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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펴내는 "동화읽는어른"이란 모임책에 싣는 글입니다.

모임책에는 몇 대목을 줄여서 싣고, 누리집에는 통으로 올립니다. ㅅㄴㄹ


+ + +


우리말 이야기꽃

첫걸음 ― 스스로 배우는 씨앗



  저는 2001년 1월부터 2003년 8월까지 《보리 국어사전》을 엮는 편집장이자 자료조사부장 일을 맡았습니다. 2003년 9월부터 2007년 4월까지 이오덕 어른이 남긴 책하고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뒤로 전국 지자체와 공공기관 누리집 2000 군데 말씨를 손질해 주는 일도 하고, 서울시나 경기도 공문서를 쉽게 가다듬는 일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등학교만 마쳤습니다. 배움줄(학연), 이름줄(인맥), 돈줄(재산)이 하나도 없이 어떻게 이런저런 일을 맡아서 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때까지 어느 일을 맡아서 하든 저 스스로 배우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그 일을 맡기 앞서도 늘 스스로 배우는 몸짓으로 살았습니다. 이를테면 다음처럼 배웠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사람이 살아오며 겪은 대로 들려주는 이야기라 여기면서, 그 이야기에서 적어도 한 가지를 배울 수 있다고 삼았습니다. 1999년 여름까지 신문 돌리는 일을 하며 달삯을 32만 원 받았는데 이 가운데 10만 원은 적금을 붓고 나머지로 헌책집을 돌며 책을 장만해서 읽었습니다. 헌책집에서 책 한 권을 장만한다면 열 권은 서서 읽었습니다. 이무렵 서울에서 살며 날마다 헌책집 두어 곳을 돌았고, 날마다 헌책으로 스물∼서른 권쯤 장만했으니, 사지는 못해도 책집에 가서 날마다 서서 읽은 책은 이백∼삼백 권이었습니다.


  아는 어른이나 배움길이나 일자리가 딱히 없었기에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나서 이웃 신문지국하고 신문을 바꾸며 열 몇 가지 신문을 꼬박꼬박 읽었고, 대학교 도서관하고 구내서점에서 곁일도 하면서 빈틈이 나면 그곳에 있는 책을 조용히 읽었습니다. 이러다가 1999년에 처음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들어갔고, 그해에 달삯 62만 원을 받으며 ‘이렇게 돈을 많이 받다니, 책을 실컷 살 수 있겠네’ 하고 여기면서 더욱 신나게 책으로 배움길을 걸었습니다.


철 (숲노래, 2019.2.16.)


숨을 죽이는 삼월

반짝 눈뜨는 사월

다 같이 피어나는 오월


푸르게 짙은 유월

하늘이며 바람인 칠월

싱싱히 영그는 팔월

여름


제비가 떠난 구월

무화과 맛있는 시월

무지개빛 감잎 십일월

가을


서리 고드름 눈 십이월

온누리 새하얗게 일월

깊은 잠 깨어날 이월

겨울


  두 아이하고 함께 삽니다. 2019년에 열두 살, 아홉 살인데요, 두 아이는 만화 그리기에 흠뻑 빠져 삽니다. 몇 해 앞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창작법》을 사 주면서 읽으라 했으나 너무 어려워서 못 읽더니 이제는 조금 알아듣겠다면서 읽지만, 책에 적힌 말씨가 어렵기는 아직도 그대로인 듯합니다. ‘기승전결’이 뭔지 한참 아리송해 하기에, ‘봄여름가을겨울’하고 같다고, 이 네 철이 피고 지고 흐르는 결처럼 줄거리를 짜서 이야기를 엮으라는 뜻이라고 풀이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알아들을까요?


  아마 이 풀이도 못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여겨 동시를 쓰기로 했어요. ‘철’이란 이름으로 열여섯 줄을 씁니다. 우리 아이들이 머리로 ‘줄거리 짜기’를 익히기보다는, 네 철이 흐르는 결이 어떠한가를 가만히 몸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으리라 여깁니다. ‘철’이란 동시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2019년 1월에 《우리말 동시 사전》이란 동시집이자 사전을 써냈습니다. 이 동시 사전을 써내기까지 열한 해 걸렸습니다. 큰아이가 두 살 무렵 한글을 가르치려고 처음 동시를 썼어요. 두 살에 벌써 한글을 가르쳤다는 뜻은 아니고요, 아버지가 한국말사전을 쓰는 일을 하며 온 집안이 늘 책투성이에 글투성이로 북새통이다 보니, 큰아이가 갓난쟁이일 적부터 글씨를 따라쓰고 읽으려 했어요. 그래서 이 아이가 즐겁게 삶과 숲을 나란히 받아들이기를 바라며 저 스스로 동시를 써서 이 동시로 아이하고 글놀이를 했습니다. 그런 글놀이 동시를 열한 해 동안 쓰고 고치고 가다듬고 하면서 《우리말 동시 사전》을 썼어요.


국화꽃 (사름벼리, 2018.11.13.)


꽃이 피었다. 

도서관 가는 길에 피었다.

꽃은 노랬다.

꽃이름은 국화였다.


도서관에 가다가 

국화 한 송이 가져갔다.

도서관에 걸어놓은,

내가 코바늘로 뜬 줄에 끼웠다.


이튿날 또 도서관에 갔다.

국화는 말랐다.

그래도 꽃냄새가 났다.

국화꽃이 말라도 예뻤다.


국화꽃 끼울 때

코스모스도 끼웠다.

말라도 예뻤다.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우리 큰아이 이름은 ‘사름벼리’입니다. 우리 집 아이한테는 아버지 성이나 어머니 성을 붙이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는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이란 책에 밝혔으니 이만 줄이겠고요, 사름벼리 어린이가 열한 살 무렵에 ‘국화꽃’이란 동시를 썼어요. 이 동시 끝줄에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란 글을 적기에 좀 못마땅했습니다. 큰아이가 어디에서 이 말을 듣고서 따라적었나 싶었거든요.


  큰아이한테 물었지요. 큰아이는 어디에서 본 적이 없고, 스스로 떠올라서 썼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싶어요.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같은 말은 참으로 누구나 할 만하지요. 이곳저곳에서 갖은 들꽃이 피어나듯이, 이러한 말씨도 이곳저곳 숱한 아이들 입에서 마음껏 터져나올 만하겠지요. 새삼스레 아이한테서 배웠습니다.


  저는 2003∼2007년 사이에 이오덕 어른 책하고 글을 갈무리하면서 어른 책하고 글을 몽땅 서른 벌 넘게 읽었습니다. 적어도 이만큼씩 읽었는데요, 이렇게 읽으면서 느끼거나 배운 한 가지라면, ‘이오덕 어른은 남을 가르치려고 글을 쓰지 않았다. 이오덕 어른은 스스로 배우려고 글을 썼다’라 할 수 있습니다. 이오덕 어른이 편 ‘우리글 바로쓰기’는 사람들이 이 나라 말글을 바르게 쓰기를 바란 뜻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오덕 어른 스스로 이녁 말씨이며 말넋을 송두리째 갈아엎으면서 새로 배우려고 한 일입니다.


  이오덕 어른 가르침을 따갑거나 어렵다고 여기는 분이 많아요. 왜 그럴까요? 바로 남을 가르치려는 글이나 책이 아닌, 이오덕 어른 스스로 담금질하며 갈고닦으려고 쓴 글이나 책이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거듭나려고 하니 더욱 꼼꼼하게 글을 쓰려 했고, 토씨 하나라도 어긋나지 않도록 빈틈없이 가다듬으셨습니다. 스스로 다시 배우고 더 배우려 하셨어요. 눈을 감는 마지막 그때까지도 배움길이던 이오덕 어른입니다.


  삶을 배우면서 살림을 사랑으로 짓는 길이란 으레 이렇겠지 하고 여깁니다. 우리는 남을 가르칠 수 없어요. 스스로 배울 뿐입니다. 밥을 지어 아이한테 차려 줄 적에도 어버이 스스로 맛있다 싶도록 차려야 비로소 아이도 맛있게 먹을 만합니다. 옷을 지어 아이한테 입혀 줄 적에도 어버이 스스로 곱구나 싶도록 지어야 비로소 아이도 즐겁게 입을 만합니다.


  남이 보기에 좋도록 가르치거나 짓거나 차릴 수 없습니다. 스스로 흐뭇하게 받아들일 만큼 가다듬거나 갈고닦는 배움길이요 지음길이라고 느낍니다.


 글벗. 네글벗 ― 문방사우

 칼수다. 수다잔치 ― 쾌도난담


  요새도 ‘문방사우’란 한자말을 쓰는 분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글벗’이란 말을 씁니다. ‘문방사우’를 ‘글벗’으로 고쳐쓰지 않아요. 글을 쓰며 곁에 두는 여러 가지를 바라보며 저절로 ‘글벗’이란 낱말이 튀어나와요. 문득 떠오르면서 쓰는 말씨인 ‘글벗’입니다. 때로는 ‘글님’이나 ‘네글벗’이나 ‘네글님’이라고 해요.


  예전에 어떤 분이 ‘쾌도난담’이란 이야기판을 벌인 적 있는데, 저는 이런 말치레를 반기지 않습니다. 제가 이야기판을 벌인다면 눈치를 안 보고서 꾸밈없이 모두 밝힌다는 뜻으로 ‘칼수다’라 이름을 붙이든지 ‘수다잔치’ 같은 이름을 지으리라 느껴요. 이렇게 고친다는 소리가 아닌, 저라면 처음부터 이런 말을 생각해서 쓴다는 소리입니다. ‘수다판·수다마당·수다잔치·수다꽃·수다숲’도 재미나요.


  말이나 글을 놓고, 또 동시나 살림을 놓고, 우리는 ‘바르게’ 할 까닭은 딱히 없다고 느껴요. 아이들하고 열 몇 해를 살림하며 사는 동안 시나브로 배웠어요. ‘바르게’ 아닌 ‘즐겁게’일 뿐이에요. 즐겁게 살림하며 사랑하고 살아가노라면, 모든 길은 저절로 ‘바르게’ 될밖에 없어요. 즐겁게 사는 사람이 굳이 ‘안 바르게’ 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즐겁게 노래하노라면 모든 걸음걸이는 ‘바른’ 숨결이 되더군요. 처음부터 바르려고 하는 숨결이 아니라, 즐겁게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어깨동무하다 보면, 그야말로 신명나는 바른 몸짓으로 거듭나요.


  저는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이웃님한테 늘 이 말을 꼭 하고 다시 하고 거듭합니다. ‘신나게 하루를 맞이하고, 신나게 하루를 누리며, 신나게 밤꿈을 그려 봐요.’ 하고. 신나게 놀면서 자란 아이가 자라 신나게 일하는 어른이 되어요. 신나게 꿈꾸며 큰 아이가 앞으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일하는 어른으로 우뚝 서요. 어른이 되는 길이란 배우는 길인데, 어른이 되는 길이란, 어린이일 적부터 신바람을 몸에 익히는 길이라고 느낍니다. 스스로 배우는 씨앗이, 서로서로 삶을 밝히는 기쁨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싸우지 말자”라 않고 “서로 사랑하자” 하고 말합니다.



최종규(숲노래) : 한국말사전 짓는 사람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리고, 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길을 걷는다.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내가 사랑한 사진책》,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자전거와 함께 살기》, 《책빛숲》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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