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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소리

[도서] 웃음소리

최인훈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살다 보면 막연히 죽고 싶을 때가 있다. 죽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든 죽음을 생각하는 건 때로 감미롭다. 만족스럽지 않은 삶의 상태를 벗어날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라도 죽음이라는 추상적 상태는 마지막 보루로서의 출구를 마치 희망처럼 제시한다. 어둠 속에서 아주 몹시도 지루하고 끔찍하고 진부하고 재미없는 영화를 보다가 어느 임계점을 만날 때가 있다. 됐어.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 이만하면 충분히 된거야. 중간에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그렇게 캄캄하게만 느껴지는 삶 밖으로 걸어나오는 데 걸림돌이 되는 건 다름 아닌 사후에 남겨질 육신이다. 삶이 떠나고 죽음이 남은 자리에 죽은 몸도 함께 남는다. 누워 꼼짝 못하는 몸은 삶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삶이 끝난 다음에도 스스로의 의지대로 어찌할 수 없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서, 죽음보다 끔찍한 죽는 순간의 공포를 견디고, 죽는 일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고작 그 몸에 대해 조작 가능한 것이라고는 누울 자리를 찾는 일 뿐이다.

여자가 일하는 접대업소가 인테리어 공사로 쉬는 기간 여자는 죽어 누울 자리를 찾아 온천 도시로 가서 여관에 숙소를 잡는다. 숲속의 아늑한 구석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곳 죽기에 안성맞춤이다. 만일 셋방에서 죽는다면 세든 사람들 모두에게 구경거리가 될 것이기에 그녀는 이 곳에서 홀로 죽을 작정이었던 것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두 남녀가 잔듸밭에 누워 밀회를 즐기고 있다. 죽기로 작정한 장소에서는 죽음의 그림자 대신 남녀의 사랑과 웃음이 흘러나온다.

여자는 왜 죽기로 작정한 것일까. 당대 여성에게 자살 동기는 남자의 배신이라는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그 상투성마저도 오랜 시대에 걸쳐 절대적으로 취약했던 여성의 위치를 생생히 드러낸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여러 영역에서 금기시되고 제한된 상황에서 경제력을 갖기 위해 평생 의존할 남자를 찾는 데 실패한 여성이 할 만한 일이 접대와 관련된 일만큼 흔치 않았으나 접대는 나이와 함께 소멸되어 가는 성적 매력을 뜯어먹고 사는 직업이었으므로 더욱 더 남자의 순정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죽으려고 맡아놓은 자리에 남녀가 있으니 여긴 내가 먼저찜했으니 좀 비켜주실래요? 할 수도 없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와도 또 그 다음 날 다시 와도 그들은 아침 일찍도 와서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죽을 자리에 누워 있는 남녀의 웃음소리는 여자가 죽기로 작정한 이유를 독자들에게 설명할 계기가 된다. 시대의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 한 접대부는 자신을 향한 남자의 순정을 딱하게 여겼지만 그 순정에 중독되어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을까.

남자의 성적 욕구에 기대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순정으로 착각하는 오류로 인해 상처받는 게 운명이라면 이번 생은 이 형편없이 상투적이고 진부한 인생극장에 반전을 기대하며 낭비하지 말고 비상구라고 쓰인 희미한 표지판을 따라 성큼성큼 극장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 다음 생에(혹시 있다면) 더 득이 될 것이다. 어차피 이번 생에 쌓이는 업보는 이번 생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윤리적 가치와 규범으로 판단될 것이기에 더 살면 살수록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악이 선보다 클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남녀의 웃음소리는 결국 자신의 웃음소리다. 환상과 꿈과 현실의 모호한 관계가 밝혀지기까지 여자의 심리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죽음에 이르는 삶의 권태라면 조금 더 일찍이 그러니까 젊고 천재적인 작가들이 폐결핵으로 푹푹 쓰러져 죽어 나가던 시대의 상투성이지 가속되는 산업화의 속도에 맞춰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대한민국 경제를 아래로부터 떠받들던 시대의 정서가 아니었다.

산업화의 그늘 속에 소외되고 외면된 그 죽음마저도 구경거리와 뒷담화 소재에 쓰일 하찮은 사람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의 어둠 속에서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하고 더더욱 허용되지 않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그들과 우리의 경계를 나누었으며 그 경계는 얼마나 깊고 넓고 큰 것이었으며 또 이쪽과 저쪽은 얼마나 우연히 결정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웃음소리와 그 속에 배어 있던 희망이 사랑이 이미 두 남녀의 죽음으로 밝혀지면서 웃음과 희망과 사랑이 죽은 것이므로 이제 다시 돌아가서 그것 없는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3일동안 여성의 환각과 잠 속의 꿈과 현실 사이의 몽롱함에서 깨어나서 그녀가 향할 곳이 그 시대에, 어느 곳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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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언강이숨트는새벽

    분명 읽은 책인데 , 리뷰를 보니 내가 읽었던 그 책이 맞나 ... 제 머리를 탓하게 해요 . ㅎㅎㅎ 가끔 , 별일 (?) 아닌 걸로도 죽고 싶을 만큼 , 그런 날이 있죠 . 물론 그 짧은 순간처럼 지나가긴 하지만요 .

    2018.08.13 00:56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게스

      전 어릴 때부터 종종 해봤던 몽상이에요. 오늘 죽으면 내일 시험을 안봐도 되겠지 하는 상상이요 ㅋ

      2018.08.13 12:16
  • 파워블로그 시골아낙

    아 리뷰 너무 좋은 걸요, 죽음을 시도하려는, 기다리는 여인의 꿈과 현실사이의 몽롱함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풀어놓으셨어요, 그 당시의 여성이 선택해야 할 삶이란 정말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2018.08.13 09:10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게스

      아 진짜요? 감사감사요. 무엇이 꿈인지, 무엇이 상상인지, 무엇이 실제인지 그걸 나중에야 생각해보게 되는 반전이 있더라구요. 당대에 이렇게 소외된 여성의 문제를 이렇게 세견되게 접근했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스러워요 ^^

      2018.08.13 12:19
    • 파워블로그 시골아낙

      네 제가 심사위원이라면 우수리뷰로 뽑을 것 같습니다 뭔가 글에 활력이 있고 읽는 게 재밌어요 ㅎㅎ

      2018.08.13 22:49
  • 파워블로그 나난

    죽음을 상상하기. 중학교때였나 정말 한아름 약을 먹으면 죽을까 싶어 했던적이 있었더랬죠. 그때는 무엇이 그리 서럽고 힘들고 아팠을까요. 그 이후로는 죽어야겠다라는 생각을 못해봤죠. 사느라 급급하다보니 죽는다는 생각도 잊히더군요.

    2018.08.13 18:49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게스

      사춘기는 실제로 그걸 실행할 수 있는 무모함으로 가득찬 나이이기에 더욱 그러한 생각이 위험할 거 같습니다. 호르몬 대 폭발이 일어나서 그런 거 아니었을까요 ㅎ

      2018.08.14 10:36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