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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체리나무 냄새를 맡다 (2018.3.31.)

― 도쿄 진보초 〈古書かんたんむ〉



  벚꽃이 피는 철에 맞추어 도쿄 진보초 책집거리가 북적입니다. 도쿄로 마실을 오기 앞서는 가을에만 헌책잔치를 벌이는 줄 알았으나, 도쿄 진보초에 와서 이야기를 들으니 다달이 크고작은 책잔치가 꾸준히 있다고 하더군요. 가을은 사람들이 가장 북적이는 엄청난 책잔치라면 여느 때에는 조촐하게 다 다른 이야깃감을 마련해서 조그맣게 책잔치를 이어간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꽤 눈여겨볼 만하구나 싶습니다. 한국에서도 새봄에는 ‘새봄 책잔치’를, 여름에는 ‘짙푸른 책잔치’를, 가을에는 ‘넉넉한 한가위 같은 책잔치’를, 겨울에는 ‘흰눈처럼 새하얗고 포근한 책잔치’를 꾀할 만해요. ‘모시옷과 책잔치’라든지 ‘유자내음과 책잔치’라든지 ‘논개와 책잔치’라든지 ‘나비와 책잔치’처럼, 고장마다 벌이는 여러 잔치판하고 책을 맞물려서 재미난 놀이판이나 이야기판을 벌일 수 있어요.


  해마다 큼직하게 책잔치 한 판만 벌이기보다는 꾸준하게 다 다른 이야기가 철마다 새롭게 피어나도록 꾀한다면 즐겁겠네 싶습니다. 책이란, 어느 한 철에만 읽지 않을 테니까요. 철마다 다른 이야기를 읽으면서 철마다 다르게 생각을 틔우고 마음을 가꾸는 길일 테니까요.


  ‘벚꽃책잔치’가 벌어지는구나 싶은 거리는 사람이 제법 물결칩니다. 작은 잔치마당에 이만큼 물결이 치면 큰 잔치마당에서는 걸을 틈이 없겠네 싶어요. 문득 ‘誕れ60年代!’라고 하는 글씨가 곳곳에 적힌 책집 앞을 지나갑니다. 태어난 지 예순 돌이 되었다는 책집이라면 1950년대부터 있었다는 뜻일 테지요. 한국에서는 참 오래된 책집이라 할 테지만 일본에서는 ‘고작 예순 돌’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그런데 이곳 〈古書かんたんむ〉는 책만 펼치지 않습니다. 퍽 묵은 연필도 여러 가지 내어놓습니다. 얼마나 오래된 연필일까 어림해 보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연필을 깎은 해는 모르겠으되 책집 나이 못지않게 묵은 연필이지 싶고, ‘special pencil’이라는 이름이 붙은 “globe cherry” 열 자루 꾸러미 하나를 1000엔에 장만하기로 합니다. 큼큼 냄새를 맡습니다. 아렴풋하지만 체리나무 내음이 살짝 감도는 듯합니다. 아직 안 쓴 연필이니 칼이나 연필깎이로 깎으면 오랜 체리나무 냄새가 더 나겠지요.


  300엔 값을 붙인 ‘손바닥책 천싸개’도 볼 만합니다. 연필보다 값이 눅다고 여기면서 고양이 무늬가 들어간 천싸개를 고릅니다. 살피끈도 붙었어요.


  벌레 이야기를 온누리 흐름으로 읽으려고 하는 《蟲の宇宙誌》(奧本大三郞, 集英社, 1984)는 남다른 이야기를 품었겠지요. 한국에서도 벌레나 뭇목숨 이야기를 이처럼 온누리를 아우르면서 담는다면 한결 깊고 넓을 뿐 아니라 사람살이도 새롭게 읽는 길을 트리라 봅니다.


  만화책 《エプロン おぼさん 1》(長谷川町子, 姉妹社, 1972)도 고릅니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에 나온 만화책이 그리 묵지 않았다 할 만하고, 어렵지 않게 찾아서 넘길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이제 1970년대 만화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워요. 1960년대나 1950년대 만화책은 엄두도 내기 어렵습니다.


  일본이 만화를 널리 읽거나 아끼기에 오랜 만화책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할 테지만, 이보다는 책을 책으로 여기는 눈길이 알뜰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야지 싶어요. 만화는 만화이면서 책이 됩니다. 그림은 그림이면서 책이 되지요. 사진은 사진이면서 책이 됩니다.


  한국은 아직 만화책이나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책으로 깊이 마주하는 살림이 좀 얕아요. 그래도 그림책을 놓고는 마음을 기울이는 이웃님이 꽤 늘었습니다만, 만화책하고 사진책이 널리 사랑받기까지는 한참 남았지 싶어요.


  숲에 갖가지 나무가 자라면서 한결 싱그럽고 푸르다면, 책이라고 하는 마을에서는 글책이며 그림책이며 만화책이며 사진책이 두루 피어나면서 맑게 어우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때에 비로소 책마을이요 책잔치요 책나라요 책밭이요 책읽기요 책살림이라 할 만할 테고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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