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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바깥담책꽂이랑 살림하는 어깨동무 (2018.3.30.)


― 도쿄 진보초 〈矢口書店〉






  전남 고흥에서 일본 도쿄를 가자면, 먼저 부산공항으로 가야 합니다. 고맙게도 고흥에서 부산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고, 이 버스를 타고 네 시간 즈음 달린 뒤에, 부산전철을 갈아타고 공항으로 가서 짐을 맡기면 되어요. 일본 도쿄는 2001년에 처음 간 적이 있으니 열일곱 해 만에 새로 찾아가는 셈입니다. 국제선을 타기도 오랜만이라 이래저래 헤매면서 비행기를 탔고, 얼마 안 있다가 나리타에 내립니다. 생각해 보면 매우 짧은 길입니다. 고흥에서 도쿄나 오사카 같은 일본에 가는 길은 오히려 고흥에서 강릉이나 구미나 양주 같은 곳에 갈 적보다 짧은 길이기까지 합니다.




  시외버스에서, 전철에서, 비행기에서, 이웃이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가 하고 가만히 헤아렸습니다. 이러면서 동시를 스무 자락쯤 씁니다. 누구한테 줄 한글 동시인지 모르지만 저절로 이야기가 흘러나와서 바지런히 옮겨적었습니다. 나리타공항에 내려서 도쿄로 들어서는 전철을 탄 뒤에도 동시를 씁니다. 제대로 전철을 탔는지 아리송하지만 길을 잃을 걱정은 안 합니다. 요새는 손전화로 어느 나라에서든 길찾기를 할 수 있거든요. 더욱이 종이로 길그림을 잔뜩 뽑아 왔습니다.




  전철을 함께 탄 사람들이 수다를 떠는 말씨는 거의 일본말이지만, 사이사이 영어가 섞입니다. 마치 사투리를 듣는 듯 이 말씨를 한귀로 들으면서 동시를 더 썼고, 오늘 하루 동안 스물여덟 꼭지를 마무릅니다.




  우에노역에서 전철을 내려 갈아탑니다. 스무 해가 얼추 안 된 예전에 이곳에 왔던 일이 한달음에 떠오릅니다. ‘어쩜, 이 나라 이 고을은 영 안 바뀌네? 그대로잖아?’ 군데군데 한글 알림판이 붙은 모습이라든지, 새로 생긴 가게나 다를 뿐, 길이나 골목이나 전철역이나 웬만한 골목집은 그대로라고 느낍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오랜 살림이요, 문화이자 역사일 테지요. 길바닥 돌을 바꾼다든지 뭘 어수선하게 뜯어버리고 새로 올려서 장사를 잘하는 길을 찾으려 하면 그저 장사일 뿐, 살림(문화)하고는 멀어질 테고요.




  도쿄 진보초에서 만난 분이 잡아 준 길손집(호텔)에 짐을 풀기로 합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값이 세겠거니 여겼습니다만, 이 길손집은 하루에 1만 엔쯤 치릅니다. 한국에서도 서울 한복판이면 10만 원쯤 잠값을 치러야 하니 비슷한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아무튼 짐은 나중에 갈무리하기로 하고, 얼른 가벼운 차림에 사진기를 챙겨서 나옵니다. 벌써 해가 기울려 하거든요. 해가 기울면 일본 진보초 책집은 일찌감치 문을 닫아요. 문을 닫기 앞서 한 곳이라도 찾아가고, 한 자락이라도 장만하며, 사진도 찍자는 마음으로 바쁩니다.




  길손집을 나와서 처음 마주하는 책집은 〈矢口書店〉입니다. 이곳은 2001년에 이곳에 왔을 적에도 아주 남달리 보인 책집이었어요. 그러나 그때에는 이곳에서 책을 사지 못했습니다. 이 마실길에는 이곳에서 꼭 책을 사야겠다고 다짐하며 바깥담에 마련한 책꽂이를 살핍니다. 책집 안쪽도 멋스러울 테지만, 〈矢口書店〉은 바깥담을 빙 두른 책꽂이가 어여쁩니다. 아침이나 낮에 보아도 멋스러울 책빛일 텐데, 어스름에 보는 책빛도 멋스럽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바깥담을 두른 책꽂이를 놓을 수 있을까요. 슬쩍 훔치려는 손길을 살며시 어루만지려는 책손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일본에도 책을 훔치는 이가 제법 있다고 합니다만, 어쩌면 이 ‘바깥담책꽂이’는 책으로 마을을 새삼스레 감싸면서 포근한 기운을 나누어 주는 새길일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책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살피다가 사진책 《北上川》(?部澄, 平凡社, 1958)을 봅니다. 어느 냇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으로 묶었습니다. ‘키요시 소노베’란 분 사진인데, 사진결이 푼더분하면서 그윽합니다. 1958년 사진책이라면 이 냇마을 삶자락을 적어도 1950년대부터 찍었다는 뜻일 테고, 어쩌면 1940년대나 1930년대부터 찍었을 수 있으며, 오래도록 곁에서 지켜보고서 찍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58년에 이만 한 사진책을 선보이려는 사진님이 있었을까요. 아니 1968년이나 1978년이나 1988년에 이르도록 냇마을이며 들마을이며 숲마을이며 바닷마을 사람들하고 어깨동무하는 이웃이라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 님이 몇이나 있었을까요. 잊혀지거나 사라지는 옛모습을 담는 사진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서 즐겁게 살림을 지으면서 노래하는 이웃하고 손을 맞잡는 웃음하고 눈물로 담는 사진입니다.




  두 손에 찌르르 울리는 숨결을 느끼며 이 사진책을 골라 〈矢口書店〉 안쪽으로 들어서는데, ‘스미마셍’이라 하며 곧 문을 닫는다고 알립니다. 안쪽에도 눈에 뜨이는 아름다운 사진책하고 만화책이 코앞에 있으나 더 고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꼭 하나를 만났으니 고맙지요.




  이튿날 다시 찾아와 보는데, 어제 안쪽에서 보던 그 책꾸러미를 어느 자리 어느 칸으로 옮겨서 꽂거나 두었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어제오늘 만나지 못한 책이라면, 앞으로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여기에서든 다른 데에서든.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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