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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인생

[도서] 태연한 인생

은희경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문학에서 사랑 다음으로 많이 다뤄진 주제는 고독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다수의 고전은 타인의 영향 없이 진정한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좇고 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농부들을 보며 사색에 잠긴 안나 카레니나를 떠올려보라. 고독은 인물의 정신과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오롯하다. 고독을 끌어안고 고독에 저항하며 몸을 뒤척일 때 비로소 가뭇해진 감정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울 때 스탠드를 켜고 소설을 편다. 기이한 아늑함과 예측 불가한 폭력성, 쉼 없는 감정 기복이 고스란한 이야기에 빠져든다. 외로움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도시의 민얼굴을 그려낸 소설이 좋다.

은희경 장편 소설 <태연한 인생>의 화자 요셉은 카페를 글을 쓰는 작가다. 매일 출근하듯 동네 핸드드립 전문점을 찾아 노트북을 편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허기지면 샌드위치 따위로 끼니를 때운다. 요셉은 오늘도 오전 내내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가 카페에 앉고서야 기운을 차렸다. 그는 요즘 뭔가를 써내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카페에서 무참한 표정으로 모니터만 바라본다. 얼굴을 비비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공간이다. 요셉은 이런 열광적인 무관심에 마음이 놓인다. 은희경은 이처럼 작정하고 카페를 본거지로 삼아 요셉에게 그녀의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심어놓는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요셉의 삶은 흘러갔다. 요셉은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p.265)

요셉은 글이 풀리지 않아 카페 통유리를 응시한다. 창밖은 무구한데 정신은 산란하다. 도통 집중을 못 해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가 돌아간다. 카페는 고독한 사람들의 집결지다. 곳곳에서 저마다 각자의 사정에 열중한 이들이 보인다. 그는 몸을 의자에 파묻고 날 선 생각에 젖어든다. 자신의 실패를 비웃는 문단의 얼치기들이 떠오른다. 죽이는 걸 하나 써내고 만다.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리라. 요셉은 막 우산을 털며 카페 문을 연 미녀를 오랫동안 쳐다본다. 그녀를 기틀 삼아 뭔가를 적어나간다. 잘 쓰는가 싶더니 어느새 백스페이스를 연속으로 때린다. 글자가 지워지면 다시 무책임한 공백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새를 못 참고 깜빡이는 커서가 요셉을 옥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문장을 두고 볼 순 없으니까. 요셉은 슬슬 주인 눈치가 보여 근처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기려고 한다. 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몇 번을 못 옮길까.

요셉은 새로 옮긴 카페에서 오래전 연인 '류'를 떠올린다. 권태와 흥분, 체념과 극적인 연출 효과를 두루 갖춘 류의 인생은 통속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통속적인 삶을 회고하며 뭔가 써보려고 하는 이가 요셉이다. 그는 참신하고 독창적인 글을 쓰고 싶지만 늘 미끄러진다. 요셉은 류의 삶이 자신에게 남긴 매혹에 저항할 수 없다. 늘 새로운 이야기에 목을 매면서도 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충동적이며 순수한 의지를 휘감은 그녀를 통해 요셉은 통속의 전희를 맛본다. 류라는 존재는 패턴 안에 기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요셉의 작가적인 운명을 예견하고 있던 셈이다. 우리 모두 각자 의지해야 할 통속이 있고, 그 굴레 안에서야 비로써 예술도 빛을 발한다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작위와 형식이 없이 바로 설 수 있는 이야기란 없듯이, 은희경은 통속을 멸시하기보단 오히려 패턴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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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짱가

    서평이 짧은 단편으로 느껴질 만큼 좋으네요~

    2021.04.29 17:58 댓글쓰기
    • 엠제이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2021.08.13 15:13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