공부만 시키는 경우도 있다. 육아에 있어서도, 재테크에 있어서도, 잘 살고자 하는 마음에 있어서도 목적만을 위한 목적이 되기도 하고, 주객전도가 되어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고빈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우리도 많은 경우 하나의 목적을 위해 무비판적으로 타인의 가르침이나 상황을 수용하려고만 하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해내려고 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기만 하고 정답을 달라고만 한다. 어느 문제든 그것에 대한 답은 나만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런 답을 그대로 수행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답만을 달라고 요구한다. 답이 없는 게 아닐까? 답이 있는 건 분명한가? 무조건 그 답은 아니라고 부정하며 진짜 답이라는 게 있기만을 바라는 건 아닌가? 타인이 주는 답이 나에게도 답인지 확인이나 검증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어제와 오늘의 삶이 같고 내일의 삶도 같다.

-       나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을,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내야지. (62)

-       그렇다, 진실로 도를 구하고자 하는 자라면, 진실로 도를 얻고자 하는 자라면, 어떠한 가르침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법이다. (162)

-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206)

싯다르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경험을 통해 더 제대로 자신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애초에 나에게 맞는 답은 나만이 줄 수 있으며 애초에 내가 깨달은 바는 타인에게 전달될 수 없음을 알았고, 기대하지 않았고, 그렇게 속세로 떠나보는 경험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멋진 내용이다. 내가 직접 찾아야 진정한 나의 깨달음이 된다.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유에서 만들어낸 한정적인 영역일 뿐이다. 경험만이 진정한 스승이라는 말도 이해가 된다. 책이라는 좋은 수단도 있겠지만, 직접 경험하는 것이 가져다 주는 특별함은 그 무엇으로도 보충할 수가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건 강이다. 사실 처음부터 강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읽고 정리하면서 다시 보는데 어느 순간 깊고 깊은 강이 유유히 흐르는 장면이 그려지면서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다. (198)

강을 기준으로 싯다르타의 삶이 달라진다. 강을 건너기전 사문으로의 싯다르타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을 걸었고, 실제로 고타마를 만나 깨달음을 얻은 것도 같다. 그렇게 뱃사공의 오두막에서 하룻밤 자고 강을 건너는 싯다르타는 이제 속세의 길로 들어간다. 속세에서 사문으로써 배운 재주와 깨달음으로 나름 잘 지내며, 서서히 타락의 맛을 본다. 결국 현기증과 구토까지 일으키며 모든 걸 버리고 나온 싯다르타. 자신이 혐오하던 부자들의 태도를 자신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 받고, 강까지 오게 된다. 그렇게 강과 다시 만나 강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처음에는 왜 하필이면 바다가 아니고 강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다보다는 강을 만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인가 했지만, 바다는 고여 있는 느낌이고 강은 어쨌든 계속해서 흐르는 느낌이며, 바다는 종착지이지만, 강은 중간 과정으로 끊임없이 흐르며 변화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강은 바주데바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는 기반이 되어 준다. 먼저 강은 들어주는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바주데바가 경청하는 모습을 강으로부터 배운 게 아닐까 싶었다.

-       바주데바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가 하는 말을 고요하게, 마음을 툭 터놓고, 느긋하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바주데바가 자기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법이 없이, 자기가 말하는 중에 칭찬의 말도 꾸중의 말도 하지 않고서, 다만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만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53)

바주데바는 애초에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듣고 또 듣고 듣는 사람이었다. 이는 바주데바의 원래 천성인 듯한데, 덕분에 강이 하는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바주데바는 아마 이미 득도한 사람인 듯 하다. 고타마처럼 널리 알려진 성인은 아니지만,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자였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이 경청하는 모습이었던 것 같다. 강은 듣고만 있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 필요한 말만 들려주었다.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강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모든 걸 포용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깨달음과 세속의 다리인 것 같기도 하고, 깨달음과 세속 그 어느 것도 아닌 중간계 느낌도 있다. 아마 이 부분은 여러 번 읽으면서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싯다르타의 뜻밖의 아들. 한 눈에 보고 반해 아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느낀다. 애초에 사랑이 가장 큰 화두였던 싯다르타였으니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       그 아이는 자기 아비가 저질렀던 모든 과오들을 되풀이하지 않을까요? 그 아이는 혹시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 온통 휘말려 버리지 않을까요? (175)

-       도대체 당신이 무슨 능력으로 당신 아들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지요? 가르침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훈계를 통해서 그럴 수 있다는 겁니까? (176)

-       아버지 또한 자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자기 아들 때문에 겪고 있는 것과 똑 같은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한 채 이미 오래전에 홀로 외롭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까? 이것은, 이러한 반복은, 이처럼 숙명적인 순환의 테두리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도는 것은 한 바탕의 희극, 기이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192)

하지만 우리가 헤아려야 하는 것은 싯다르타가 느끼는 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깨달은 자, 혹은 많은 경험을 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된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 아니다. 너무 놀라웠던 점이 바로 이것. 싯다르타는 통달했다 싶으면서도 자식 문제에 들어가니 우리와 같은 면모를 보인다. 누구든 아이가 자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란다. 더 쉬운 길이 있고, 더 나은 방향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상황과 본인의 인생이었기에 그런 것이었고, 아이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고 자만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 또한 아이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는 시기가 무조건 올 거라 생각한다. 아이 바로 앞에 구덩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대로 가면 빠질까봐 전전긍긍. 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아이가 정말 그 구덩이에 빠질지도 모르지만. 옆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지도 모르고, 폴짝 뛰어 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발을 헛디뎌 빠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러면서 아이는 성장하고 배우고 자신만의 길을 찾을 것이다. 부디, 잊지 말자 -_-

 

  사랑은 언제나 정답이다.

-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의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214)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건 온전히 나의 능력이다. 나는 아직 이제껏 살면서 더러운 것들이 내 파이프에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일단 그것부터 씻어내고 있는 중이다. 마냥 아름다워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거기까지 가야한다는 건 알게 되었다. 중요한 건 잊지 않기. 하지만 목적만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지 말기. 싯다르타가 했던 것처럼.

 

  이제 랜선남친님 강연을 들으러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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